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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

       겨우 340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철탑의 최상층.

         

       이 최상층에서도 가장 드높은 첨탑에 다다르면 커다란 문이 나타난다. 코발트와 니켈, 그리고 약간의 석회가 포함된 철문이 아가리를 떡 벌린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철문을 넘어서면 원탁이 나온다. 로즈마리와 블랜튼은 원탁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는 아홉 옥좌로 발걸음을 옮겼다. 블랜튼 공작은 비교적 입구와 가까운 곳에 앉았고, 로즈마리는 더 먼 곳의 옥좌에 등을 붙였다.

         

       이곳에 앉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높은 하늘, 즉 구천(九天)을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오직 절멸급만이 이 옥좌에 앉아 회의와 다과를 즐길 자격이 있었다.

          

       절멸급이 이곳에 모이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들의 제왕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그런 목적을 지닌 마수들을, 아렌스 대륙인들은 이리 불렀다.

         

       구천지대계(九天之大械).

         

       “하나, 둘, 셋… 참석률이 저조하군.”

       “어쩔 수 없잖아? 세 마리는 덩치가 워낙 커서 여기 오지도 못한다고.”

       “그걸 알면서 뭐 하러 의자를 가져다 둔 거야?”

       “어디까지나 기분이야, 기분.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텐데 체면이라도 세워줘야지. 안 그러면 걔네들 삐져.”

         

       절멸급 마수라고 해서 모두가 인간의태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다. 개중엔 킬로미터 단위의 큰 덩치를 지닌 녀석도 있다. 그런 녀석들은 마대륙의 중심을 벗어나는 순간 적의 감시망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곳에 오는 건 꿈도 못 꾸고, 옮겨다닐 때에도 공간이동진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에 비해 인간형은 사정이 훨 낫다. 몸집도 작고, 인간과 닮았으니까. 들킬 가능성이 비인간형 마수보다는 현저히 낮다.

       

        인간의태를 하는 절멸급 마수 중 자신의 정체를 들킨 개체는 아직 없다. 서열 7위인 잭 블랜튼이 그러했고, 서열 4위인 로즈마리가 그러했다. 역사적으로 발각된 인간의태 마수는 모조리 재앙급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의 소집이잖아. 무슨 이유로 부른 건데?”

         

       로즈마리는 입에 막대사탕을 꼬나물은 채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나하고 7석은 왔고… 여기 탑 주인은 당연히 있네. 그 다음이 2석 언니랑, 5석따리 까마귀 부리도 왔어. 전체 열 명 중에 다섯 명? 세상에, 참석률이 50퍼센트나 돼!”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아냐아냐, 이 정도면 많지! 다들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렵잖아?”

         

       블랜튼과 조르마리가 대화를 잇던 중이었다. 안쪽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

         

       “오늘 의제에 비교하면 얼마 안 온 거야, 로즈마리.”

         

       두 번째로 서열이 높은 자가 앉는 옥좌. 그 옥좌 위에서 마력초를 뻐끔거리던 백발의 소녀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은 것이다.

         

       그녀가 이번 회의를 소집했다. 2군 군단장이 소집 명령을 내렸으니, 그보다 낮은 위계의 마수들은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물론 덩치가 커서 어쩔 수 없이 참석하지 못한 경우는 참작한다. 서열이 더 높은 1석도 2석의 소집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된다.

         

       모두의 시선이 백발 소녀에게로 고정됐다. 회의 주제를 꺼내기에는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다들 알지? 그저께 2차 저지선이 뚫렸어.”

         

       쾅!

         

       바로 옆자리에서 육중한 소리가 났다. 책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위로 탄환 몇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옆에 앉아있던 로즈마리는 책상에 떨어진 납탄 중 하나를 주워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잠시간의 적막.

       

       “…그게 진짜인가?”

       “아, 동포들끼리 이렇게나 수발이 안 맞아서야 쓰겠나. 북방 커버하는 게 3군이면서 어떻게 네가 그 소식을 모르고 있냐?”

       “탑을 원래 위치로 옮기느라 보고를 못 받았다. 그리고 우리 군단은 임무형 지휘체계를 선호하거든.”

       “됐다, 됐어.”

         

       백발 소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대화 주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인간 새끼들이 2차 저지선을 넘었다는 건 중차대한 일이야.”

       “이유가 뭔가? 정령도 아니고, 그 버러지들이 어떻게 우리 땅을 넘어올 수 있는 거지?”

       “그건 플레어 때문입니다.”

         

       가만히 앉아있던 블랜튼이 5석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5석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잘 모르겠다는 의사표현을 하자, 로즈마리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 아카데미에서 플레어 스크롤이 완성됐어. 심지어 만든 년이… 아니, 민감한 얘긴 하지 말자. 어쨌든 그거 제작법이 무료로 풀려서 인간놈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고 있는 모양인가 봐. 볼 것도 없이 플레어 때문에 3군 따까리들이 픽픽 쓰러져가는 거겠지. 이대로라면 우리도 무사 못 해.”

       “로즈마리, 넌 겁이 많아서 탈이다. 4석씩이나 해 먹으면서 겨우 인족이 만든 마도를 두려워하는가?”

       “누구처럼 대가리에 벌컨포 얹고 돌아다니는 떡장갑은 아니라서 말이야. 나같이 가련한 소녀는 그런거 맞으면 몸이 못 버틴다구.”

         

       로즈마리의 장난기 어린 말재간에 책상이 또 흔들렸다. 아까보다 많은 수의 납탄이 짤랑짤랑 떨어졌다.

       

       2석은 한숨을 쉬며 책상 끝으로 떨어지려는 탄환을 쓸어담았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를 빠르게 이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말이야, 북방이 밀리고 있는 관계로 제국 내부를 적당히 휘저어 줄 동포가 필요하거든. 내 생각엔 지금 잠입해 있는 4석하고 7석이 움직여주면 어떨까 하는데.”

       “안 돼. 우리도 바빠.”

         

       로즈마리가 손사래를 쳤다. 블랜튼도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마리의 거절 의사에 동조하겠다는 뜻이었다.

       

       “곧 있으면 틸레트로 불의 로드스톤이 이전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로드스톤을 수중에 넣을 때까진 저희 둘 다 황성에서 큰일을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너희는 제외하고. 3군은 여기 지키니까 빼자. 아, 그리고 난 이 회의 끝나자마자 엘프 있는 곳에 잠입해야 하는데…. 그러면 남은 군단장이 하나밖에 없네?”

         

       백발의 소녀를 포함하여 참석자들의 고개는 자연스레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까마귀 부리처럼 생긴 가면을 쓴 남성이 앉아있었다.

         

       검은 가면에 검은 중절모, 검은 로브와 검은 장갑까지. 온통 새까만 의상으로 무장하고 있는 남자였다. 부패와 역병을 인간으로 형상화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5석, 이번 일은 네 군단에게 일임하겠다.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고 성도를 초토화시켜 줘.”

       “…어쩔 수 없군.”

         

       조별과제의 희생양이 정해졌다. 그가 가면을 고쳐쓰자 마스크 틈에서 허브 냄새가 새어나왔다. 계피와 생강, 마력초 등의 온갖 향도 조금씩 섞여있는 듯했다.

         

       그가 날숨을 내뱉자 로브 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갖 이형의 존재들이 5군 군단장의 몸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지네와 뱀, 커다란 각다귀와 거미까지.  온갖 흉물이 한데 엉켜 남자의 몸 주위를 제 집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고, 전부 강철로 이루어진 모방체였다.

         

        마왕군에서 이런 잡것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테크니션은 한 명 밖에 없다.

       

       구천지대계 제5석, 역병과 임종을 담당하는 마수들의 군단장.

         

       “그래, 흑사병이면 충분할까?”

         

       ‘병마(病魔)’의 엔테로 콜리티카. 

       

       

       **

         

         

       “좋아. 로즈마리와 잭이 그 작전을 실행하기 전까지는 페스트로 버틴다. 내가 2군을 빌려줄 테니 3석은 가능하면 1차 저지선까지 인간들을 내쫓아버려. 이상으로 회의 끝.”

       “라저.”

       “그 밖에 다른 건 없지? 나 진짜 간다?”

         

       쾅! 쾅! 콰앙!

         

       “…무슨 일이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철탑이 좌우로 흔들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석면이나 철가루 따위가 회의장 책상을 어지럽혔다.

         

       “밖에서 무언가에 맞은 듯합니다. 아마 인간놈들이 아닐까….”

       “설마, 적의 침공을 여기까지 허용했다고?”

       “3차 저지선이 뚫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웃기지 마라. 만약 그렇다면 마왕군 체면이 땅에 곤두박질쳐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족보 없는 딱따구리 새끼들이…. 아가리는 잘 털어요.”

         

       서로가 눈치를 봤다. 누군가 한 명은 바깥 상황을 보러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도 섣불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약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인간들 앞에서 맨 얼굴을 드러내길 꺼릴 뿐이었다. 

       

       쾅, 쾅, 쾅, 쾅!

       

       시간이 촉박하다. 탑 중앙의 무게추가 큰 폭으로 왕복 운동한다.

       

       최대한 인간처럼 꾸미고 나가더라도 소용없다. 이곳은 3차 저지선, 보통이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 인간처럼 생긴 녀석이 있다? 인간의태 마수라는 걸 무조건 들킨다.

       

       그럼에도 군단장 중 한 명을 뽑아야만 했다. 백발 소녀는 재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로즈마리와 잭은 나가지 마라. 괜히 적에게 얼굴을 보였다가 놈들이 눈치채면 계획이 수십 년은 뒤로 미뤄져. 아, 그리고 3석은 탑에서 마수들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웬만해선 나가지 말고…. 가만 보자. 역병의사는 가면 쓰고 돌아다니니까 괜찮을 법도 한데.”

       “일 두 개를 동시에 맡으라고? 나는 싸움꾼이 아니야.”

       “하, 진짜 장난 없네.”

         

       다른 마수들이 소녀를 노려보았다. 한결같이 꼬우면 네가 나서라는 표정이다. 결국 자신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내가 간다, 모지랭이들아.”

         

       탑은 계속해서 무너졌다. 탑주는 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계단을 일일이 내려가기엔 시간이 걸린다. 소녀는 첨탑 창문 하나를 열어젖힌 뒤 그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중력가속도를 받아 점점 빨라졌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지상에 안정적으로 착지할 정도가 되었다.

         

       눈을 즈려밟은 소녀는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주변을 탐색했다.

         

       인간들이 보인다. 수백 명 규모에 달하는 인간들이 탑을 향해 날아오듯이 접근하고 있다. 그것도 온갖 버프 마법을 떡칠한 채였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들의 왕이 천 년 전 정령계를 침공할 때와 같은 비주얼이었다. 소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빛무리 하나가 뺨을 할퀴고 지나간 건 그때였다. ‘쐐액’ 하는 소리가 났고, 그 반응에 소녀는 순간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

         

       오른쪽 뺨이 뜨겁다. 광선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열감이 진하게 남았다. 볼을 슬며시 어루만지니 진득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바닥에서 시커먼 물질이 묻어나왔다. 타르와 석유, 그리고 흑색을 띠는 기타 등등의 물질들. 마지막으로 피를 흘린 지가 언제였더라?

       

       모른다. 그래서 화가 났다.

       

       백발의 소녀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입에 마력초를 물었다.

         

       한밤중,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극지방이라서 그런지 그럼에도 적군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적의 수는 300명을 조금 넘은 수준. 베테랑만 모인 결사대인 모양이다.

         

       소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을 응시했다.

         

       어둠을 밝히려는 듯 이글거리며 다가오는 붉은 안광. 눈가루가 묻었음에도 자기 존재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황금색 머릿결이 칼바람에 나부낀다.

       

       한 여자가 섭씨 1천 5백 도로 타오르고 있는 스태프를 휘두르며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녀의 군복 곳곳에는 필리우트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국화가 세 송이 얹혀 있었다.

         

        소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일 있어도 여기까지 오진 말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소녀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다가오는 적을 맞이했다.

         

       ─ 대장님, 마탑 앞에 소녀 한 명이 보입니다!

       ─ 조심해라! 인간형 마수일 수 있다!

       ─ 저, 저거…. 혹시 금안족 아닙니까?

         

       “아, 그렇지. 변색필터를 안 꼈네.”

         

       소녀는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다시 표정을 풀었다.

         

       “뭐 어때.”

         

       여기까지 온 이상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 금안족인데 생포하거나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무슨 물러터진 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 사는 놈들은 전부 마수다! 쳐라!!

         

       불과 2백 미터만을 남긴 거리. 상대측 마법이 하나둘씩 장전된다.

         

       스크롤이 동작한다. 플레어를 구성하는 빛무리가 마전지를 뚫고 나와 자신에게로 쏟아졌다. 소녀와, 소녀의 바로 뒤에 있는 철탑을 한 번에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소녀는 납탄을 짤랑거리며 마력초에 불을 당겼다. 알싸한 마력 냄새가 순환계를 한 바퀴 회전한다. 옛날 옛적 여신에게서 빼앗겼던 권능을 잠깐이나마 되찾는 기분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수한 플레어.

       

       그 플레어를 응시하며, 소녀는 영창을 개시했다.

         

       

       

       

       

       

       

       

       

       

       

       

       [상급 전계마도 ─ 레일건(Rail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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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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