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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3

   약혼? 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에 놀란 아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그의 옆에 둥둥 떠다니는 솔라딘의 조각은 그 당혹에 태연히 답했다.

   

   – 피로 연결되는 것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는 격언을 모르느냐?

   

   그 베네딕 알른이라는 괴물을 제하고서도 현재 알른 가문이 지닌 저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피의 연결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 감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어투를 들은 아서는 당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1왕비님께서는 오롯이 나라를 생각하시는 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귀를 기울일 리 없다.

   

   어제 그 녀석이 요정과 함께 춤추던 모습이 떠올라 추태를 부려버렸군.

   

   “알른 가문과의 연결을 두텁게 하기 위함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허나 베네딕 경께서 따님의 약혼을 달갑게 받아들일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지난번 겨울 방학 때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받을 당시 아서는 베네딕 알른에게서 여러 가지 형태로 협박을 받았다.

   

   우리 딸 아이를 건드리는 순간 아주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리라는 그의 말은 베네딕 알른이란 인간의 위세와 합쳐져 공포로 바뀌었다.

   

   그저 친하게 지냈을 뿐이었는데도 그만한 경계를 샀는데 약혼?

   

   그 날 아서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예. 그렇겠죠. 알른 백의 딸사랑은 각별하니까요. 상당한 반발이 예상됩니다만 그 뿐입니다.”

   

   그 뿐이라고? 요정의 숲에서 어둠의 악신과 싸울 당시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폭음을 울리던 베네딕을 기억하는 아서는 도저히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선 베네딕 경은 분명한 충신입니다. 막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무리한 역할을 수도 없이 부여받았음에도 단 한 번도 반역의 태도를 드러낸 적 없는 기사죠.”

   

   베네딕 알른이라는 남자가 왕국의 모든 이들이게 존중받는 이유이며, 과거 루시 알른이 수많은 패악질을 저질렀음에도 알른 가문에 대한 평가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사유고, 극악한 훈련에 대해 알면서도 수많은 기사들이 알른 가문에 속하길 바라는 까닭이다.

   

   베네딕 알른은 기사도란 단어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동경의 존재인 것이다.

   

   “사나운 생김새와는 달리 머리도 좋은 분입니다. 얼마간 항의는 하겠지만 그 이상을 시도하실 린 없습니다.”

   

   그럴 것이다. 알른 백께선 부인 분이 타계하신 이후로 정치적인 감각을 상당히 기르셨으니까. 불평은 해도 자신의 감정을 나라와 왕가의 관계까지 끌고 갈 가능성은 적다.

   

   “또한 3왕자님께 적의를 품을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만 이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알른 영애께서 아끼는 친구인 당신께 알른 백이 해꼬지를 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루시 알른에게 직접적으로 혐오 당할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을 경이다.

   

   나를 해할 경우 루시 알른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훤한데 그런 잘못을 저지를 리는 없다. 기껏 해봐야 악의를 잔뜩 담아 나를 굴리는 정도겠지.

   그것만 해도 끔찍하긴 하다만.

   

   “그러니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전 기꺼이 약혼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3왕자님께서 말씀하셨듯 알른 가문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왕국에 필요한 존재가 될 테니까요.”

   – 거 참 배려심이 넘치시는군. 가문의 뒷배도 없는 3왕자의 의사를 묻다니 말야.

   

   솔라딘의 조각이 한 말이 옳다.

   

   1왕비님께서는 내게 제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만한 권력의 차이가 저 분과 나 사이엔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분이 내 의사를 물은 까닭은 나에 대한 배려겠지.

   

   – 객관적으로 봤을 때 거절할 이유는 없다. 타국에 볼모취급을 당하며 팔려나가는 것보다 낫단 정도가 아니다. 여기저기 치여다니던 3왕자에서 모두가 전전긍긍하는 가문의 주인이 될 기회는 상식적으로 놓쳐선 안 돼.

   ‘그쯤은 나도 안다. 그 정도 손익계산을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정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봤을 때 1왕비님께서 건넨 제안을 거절하는 건 너무도 멍청한 일이다.

   

   어디를 보더라도 이득밖에 없지 않나.

   

   아.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면 루시 알른이란 건방진 꼬맹이와 함께 지내는 걸 끔찍하게 여겼을지 모르겠다만 내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약혼이 성립되건 말건 난 계속 그 녀석의 장난감 노릇을 해야 할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갤 끄덕이지 못하는 까닭은 그 녀석이 이를 바라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3왕자님?”

   

   아서가 오랫 동안 고민하는 것이 의뭉스러웠던 듯 1왕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제안은 말이죠. 당신의 공적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답니다? 그도 그럴 게 3왕자님께선 알른 영애께 호감을 품고 계시잖아요?”

   

   해가 떨어지면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단 듯 새어나온 말에 아서의 어깨가 굳는다.

   

   “당신께선 그저 피해자의 입장에 계시면 돼요. 성격 나쁘고 독선적인 1왕비가 이 일을 추진했다 그러면 누가 당신을 욕하겠어요?”

   

   그녀가 꺼내는 말은 분명 배려다. 오랫동안 골칫거리로 남았던 요정의 숲을 구원하는 데 공헌한 아서를 향한 존중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서는 차마 웃지 못했다.

   

   “당신은 그저.”

   “거절하겠습니다.”

   

   설마 이 혼담을 거절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걸까. 1왕비의 말이 순간 끊어졌다.

   

   “…왜죠?”

   “그 빌어먹을 녀석과 잠시만 있어도 속이 타오르는 데 평생을 함께 보내라고요? 죄송하지만 전 되도록 가늘고 길게 살고 싶습니다. 울화에 받쳐 살다 단명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다. 정말 루시의 언행이 못 버틸 정도였다면 그가 그녀의 친구로 남아있을 리 없잖은가.

   

   아서가 방금 전 꺼낸 말에서 진심은 하나였다.

   

   이딴 식으로 혼담을 진행하고 싶지 않단 것.

   

   “흐음.”

   

   그의 속내를 짐작한 것일까. 눈을 가늘게 뜬 1왕비는 입가에 새겨진 미소를 진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바꾸죠. 국왕의 대행권자인 1왕비의 명령입니다. 약혼을 받아들이세요.”

   “거절하겠습니다.”

   “나라의 명에 반기를 드는 건가요?”

   “그럴리가요. 여기서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될 터인데 무슨 문제겠습니까.”

   “재밌는 의견이네요. 계속 말해주세요.”

   “1왕비님께서는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저를 호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하여 암부를 이용할 수도 없죠. 왜냐면 전 당신께서 그리 신경 쓰고 계시는 루시 알른의 친우니까요.”

   

   루시 알른은 무척이나 오지랖이 심한 인물이다.

   

   친구가 곤경에 빠졌다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친우의 옆에 설 것이다.

   

   그게 자신과 관련된 일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럼 어찌 되는가. 같은 편으로 포섭하려 했던 루시 알른이 어느새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암부를 이용했을 경우에는 상황이 더 악화 된다. 그만한 명분을 만들어주면 루시 알른 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 지인, 그리고 그 지인이 속한 가문까지도 목소리를 내게 될 테니까.

   

   “괜한 짓을 해서 왕가의 권위를 낮출 바에야 없던 일로 만드는 편이 낫죠.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하네요. 지금의 3왕자님은 섣부르게 건드리긴 무서운 사람이죠.”

   

   과거 은근한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아서와 지금의 아서는 다르다. 그에게 피로 이루어진 뒷배는 없을 지언정 인연으로 이루어진 뒷배는 얼마건 존재한다.

   

   “좋아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바꾸죠. 협상이에요. 당신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일을 알려드릴 테니.”

   “그것이 어머님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필요치 않습니다. 전 이미 악몽에서 빠져나왔으니까요.”

   

   완전히 악몽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분명 그의 마음 속에는 희미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괜찮다. 그는 더 이상 악몽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니까.

   

   “이 이상 할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후. 후후훟. 흐하하핳.”

   

   갑작스레 흘러나온 1왕비의 웃음소리에 아서가 입을 다문다.

   

   1왕비도 이 상황을 바란 건 아닌 듯 손등으로 입을 막아가며 웃음을 참아보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쉬이 사그라 들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식은땀을 흘리던 아서는 간신히 1왕비가 웃음을 그친 것을 조심스레 바라봤다.

   

   “좋아요.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감사합.”

   “아. 참. 왕자의 성인식 예법에 대해선 기억하고 계시죠?”

   “…왕궁의 예법은 모두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답니다.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 심술궂은 말에 어울려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천막 바깥으로 나온 아서는 입을 다문 채 한참을 걷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고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 전에 한 행동을 후회하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빌빌 거리고 있었을 거다.

   

   허나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도대체 그 웃음은 뭐지?”

   – 상당히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이었다만.

   “그래서 더 모르겠다. 난 단 한 번도 1왕비님께서 저런 체통 없는 웃음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없어.”

   

   대체 왜 그런 웃음이 나왔는지 짐작조차 되질 않는다.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던데 내 무례가 1왕비님의 이성을 날려버린 걸까.

   

   –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1왕비도 인정하지 않았느냐. 넌 건드리기 껄끄러운 사람이 됐다고.

   “내일 증발해버릴 걸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지. 다만 의아한 것은 그 분이 성인식의 의례를 물어본 것이다.”

   

   아무런 문맥도 없이 튀어나온 물음에는 무언가 뜻이 있겠지만 아서는 도저히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 성인식의 의례란 게 무엇이냐?

   “나도 모른다.”

   – …안다면서?

   “눈으로 본 게 있으니 대략적으론 알지. 그렇지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진 않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만해도 아서는 모든 예법을 완벽히 암기하고 있었다.

   

   다만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는, 정확하겐 루시 알른에게 가르침을 부탁한 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생각해보라. 당장 하루하루 죽을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가며 수련에 몰두함과 동시에 새로운 배움에 충실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까짓 예법 같은 걸 어찌 머리에 남겨 두겠는가.

   

   – 참 답답하군.

   “당장 알아봐 줄 테니 한숨 좀 적당히 쉬어라.”

   

   짜증에 짜증으로 대답을 하고서 몸을 일으킨 그는 루시 알른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마주하고서 기겁하며 뒤로 넘어졌다.

   

   “쿠후훟. 언제나처럼 한심하고 무능한 왕자님이시네요. 이런 부분에서도 한결같으신 게 정말 우둔하셔요.”

   

   여느 때라면 루시에게 무어라고 할 아서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구원해 준 그녀가 떠오르고, 어제의 그녀가 생각나고, 방금 전 나누고 온 대화가 자꾸만 귓가에 울려서 붉어진 얼굴을 감추는 게 한계였다.

   

   “어라아? 왜 그러시나요? 설마 일어날 수가 없게 된 건가요? 정말 짐승 같은…”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네에~ 네에~ 제가 너무 귀여운 게 잘못이니까요~ 이번은 넘어가 드릴께요~”

   – 맞아! 루시는 귀여워!

   – 근데 귀여운 게 왜 잘못이야?

   – 몰라! 그치만 루시가 잘못이라니까 잘못인가봐!

   

   루시와 함께 어둠의 악신을 도발하던 요정들이 그녀의 옆에 달라붙은 건가.

   

   …실로 끔찍하군. 난 이제 저 녀석들에게도 장난감 취급을 당해야 하나.

   

   하아. 이 녀석 때문에 1왕비님과 척을 지고 왔거늘 이리 비웃음당해야 하는 게 슬프다만. 뭐어. 속 편히 화를 낼 수 있는 건 마음에 드는 군.

   

   “맞다. 용무가 있었는데 무능왕자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 잠시 잊고 있었어요.”

   “뭐지?”

   “동정찐따님이 불러요. 뭐라더라? 무능왕자님한테 달라붙은 곰팡이한테 해줄 게 있다던데요.”

   

   *

   

   아서가 돌아가고 텅 빈 천막. 싱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몇 가지 서류를 처리하던 1왕비는 깃펜을 내려놓고서 바깥에 있는 이를 불러들였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 1왕비님. 무엇이든 본부해 주십시오.”

   “1왕자님을 이 곳으로 모셔 와 주시겠어요? 그 분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생겨서요.”

   “긴급한 사안입니까?”

   “네. 3왕자님께서 못 한 일을 그 분이 해주셔야 하는지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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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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