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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6

   분명 나를 싫어하던 1왕자가 갑자기 따뜻한 남자가 된 이유를 알게 된 건 그놈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마 1왕비님께서 시킨 걸거다. 저런 식으로 네 마음을 얻으라고 했겠지. 분명하다. 나한테도 너와의 혼담을 제안했었거든.”

   

   혼담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기겁을 하면서 멀찍이 떨어졌다.

   

   뭐? 결혼!? 내가 꼬추새끼랑?! 미쳤나! 저어어얼대 무리야! 차라리 혀 깨물고서 뒈지고 말지 그런 이야기는 안 받아!

   

   “오해할까봐 말한다면 그 제안은 거절했다. 너 같은 꼬맹이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아아. 무능왕자님께서도 동정찐따님이랑 비슷한 부류인가요? 비슷하긴 하네요. 동정에 찐따에 무능한 것까지. 이 쪽이 더 재능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저 쪽이 비아냥대기에 똑같이 받아쳐줬더니 아서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얘 왜 저래? 평소 같았으면 버럭대면서 짜증을 낼 타이밍인데.

   

   ‘아.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가 중간에 화 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어요?’

   <…주책이었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뭐. 그렇다. 저딴 놈팽이한테 널 내어줄 순 없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화내지 않으셔도 베네딕이 먼저 거절을 할 걸요. 방금 전에 할아버지가 했던 거랑 비슷한 대사를 치면서.

   

   ‘근데 용케도 1왕자가 혼담을 수락했네요. 그 인간 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개인의 호불호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귀족 간의 결혼에서 서로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귀족 간의 결혼에서 중시되는 건 정치적인 의도라고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이들을 오롯이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대우받지만 그 대가로 포기해야 하는 것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사정을 알고 나니 1왕자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며 내게 다가온 것이 이해가 됐다. 1왕비에게 의존적인 그라면 자신의 마음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네가 의아해해야 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루시. 너는 알른 가문에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다. 그러니 네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는 건 불가능해. 네가 없으면 알른의 핏줄이 사라지니까.>

   ‘어. 그럼 저 쪽에서 와야 하는 건가요?’

   <그래. 1왕자가 이미 맡아둔 것이나 다름없는 왕위를 포기하고서 알른에 와야 한단 말이다. 아무리 1왕비의 명이라 하더라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건 이상해.>

   ‘아뇨. 1왕자라면 크게 이상하진 않아요.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말이 안 될 일은 아니에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이 지녀야 할 걸 빼앗길 때 반항을 한다. 빼앗기는 것이 크다면 반항의 밀도 또한 더 커지는 게 정상이지.

   

   조금 바꾸어서 이야길 하자면 반항이란 걸 익힐 수 없을 만큼 처참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라면 빼앗기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을 거란 이야기고.

   

   할아버지는 나의 말이 의아한 듯 했지만 굳이 따져 묻진 않았다.

   

   <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가 바라지 않는 한 이 혼담이 성사될 가능성은 없으니.>

   ‘베네딕 때문인가요?’

   <그래. 네 아비가 혼담을 거부하면 누가 그걸 강제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죽을지언정 자식의 불행을 눈 뜨고 볼 자가 아니다. 그러니 혼담은 결코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겠지. 최소한 네가 마음을 돌릴 때까지는.>

   

   그래서 1왕자가 그렇게 역겨운 웃음을 지은 건가.

   

   다른 영애들한테 장난질을 칠 때처럼 나도 꼬셔보려고 한 거냐!

   

   으에엑.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도 날 꼬시려 들 거라는 소리잖아.

   

   전생에는 여자한테 한 번이라도 작업을 걸려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설마 그게 반대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하다. 욕망에 충실한 얼빠여우나 변태사도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겨워.

   

   <이에 대한 제일 온화한 해결 방식은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거다. 적당히 좀 하란 여론이 생기면 저 쪽도 포기할 수밖에 없거든.>

   ‘그 때까지 1왕자가 작업질을 하는 걸 보고 있으라고요!?’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만 다들 좀 과격한 쪽인데 괜찮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기다려보란 말이 튀어나왔다.

   

   흥미진진해하는 어투가 엄청나게 불안해.

   

   정치력을 끝까지 찍은 할아버지의 조언이니 분명 결과는 좋겠지만 그 사이의 있을 일이 엄청 파란만장할 것 같다고!

   

   <단언컨대 네게 해가 될 일은 없다.>

   ‘저한테만 해가 안 된다는 소리잖아요.’

   <그게 무슨 문제냐. 주제도 모르고 다가온 게 잘못이지.>

   

   묘하게 신경질이 나 있는 어투에 웃음을 흘린 난 다시금 고갤 내저었다.

   

   ‘괜찮아요.’

   

   내가 1왕자라는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모니터 바깥에서 바라봤을 적에는 쓰잘데기 없이 대사가 많아서 스피드런에 방해되는 놈 취급이었고, 그의 과거를 안 채 모니터 안에서 마주하게 된 지금도 난 그를 머뜩찮게 생각한다.

   

   그의 불우한 과거를 동정하지만 딱 그 정도. 페이비나 조이처럼 반드시 구해야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내 주변사람들처럼 지켜야 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허나 기이하게도 나는 1왕자에게 모질 수 없었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근질거림이 날 가로막았다.

   

   아마 이 마음은 내가 아닌 루시의 것이겠지.

   

   과거에 루시와 1왕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려나.

   

   ‘진짜 나중에 답이 없어지면 그 때 들을게요.’

   

   그러니 할아버지의 제안을 듣는 건 뒤로 미루자. 용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그 섬에 들려야 할 테니까. 그 곳에서 루시의 과거를 마주한 후에라도 늦진 않을 거야.

   

   *

   

   마음의 정리를 어느 정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어찌할 순 없었다.

   

   호감은커녕 혐오밖에 없는 남자 새끼가 날 꼬시겠다고 선언하고 간 셈인데 어떻게 표정이 좋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 건 페이비 뿐일 거야.

   

   “주신 교회는 그 혼담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페이비도 목에 핏줄을 세워가면서 화를 내더라.

   

   너무도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라 고갤 갸웃했지만 교회와 순결의 연관성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걱정 마! 페이비! 네가 불안해하는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허접 주신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야!

   

   “그래서 영웅님께선 여기에 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요정여왕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바보검사가 또 멍청한 짓을 해서 찾으러 왔어.”

   “그 분이라면 숲의 중심에서 유덴님과 함께 검을 휘두르고 계십니다만, 멍청한 짓이란 게 뭔가요?”

   “뇌근육꼰대님의 말을 씹었지 뭐야?”

   “…뇌근육꼰대님?”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요정여왕이 고갤 갸웃했다.

   

   음. 으으음. 이거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페이비. 너는 알아들… 아. 너도 전혀 이해 못했구나. 아서 얘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고.

   

   “하아. 됐어. 아무리 말해봐야 너네 같은 개허접들은 못 알아들을 테니까 그냥 따라와.”

   

   요정여왕의 안내를 따라 프레이가 있는 곳 인근에 도착한 순간 섬짓한 느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분명 위기감지의 경고 같은데. 뭐야? 이 안에 뭔가 위험한 게 있다고? 어둠의 병신은 이미 박살난 지 오래인데?

   

   옆에 요정여왕이 있으니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혹시 모른단 생각에 속으로 경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던 그 때 저 안 쪽에서 유덴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조절을 좀 하라고! 내가 없었으면 이미 이 숲이 개판났을 거 아냐!”

   “있으니까 상관없는 거 아냐?”

   “아아악! 안 되겠다. 너 좀 맞자.”

   “대련해주는 거야? 좋아! 재밌겠다!”

   “…대체 왜 겁을 안 먹는 건데에에에!”

   

   한 사람의 숨이 넘어갈 듯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몸을 휘감던 긴장이 자연스레 사그라들었다.

   

   프레이 저 녀석 또 뭘 하고 있는 거야? 저러다가 유덴이 진짜로 빡치면 어떡하려고.

   

   아. 프레이라면 쳐발리면서도 재밌다고 그러겠네. 저 녀석은 보통 미친 녀석이 아니니까.

   

   호기심을 품은 채 수풀 바깥으로 나온 나는 프레이가 휘두르는 검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검은 아주 작은 공간만을 베었다.

   

   스스로 말하고도 이상하다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저 뒤에서 잔뜩 힘을 모아 휘둘러진 검은 넓디 넓은 허공의 극히 일부만을 노렸다.

   

   헌데 기이하게도 자그마해야할 그녀의 검격이 만들어내는 현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어둠을 베어 넘기던 유덴의 검이 그랬던 것처럼 프레이의 검이 하늘을 향해 날아든다.

   

   유덴의 검격과 비교하자면 프레이의 검은 분명 어설프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 격차가 순식간에 좁아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프레이가 지닌 재능은 그러한 것이니까.

   

   “너 또! 내 말이 말 같지 않게…!”

   “루시? 루시다!”

   

   유덴의 성질을 가뿐히 무시한 프레이는 종종걸음으로 내 곁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검이 어땠느냐고 대단했냐고 물었다.

   

   그래서 양 볼을 붙잡으면서 허접들한테는 통할 것 같다 이야기해줬더니 프레이가 히히 웃었다.

   

   “뭐 하러 왔어? 대련하러 왔어? 대련 하자! 나 이번에는 루시 방패를 넘을 수 있을 거 같아!”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냐. 뇌가 텅텅 빈 바보바보야.”

   “응? 그럼 왜 온 거야?”

   “너 뇌근육꼰대가 보낸 말 왜 무시했어.”

   “뇌근육꼰대? 아! 그. 무어쩌구 신? 검 휘두르는 거 방해하길래 옆에 치워버렸는데.”

   “무예의 신!?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무인에게만 닿는다는 그 분의 목소리가 네게 닿은 것이냐?!”

   

   프레이의 무덤덤한 대답에 아서가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무인들의 열망이라 할 수 있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고!?”

   “그럼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어느 정신 나간 녀석이 신의 목소리를 무시한단 말이냐!”

   “루시라면 가끔 무시할 것 같은데.”

   “…아무리 이 녀석이 불경해도 그러진 않을 거다!”

   “그런 나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켄트 영애. 영애님은 고결하신 분이라고요.”

   

   맞아! 가끔 무시하고 싶단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시하진 않는다고!

   

   그랬다가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모르니까! 페이비의 말에 힘입어 속으로 반박을 내뱉은 난 프레이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했다.

   

   “음. 루시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

   

   제대로 무예의 신과 대화를 나누긴 하는 듯 한 쪽 구석으로 가서 고갤 오른쪽으로 갸웃했다 왼쪽으로 갸웃하길 반복하는 프레이를 구경하고 있으려니 요정여왕이 슬그머니 귓속말을 했다.

   

   “저어. 영웅님. 당신이 머뜩찮게 생각하는 혼담에 끼어들어도 괜찮을까요? 저 사랑이야기 엄청 좋아하거든요!”

   “주책맞은 닭장아줌마답긴 한데 그냥 가만 있지? 네가 끼어들어봐야 괴상한 냄새만 풍기고 다닐 것 같은데.”

   “1왕자님에 대한 거라면 걱정마세요! 저한테 에르기누스님이 있단 걸 아시잖아요!”

   

   내가 그걸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냐? 진지한 짜증을 담아 요정여왕을 노려봤더니 그녀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랍니다. 그냥 밑준비만 해 둘게요. 만약의 경우에 재밌을 수 있도록.”

   “아줌마 속내처럼 더러운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

   “물론이에요.”

   

   하지 말라 그런다고 가만있을 느낌은 아니네.

   

   이 아줌마. 수백살을 넘게 먹은 인간이 왜 이리 주책이 심한 거람?

   

   보란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 움직이라 그랬더니 요정여왕이 신이 나서 고갤 주억거렸다.

   

   “영애께서 바라시는대로 혼담이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담?”

   “혼담이라뇨? 그게 무슨.”

   “혼담?”

   

   요정여왕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주변에서 세 쌍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하나는 프레이였다. 무예의 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그녀는 의문을 잔뜩 품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변태사도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모두 떨어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줍기는커녕 당혹으로 물든 눈으로 날 쳐다보기 바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강제로 내 애완동물이 된 얼빠여우는 축 늘어져있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단 것처럼 다급히 내 얼굴에 달라 붙었다.

   

   “안 된다! 누가 됐든 허락하지 않겠다! 루시는 내 것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의 것인 편이 낫다!”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영애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이 공유해야 하는 것! 여신께서 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건넬 수 없습니다!”

   “다른 놈의 손에 들어가는 꼴을 볼 바에야 그 놈의 목을 쳐 날려 버릴 것이다! 누구냐! 누구의 목을 쳐날리면 되느냐!”

    “솔라딘의 1왕자랍니다. 리나님.”

   “고맙습니다! 요정여왕이시여! 내 당장 그 놈을 습격하러 가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리나님! 제가 여태까지 쌓아 둔 솔라딘 왕국 내 인맥을 써서 제가 여론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명분이 만들어진 뒤에 습격을!”

   

   내 얼굴에 달라붙은 얼빠여우를 떼어내서 하늘 저 멀리로 던져버린 후 변태사도의 고간을 걷어차는 걸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네가 아니라 1왕자의 목숨이 위험하겠구나.>

   ‘…그러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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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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