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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7

   과거에 비해 그릇이 커진 탓일까.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드러낸 신성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루 빨리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모니터 바깥에서 있을 적에도 괴악하다고 생각했던 던전들이 널려있는 게 그 섬이야! 만전의 상태로 가더라도 어떻게 될지 확신하기가 어려운 섬에 이 꼴로 갈 수 있겠냐!

   

   <그러니까 좀 제대로 쉬다 가면 되잖으냐. 뭐 그리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잖아요! 급한 일!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 있다고요!’

   <사람 하나 쯤 사라진다 한들 뭐 어떠냐. 운이 안 좋았던 게지.>

   ‘그렇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에요!’

   

   1왕비가 1왕자에게 날 유혹하는 걸 명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 당일. 나는 걷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몸으로 주변이 난리를 치는 걸 가로 막아야 했다.

   

   솔라딘 왕국 내의 사람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간격을 넘어 1왕자를 비방할 것이라 이야기하는 변태사도나.

   

   겉으로 티나지 않게 정신을 망가트리는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는 말을 하는 얼빠여우나.

   

   바란다면 교회에서 직접 입장을 내겠다는 페이비나.

   

   헤롱헤롱한 상태로 만들어 실종시킬 수 있다 말하는 요정여왕이나.

   

   어느 하나 살벌하지 않은 소리가 없는데 그게 농담같지 않아서 진짜 무서웠어.

   

   내가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대로 일을 저지를 기세였다니까?

   

   근데 이건 약과였어. 어쨌든 간에 얘네들은 어찌저찌 제어할 순 있으니까 말야.

   

   ‘루시. 오늘 혹여 1왕자님과 만났느냐?’

   

   침대에 드러누워 자고 싶다 생각하면서 요정의 숲을 빠져나온 날 맞이해준 것은 베네딕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미소가 스며들어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바보 아버님?’

   ‘그 분이 무언가를 했느냐?’

   ‘하. 곰팡이랑 동화된 것 같은 음험 왕자님이 제 근처에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니 다행이다만. 만약. 아주 만약. 그 분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내게 말하거라. 이 파파는 루시를 위해서라면 신마저 적으로 돌릴 테니까.’

   

   내게 그 말을 전하는 베네딕은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레볼루숑!을 당할 걸 걱정하던 내가 레볼루숑!을 하게 될 걸 걱정하게 되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지만 진짜 혁명이 일어나는 건 곤란했다.

   

   내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왜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를 외쳐야 하냐고!

   

   아니 내가 외치는 건 저런 고상한 말은 아니겠지. 그것보다는 ‘푸하핳! 발정나서 여자애 하나 가져 보겠다고 난리 치는 꼴이라니. 너~무 역겨워.’에 가깝지 않을까. 어쩌면 더 심할 수도 있고.

   

   하여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러니까 이걸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해야 하는데 대체 왜 이 체력은 돌아오질 않는 거야아아!

   

   <조급해한다고 무언가 답이 나오더냐? 이런 부상은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네가 일을 해결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폭탄에서 열을 빼야지.>

   

   *

   

   요정의 숲에서 있었던 전투 이후로 베네딕은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그가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질 못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점점 더 곤히 자는 시간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딸의 해맑은 미소가 그의 어깨에 자리 잡았던 한탄을 점차 지워주고 있는 덕이었다.

   

   허나 요정의 숲에서 어둠의 악신을 상대한 후부터는 그의 어깨에 자리한 절망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더 악화되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라진 아내에 대한 것에서 끝나야 할 한탄이 이젠 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이어졌으니까.

   

   지금도 베네딕의 눈 앞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루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날. 요정의 숲에서 루시를 만난 베네딕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마음에 새겨지는 고통이 아무리 커도 루시가 겪은 것보다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과장스레 행동하며 자신의 아픔을 감췄다. 그러지 않으면 악신을 상대하기도 전에 무너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둠의 악신과의 전투가 끝난 후 곤히 잠든 루시를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베네딕은 모든 일이 끝났으니 괜찮아지리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의 마음에 달라붙은 불안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악신의 권능에 당한 것은 아니다. 후일 신의 격에 오른 에르기누스님을 다시 만나 뵈었을 때 확언해주셨으니까.

   

   이 불안은 그저 나의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또 다시 아끼는 사람을 잃을지 모른단 사실에서 비롯된 공포일 뿐이다.

   

   “후우우.”

   

   공식화된 적도 없는 혼담에 베네딕이 과하게 반응한 것도 이런 공포 때문이었다.

   

   딸을 잃게 될 거란 불안에 잠식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찌 침착할 수 있겠는가.

   

   그 때 포셀이 나를 붙잡아줘서 다행이다. 그 녀석이 없었다면 난 1왕비님께 쳐들어가서 핏대를 세웠을 것이야.

   

   “하아.”

   

   어쩌다 루시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된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떼를 쓰고 투정부리는 것밖에 모르던 여자아이였는데 왜 지금은 자신의 고통을 꾹 참으며 다른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는 사람으로 성장한 걸까.

   

   분명 이게 옳은 성장이긴 할 거다. 예전의 루시와 지금의 루시 중 누가 더 나은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지금의 루시라고 답하겠지.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리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하게 식어 있는 루시를 생각할 때면 차라리 과거의 루시가 낫다고 여기게 되어버려.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평생 품 안에 끌어안고 싶단 마음을 품게 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바아보 파파~”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진 루시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베네딕이 몸을 일으키자 우지끈 의자등받이가 부서진다.

   

   기댈 곳을 잃어버린 베네딕이 바닥에 넘어지고, 그 여파로 흔들린 책상 위의 서류가 흩날리고, 얼마 전부터 베네딕과 함께 일하게 된 알른의 방계들이 기미 낀 눈으로 나풀거리는 종이들을 바라본다.

   

   “뭐야? 변태 파파 뭐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라? 이상한 거야? 귀여운 루시는 보면 안 되는 거야?”

   “아. 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루시야! 들어와 보면 안다! 파파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정말? 들어가 본다?”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방 안으로 들어 온 루시는 자신에게로 꽂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가뿐히 무시하고서 베네딕 앞에 도착했다.

   

   쓰러진 채 어색한 웃음을 짓는 베네딕의 모습에 루시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래서 뭐야? 여자야?”

   “그럴 리가 있느냐! 내게 사랑은 오롯이 하나 뿐이다!”

   “흐으응. 그래? 그럼 난 사랑하지 않는단 거네? 실망이야.”

   “그. 그런 게 아니라.”

   “골라. 마마야. 나야?”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잖으냐! 둘 모두 내게 한없이 소중한 사람인데!”

   

   방금 전의 한숨은 어디로 간 건지 딸아이를 상대하느라 쩔쩔매던 베네딕은 이번에는 이 정도로 넘어가주겠단 루시의 말에 안도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찾아온 것이냐.”

   “뭐야. 바보 파파. 나는.”

   “용무가 없어도 찾아와도 상관은 없지만 이번에는 아니잖으냐. 그치?”

   “…치. 재미 없어.”

   “하하. 이거 참 미안하구나.”

   “뭐. 됐어. 나도 이딴 칙칙한 곳에서 시간낭비하긴 싫으니까.”

   “배려해주어서 고맙구나. 그래서 무슨 일이더냐?”

   “독점욕이 너무 강해서 궁상을 떠는 파파가 한심해서 보기가 힘들더라고. 그래서 특.별.히. 날 에스코트 할 기회를 주려고.”

   

   에스코트라는 건 설마.

   

   “왜?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바보 파파는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귀여운 딸 같은 건 안중에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연히 가야지! 우리 루시가 에스코트를 바라는 데 어찌 가만있겠느냐!”

   

   예전이었다면 좀 망설였을 것이다. 알른 가문에 쌓이는 일거리를 처리하기 위해선 베네딕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알른의 방계와 다시금 화해하면서 그 곳의 자식들을 데려올 수 있게 된 덕분에 베네딕에겐 여유가 생겼다.

   

   요정의 숲을 다녀오고서 일을 처리한 걸 보니 꽤 말끔하게 해두었더군.

   

   카리아가 직접 골라 준 이들다웠어.

   

   그러니 잠시 이들에게 일을 맡겨두고 떠난다 한들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어쩌면 오히려 내가 일을 했을 때보다 더 뛰어난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예. 다녀오십시오. 가주님.”

   “편히 즐기다 오십시오.”

   “안됩니다! 가주님! 당신께서 가시면…! 벌써 떠나셨어!?”

   

   루시와 함께한다는 사실에 신이 난 베네딕은 평범한 자들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실무진들만이 남은 방 안에서 집사장은 베네딕이 어질러 놓은 서류를 정리하고 방금 전 목소리를 높이던 이를 보며 웃었다.

   

   “자. 여러분들. 즐겁게 일을 할 시간입니다.”

   

   베네딕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이어진 강행군이 다시금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

   

   만면에 웃음을 새긴 채 데이트의 준비를 끝마친 베네딕은 파트란 가문의 파티에 참여할 때보다도 공을 들여서 자신을 꾸몄다.

   

   이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신경을 쓴 적은 아내가 살아있었을 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절로 새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온 베네딕은 예의 노출이 심한 갑옷을 걸친 루시의 모습에 눈을 끔뻑였다.

   

   “크흡. 바보 파파. 잔뜩 신이 났네? 귀여운 딸이 놀아준다는 게 그렇게 기뻤어?”

   “루. 루시야. 어디를 가길래 그런 갑옷을 걸친 거니?”

   “당연히 싸우러 가는 거지. 그런 곳이 아니라면 트롤 같은 바보파파를 매달고 갈 리가 없잖아?”

   “그…래. 그렇겠지.”

   

   완연한 실망이 깃들며 무너진 베네딕의 위에서 한참 동안 웃음을 흘리던 루시는 슬그머니 베네딕의 아래로 파고 들어와선 베네딕의 콧볼을 꾹 눌렀다.

   

   “이번에 열심히 일해준다면 쓸데 없이 큰 바보 파파의 덩치도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알겠다! 무엇이라도 시켜다오! 이 파파! 목숨을 걸고 우리 루시를 위해 검을 휘두르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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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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