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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

     

    아셀라는 이불 아래에서 나를 껴안은 채 얌전히 잠들어 있다.

     

    흠, 대체 이 상황은 뭘까.

     

    분명 마지막 기억은 아셀라를 데리고 뛰다가 암살자를 쫓아낸 장면이다.

     

    정신이 맑은 걸 보니 기절한 덕분에 푹 잤나 보다.

     

    “황녀님?”

     

    소심하게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다.

    그냥 아셀라인 것 같다.

     

     

    아니, 뭐야 이거.

     

     

    내 몸은 깨끗하고 옷도 갈아 입혀진 상태였다. 시녀들이 닦아줬나 보다.

     

    아셀라는 잠옷을 입었다. 엑스레이 검사 때 봤던 것과 디자인은 같지만 검정색이었다.

     

    근데 왜 내 침대에 있냐고.

     

    내 방에.

     

    “황녀님.”

     

    여전히 새근새근 조용한 아셀라.

     

    “야, 아셀라.”

     

    …진짜 자나 본데.

     

    다행이었다. 혹시나 깨어있었으면 불경죄로 끌려갈 뻔했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아셀라를 관찰하다 보니 묘한 충동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네리아와 아셀라의 볼살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말랑할까.’

     

    주치의여도 쓸데없이 옥체를 만질 순 없다.

    어디까지나 진찰에 필요한 부분만, 업무를 위해 확인할 뿐이다.

     

    10년 후의 아셀라는 팔다리든 얼굴이든 늘씬하기에 지금이 아니면 확인해볼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디.’

     

    나는 슬쩍 아셀라의 얼굴에 손등을 가져다 대보았다.

     

    아셀라는 살짝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큰 반응은 없었다.

     

    …잠을 깊게 자는 체질인가?

     

    수면검사까지 해보진 않았으니까 자는 습관은 모른다.

     

    ‘조금만 더 만져볼까.’

     

    엄지손가락으로 아셀라의 볼을 훑어본다.

     

    감촉은 네리아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밀가루를 잔뜩 채워놓은 고급 리넨 풍선 같달까.

     

    슬쩍, 검지까지 사용해 가득 잡히게 쥐어본다.

     

    …흠.

     

    비교 완료.

    쿠션감은 네리아가 훨씬 좋다.

     

    그래도 어째 피부가 차갑고 이리저리 원하는 모양으로 주무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게,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우응.”

     

    아셀라가 불편함을 느꼈는지 내 품에 고개를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깜짝이야.

    들키는 줄 알았네.

     

    먹이를 찾아 땅굴을 파는 모양새가 된 아셀라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보니, 이번에는 볼록 튀어나온 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아셀라의 귓등을 살며시 쓸어내리는 순간.

     

    “히약!”

     

    기묘한 비명과 함께 아셀라가 어깨를 팍 움츠리며 내 옆구리를 꼬집듯 꽉 쥐어짰다.

     

    아파.

     

    “황녀님? 깨셨어요?”

     

    여전히 등을 움찔거리는 아셀라.

     

    “수면 상태에서는 그렇게까지 근육이 장기간 수축하지 않아요. 깨셨으면 깨셨다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그제야 아셀라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것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왜 깨워.”

     

    “주무실 곳을 착각하고 계시길래요.”

     

    “…내 궁이잖아.”

     

    “그 말씀도 맞긴 한데요. 굳이 제 침대일 필요는 없잖습니까.”

     

    “…막스 방인 줄 착각했어.”

     

    “막스요?”

     

    “응. 쉴라가 목욕하러 가서….”

     

    “쉴라는 누군데요?”

     

    “내 인형… 몰라도 돼!”

     

    아셀라가 투정을 부리며 발로 침대를 쿵쿵 찼다.

     

    “공자,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나.”

     

    “원래 짧게 자는 편입니다. 그래도 어젯밤은 푹 잔 느낌인데요.”

     

    “…짜증 나. 일어나기 전에 나가려고 했는데.”

     

    “뭐가요?”

     

    “시끄러.”

     

    매일같이 느끼는데 아셀라는 아침에는 늘 저기압이다.

     

    혈압이 낮은 편이니 이해해 줘야지.

     

    “어제 그런 일도 있었으니 황녀님은 더 쉬세요. 저는 즉시 상황 파악하고 대응에 나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홱, 아셀라가 내 어깨를 손으로 눌렀다.

     

    “공자도 더 자.”

     

    “예? 하지만….”

     

    “자.”

     

    “예.”

     

    경험상 아셀라에게 같은 명령을 세 번 하게 만드는 건 결코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나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천장 문양의 점 개수나 세기로 했다.

     

     

     

    ***

     

     

     

    “면목 없습니다.”

     

    타냐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호위기사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암살자에게 습격당하시는 동안 곁을 지키지도 못하고…!”

     

    타냐는 이번 사건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는지 꽉 쥔 양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애초에 알고도 보냈는데. 암살자는 나 혼자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아셀라의 명령이 있기도 했고, 범인 잡기도 중요했다.

     

    그녀가 이렇게나 완전히 저자세로 나오는 일은 처음이라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나는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대며 의자에 벌렁 몸을 기댔다.

     

    “아이고, 삭신이야. 단장, 내 뒤통수에 상처 보여? 어제 넘어져서 까졌어. 전력으로 뛰어서 온몸이 쑤시네.”

     

    “으윽, 전부 제 불찰….”

     

    “트라우마도 생긴 것 같아. 뾰족한 날붙이만 보면 겁에 질려서 벌벌 떨려.”

     

    “할복…! 할복으로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타냐가 두 눈을 꽉 감고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더 놀리다간 진짜 저지를 것 같았기에 슬슬 그만두기로 했다.

     

    “농담이야, 멀쩡해. 시종으로 위장했던 암살자를 잡았다며. 수고했어.”

     

    “허나 임무에 실패했음은 사실….”

     

    “아셀라 명령이었으니까 됐다니까. 네리아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흐잉, 오라버니께 큰일 난 줄 알았어요….”

     

    네리아는 어제 많이 놀랐는지 내내 손수건을 들고 코를 훌쩍였다.

     

    “보리스랑 브루노가 바로 귀빈실까지 대피시켰다며. 잘했어.”

     

    “저희야 임무를 수행했을 뿐임다. 선생님이 고생하셨죠.”

     

    “암살자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브루노가 주먹을 부딪치니 두툼한 삼각근이 위협적으로 불룩거렸다.

     

    “이번 암살자 건은 커. 황실까지 잠입해 공작과 황녀를 노린 사건이니. 배후를 밝혀내면 상당한 공적이 될 거야. 애당초 누구 사주일지 짐작도 가고.”

     

    “저, 정말요? 오라버니, 황실은 원래 이렇게 위험한 곳인가요? 저, 오라버니께서 다치시는 건 싫은데….”

     

    네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황가 주치의가 꼭 좋은 일만 있는 직업이 아님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당장 내게 일을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생각이 복잡해졌을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바로 아셀라와 대응할 거야.”

     

    “네에… 가끔은 저택에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다음에 휴가 내고 갈게.”

     

    나는 네리아를 안심시키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도 가고 싶어, 나도.

     

    그래도 당분간은 뭐, 해치워야 할 일들이 꽤 있으니까.

     

    “단장, 언제까지 그러고 있게?”

     

    타냐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다가 점점 그랜절로 이행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 못 차리는 타냐를 일으키고 아셀라를 진찰하러 이동했다.

     

     

     

    ***

     

     

     

    “암살을 사주한 범인이 자백했다고요?”

     

    “그래. 어떻게 파티에 초대받았는지도 모를 작은 세력의 남작이야. 보나마나 미리 매수한 위장용이겠지. 그를 처형해서 사건은 끝날 거고!”

     

    쾅!

     

    내게 검사를 받던 중 아셀라가 짜증을 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화내지 마세요. 다시 측정해야 하잖아요.”

     

    “안 나게 생겼니? 우리는 죽을 뻔했는데 대놓고 적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라잖아.”

     

    아셀라는 혀를 차고는 눈을 이글거렸다.

     

    “우리 기사가 둘이나 죽었어. 공자, 나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원한은―”

     

    “열 배로 갚으셔야죠.”

     

    “어떻게 알았어? 바로 그거야. 산산히 찢어버리겠어.”

     

    아셀라는 꽤 격하게 분노를 표출했는데, 그런 거 아닐까.

     

    왜, 사건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침착하게 생각을 되짚어보면 화가 더 올라올 때가 있잖는가.

     

    안 그래도 짜증 나던 차에 위장 범인 소식이 기폭제가 됐겠지.

     

    아셀라도 진범이 토진궁인 건 직감으로 예측했을 테니까.

     

    ‘공작이 목표였다면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있었겠지.’

     

    파티에 참가한 귀족이나 황가의 일족의 타겟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셀라를 암살할 범인은 지금까지는 승계권자로 한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냥은 못 넘어가. 토진궁에 전쟁을 선포하겠어.”

     

    아셀라의 심박수와 혈압이 평소보다 높다.

    동공도 확장된 것이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상태.

     

    나는 아셀라의 등을 슥 쓰다듬었다.

     

    “힉, 뭐 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진정하세요. 이럴 때 하는 호흡법, 전에 알려드렸죠.”

     

    “공자, 필요할 땐 분노도 표출해야 해.”

     

    “적 앞에서 하세요. 지금 주변에는 아군만 있잖습니까.”

     

    “아군….”

     

    아셀라는 내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천천히 숨을 되돌렸다.

     

    “스트레칭도 하시고요. 고개 위로 드세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멋대로 만지지 마.”

     

    아침에는 날 껴안고 있지 않았나?

     

    아셀라의 거리감은 희한하다.

     

    “필요하시면 애착인형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저기 놓여있네요.”

     

    “응? 아.”

     

    내가 침대 옆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있는 인형을 가리키자 아셀라가 당황하며 입술을 훑었다.

     

    “어… 공자, 저거는 그게.”

     

    아셀라는 어째서인지 내 눈치를 보며 뒷목을 긁적이며 웅얼거렸다.

     

    “인형… 이긴 한데. 그… 내가 세탁했다고 얘기했었잖아? 거짓말은 아니고….”

     

    “세탁이 금방 끝났나 보네요.”

     

    “아, 맞아. 그랬어. …왜 저기 있어!”

     

    스트레칭을 하라고 했건만, 아셀라는 목을 움츠리며 혀를 찼다.

     

     

    잠시 후에 아셀라는 기세를 누그러뜨렸지만 여전히 분함은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전쟁은 전쟁이야. 토진궁과 무력충돌을 준비해.”

     

    “아직 진정이 덜 되셨군요. 황녀님이시라면 더 냉정하게 판단하실 수 있으십니다.”

     

    “내 명령을 거부하는 거니? 선공을 당하고도 참을 순 없어.”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면전에 들어간다고 저희가 토진궁을 이길 수 있을까요. 당장 2연대 전력만 끌고와도 압살당하겠지요.”

     

    “…옳은 의견이야.”

     

    아셀라도 계산을 못 할 리는 없으니 내게 반박할 순 없었다.

     

    “애초에 이만한 사안이니 남작을 처형해 종결하겠다는 판단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게 아닌지요?”

     

    “공자는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구나. 그 말 대로야. 폐하도 황실 내 파벌 싸움이라고 알고 계시겠지.”

     

    “그래요? 그런데 처벌이 없어요?”

     

    “승계권자끼리 경쟁은 상식이니까. 암살 정도 암투는 얼마든지 벌이라는 태도셔.”

     

    상식이구나.

     

    황실의 상식은 황제가 정하겠지.

    이래서야 외관에 금만 칠해놓은 사자굴이 따로 없다.

     

    그래서 아셀라나 다른 승계권자도 궁과 파벌을 키우는 데 그렇게 열심인 거구나.

     

    하긴 황궁엔 현 황제의 형제자매도 있지만 그의 형은 없다.

     

    황제가 장남은 아니었으니 승계 과정에서 숙청해온 역사가 있겠지.

     

    그걸 자식들에게도 반복시키고 있는 거고.

     

    “폐하 입장에서는 황실 싸움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는 게 안 좋겠군요. 휘말린 서부 공작이 황실에 배상을 청구하게 되니까요.”

     

    “그렇네. 공작이 표적인 쪽이 편하니 남작이 범인이라는 대안을 받아들이셨구나.”

     

    “예. 더더욱 행동을 자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희가 들이받아봐야 황가 어느 파벌에게도 이상한 취급을 받을 뿐이겠지요. 명분이 없잖아요?”

     

    “그럼 이대로 꼬리를 말아야 할까?”

     

    아셀라는 심각했다.

    사룡에 이어 이 건이 유야무야 넘어가면 앞으로도 계속 공격이 들어오겠지.

     

    배드엔딩이 유발되는 건 물론이고, 월광궁 파벌도 힘을 잃는다.

     

    게오르크는 이참에 눈앞에서 치워야겠다.

     

    “황녀님 말씀대로 보복은 해야겠지요. 다만, 전력 차를 역전할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대답했다.

     

    “결투 재판을 신청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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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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