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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5

   예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말이다.

   

   직접적인 살의는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날 죽이고자 한다는 마음을 알기에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대비할 수 있다.

   

   허나 상황과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나 버린 상대의 행동은 그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추측할 수 없기에 두렵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과거의 나는 그것이 헛소리라 생각했고,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크게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난 그 말이 옳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왜 그렇게 두려워 하시나요. 나의 아기 고양이.’ 같은 대사를 쳐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듯 상큼한 미소와 함께 날 바라보는 1왕자는 어제 마주했던 어둠의 악신보다도 더 두려웠다.

   

   “알른 영애?”

   

   의아한 말과 함께 내밀어지는 손에 닿고 싶지 않아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메이스로 1왕자의 머리를 후려쳐서 그를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싶었지만 무기를 꺼내들기엔 주변 상황이 흉흉했다.

   

   <루시야.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해보겠느냐?>

   ‘제가 입을 열면 상황이 악화 되지 않나요?’

   <걱정마라. 이 곳에서 널 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저 놈의 자존감을 박살내면 돼.>

   ‘…아니. 그러면 안 되죠?’

   

   평소 같았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 했을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물론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업보 스택을 여기서 더 쌓고 싶지 않다고!

   

   “형님. 지금 루시 알른은 아직 전투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대화를 나누실 거라면 후일을 도모하시는 게 어떤지.”

   

   좋았어! 아서! 그대로 쫓아내버려! 평소에는 내가 탱커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엔 네가 어그로를 끄는 거야!

   

   “흐음.”

   

   뒤 편에서 아서를 응원하던 나는 1왕자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봤다.

   

   아서를 바라보는 1왕자의 시선은 분명 평소와 달랐다.

   

   평상시의 1왕자는 다른 이들과 달리 아서를 제대로 된 동생으로 치부해줬다.

   

   자신의 세력이 그를 비난하고 비방하며 왕궁에서 지워버리려는 그 순간에도 1왕자만큼은 그를 존중했다.

   

   허나 지금은 반대였다.

   

   1왕자의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은 아서에 행동에 정중히 대응했고, 되래 1왕자가 아서를 날 선 눈으로 바라봤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적의로 동생을 노려봤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다 1왕자가 한 순간에 표정을 바꿨다. 동생을 대하는 태도로 돌아온 게 아니라, 1왕비의 앞에 설 때처럼 공손한 얼굴로.

   

   “3왕자님의 고견에 감사합니다. 확실히 지금 알른 영애께 대화를 청하는 건 무척 무례한 행동이겠군요.”

   “…형님?”

   

   나조차도 느낀 변화를 아서가 못 느낄 리 없다.

   

   자신이 의지하던 형의 변모에 아서가 온 몸으로 당혹스런 티를 냈지만 1왕자는 거기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례한 행동을 실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알른 영애. 후일 공식적인 경로로 약속을 한 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그 때까지 건강하시길.”

   

   저 할 말만을 내뱉고서 1왕자가 떠나간 후 아서는 한참 동안이나 1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자신의 옛작품을 개조하는 데 정신이 팔린 에르기누스를 내버려 둔 채 숲으로 돌아온 요정여왕은 입구 인근에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기도에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여자아이는 요정여왕이 바로 옆에 다가왔음에도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흐으응.”

   

   그 경건함이 요정여왕의 장난기를 샘솟게 만들었다. 예전의 요정여왕은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다른 요정들의 장난기를 수습해야 하는 사람이 그녀였기에 여왕은 반드시 어른이여야만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게 된 사실이다만, 어쨌건 요정여왕도 요정이다.

   

   순수함의 미명 아래에서 자제라는 단어를 지하로 처박아버린 요정들을 이끄느라 꾹 누르고 있었을 뿐 요정여왕에겐 다른 요정들만큼의 장난기가 존재했다.

   

   성녀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생각한 것입니다만 이 분에겐 여자아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아요.

   

   그도 그럴 게 이런 발칙한 몸을 지닌 여자아이는 세상에 없잖아요?

   

   묘하게 요염한 여우님도 위협적이었지만 이 분도 분명한 경쟁자에요.

   

   따지고 보면 여우님보다 더 위협적이죠.

   

   여우님은 외견과는 달리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진 분이지만 성녀님은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새하얀 사람인걸요.

   

   예전에 순수하고자 노력하던 제가 되고 싶었을 만큼 새하얗고 고결한 분. 그렇기에 자그마한 어둠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불쌍한 이.

   

   아직은 성인이 되질 않아 에르기누스님의 관심에 들지 못한 것 같지만 나이가 차고 나면 성녀님은 분명한 경쟁자에요! 미리 기선을 제압해둬야 합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핑곗거리를 만들어낸 요정여왕은 슬그머니 페이비의 뒤 편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히약!?”

   “히약인가요? 무척 귀여운 비명이시네요. 소녀같아서 너무 질투가 나요.”

   “요. 요정여왕님?”

   “네에. 요정여왕이랍니다. 어떤 분께는 낡다 못해 썩어서 괴상한 냄새가 난단 소리를 듣는 여자랍니다?”

   “녜!? 아뇨! 그건. 그. 알른 영애님께서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영애님께서도 사실은 요정여왕님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계실 거에요!”

   “저엉말요?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입니다! 알른 영애님께선 무척이나 선하고 고결하신 분인걸요! 저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어둠의 신격을 어느 정도 나눠 받았기 때문일까. 요정여왕은 페이비가 내뱉은 말에 자그마한 거짓도 없단 걸 알게 됐다.

   

   영웅분께서 주신의 간택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그렇다고 성녀님보다 선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대단한 거지만.

   

   “…요. 요정여왕님?”

   “네에. 왜 그러시나요?”

   “그. 손 좀 놔 주시면 안 될까요?”

   “꼭 그래야 하나요? 보들보들해서 기분이 좋은데 이대로 있으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죠! 이. 이건 불경한 일입니다!”

   

   귀까지 시뻘겋게 물든 페이비의 뒷모습에 만족한 요정여왕은 일부러 아쉬운 티를 내면서 훌쩍 뒤로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장난을 치고 싶지만 성녀님께서도 우리의 은인이란 사실은 분명하니 선을 지켜야지.

   

   “그래서 성녀님께선 여기에 어쩐 일로 오셨나요? 에르기누스님을 뵈러 오신 거라면 화를 낼 건데.”

   “전 그 분께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안 드네요. 에르기누스님이 뭐 어때서요! 좀 남자답지 못한 구석은 있어도 위대한 대마법사이자 영웅이라고요!?”

   “…죄송합니다만 계속 장난을 치시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는데요.”

   “이런. 미안해요. 아줌마라고 불려서 그런가 주책이 늘어서.”

   

   요정여왕이 오호홋하며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는 웃음을 짓자 페이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제가 요정여왕님을 찾아뵙고자 한 이유는 저희 주신 교회가 미리 왕국과 협상해 둔 내용 때문입니다. 주신 교회는 이번 일에 종교의 독점을 대가로 받으려 했습니다. 다만 이번에 에르기누스님께서 신격을 획득하시며 이것이 애매해졌죠.”

   “요정의 숲이 신격의 성지가 되어버린 셈이라서 그런가요.”

   

   에르기누스가 기적이라 불러 마땅한 위업을 벌이며 신격을 얻은 요정의 숲은 오늘부로 어둠의 신의 성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둠에 대치되는 주신의 교회가 인근에 들어선다는 건 에르기누스라는 신격에 대한 시비나 마찬가지다.

   

   “그거라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르기누스님께선 어둠의 신격을 얻으셨지만 그와 동시에 주신의 신자이기도 하시니. 숲 안만 아니라면 괜찮을 겁니다.”

   

   추후 에르기누스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다시금 말을 해주겠다고 말하자 페이비가 깊게 고개숙이며 감사를 전한다.

   

   “용무는 이걸로 끝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다른 건 필요 없나요? 당신께선 요정의 숲을 구원한 은인이기도 하니 바라시는 게 있다면 기꺼이.”

   “제가 한 일이 무어가 있습니까. 전 그저 알른 영애님의 빛을 따라가느라 급급했을 뿐인걸요.”

   

   페이비의 말을 들은 요정여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가볍던 그녀가 여왕다운 위엄을 되찾는다.

   

   “미약하나마 어둠의 신격을 지닌 이로써 조언하겠습니다. 성녀님. 세상에 하얗기만 한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크고 작은 어둠을 지니는 게 당연합니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왜.”

   “그건 영웅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왕의 말을 들은 페이비는 고갤 갸웃거리면서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의 힘이 미약해진 시대에 주신의 따스함을 품은 당신이라면 알 거에요. 위대한 주신이 전지하고도 전능한 선이 아니란 걸.”

   “대지의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의 무능함에 슬퍼하고 절망하면서도 결코 선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그 분은 여전히 저의 신입니다.”

   “영웅님도 마찬가지랍니다. 그 분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초인이 아닙니다. 망설이고 방황하고 실수하고 절망하는 평범한 인간이죠. 그럼에도 다시금 일어서서 빛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분이기도 하고요.”

   “저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저보다도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쵸? 그러니까 친구로 봐주세요. 당신이 모셔야 할 또 다른 신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린 페이비의 모습에 요정여왕이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계속 영웅님을 신처럼 모시다간 언젠가 진절머리를 내실 걸요?”

   “…네? 네!? 그게.”

   “어머나.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여기로 오고 계시네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루시의 모습에 허둥지둥거리는 페이비를 자신의 뒤에 숨겨 준 요정여왕은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낼 것 같은 얼굴을 한 루시를 보고 고갤 갸웃했다.

   

   “요정분들. 무슨 일이 있었나요?”

   – 여왕님!

   – 그게 있잖아요!

   – 그게…

   

   루시의 곁에 있던 요정들의 이야기를 들은 여왕은 양 입꼬리를 올렸다.

   

   “영웅님의 혼담인가요. 무척이나 놀릴 맛이… 아니.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네요.”

   “혼담이요!?”

   

   뒤 편에서 들려 온 페이비의 외침에 여왕이 고갤 끄덕인다.

   

   “네에. 상대는 왕국의 1왕자님인 모양이네요.”

   

   1왕비님께서도 무척 조급하신가보네요.

   

   우후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조금 장난을 쳐 볼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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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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