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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9

   옛 영웅 가라드의 성. 선과 악의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 가라드가 평생을 국가에 헌신한 대가로 받은 영지는 그가 지키던 나라가 무너져내린 뒤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지켜지고 있다.

   

   영웅의 이름에 담긴 영광이 무뎌진 시대에도 그의 성이 지켜질 수 있었던 까닭은 가라드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라드의 친우인 에르기누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기병들.

   

   육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지침을 모르고 내달릴 수 있으며,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에 영원을 내달릴 수 있는 자들은 멀고도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영웅의 명을 지켜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강대한 기사와 고결한 성기사, 그리고 숲을 지키는 영이시여.”

   

   잠에 든 동료들을 대신해 침입자를 마주하러 온 기사는 낡아 스러질 듯한 갑옷에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이 곳은 영웅 가라드님께서 훗날의 영웅을 위해 만들어 둔 장소입니다. 그러니 자격을 얻지 못하셨다면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상대가 순순히 돌아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자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정중히 축객령을 내렸다.

   

   아직 주인의 명이 끝나지 않은 이상 기사의 선택지는 그의 유지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이건.”

   

   긴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의 유언을 잊지 않은 기사이기에, 그리고 그가 생전에 어땠는지를 생생히 기억하는 종자이기에, 여자아이가 앞에 내민 순백의 방패를 보고서 기사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티끌조차 침범할 수 없는 순수한 하양은 그의 주인이 지닌 방패였으니까.

   

   “실례했습니다. 후대의 영웅이시여. 당신께서 이 곳에 오신 까닭은 가라드님의 유지를 잇기 위함입니까?”

   

   마차에서 풀쩍 뛰어내린 여자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로브를 벗어 던졌다.

   

   질 나쁜 귀족에게 고용된 창녀나 입을 법한 갑옷은 그 존재만으로 기사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지만 기사는 섣불리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주인의 방패를 지닌 이가 저런 갑옷을 입었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것일 테니.

   

   “그건 루엘님의 메이스군요.”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육신과 그녀의 무구는 도저히 어울린다 말할 수 없는 조합이었지만 기사는 그녀의 자세를 보고 상대가 숙련된 전사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럼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에서 내린 기사는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렸다.

   

   노리는 것은 목.

   

   진심 어린 살의가 담긴 일격.

   

   신화의 시대. 영웅 가라드가 직접 만들어낸 검술을 전수받은 기사는 자신의 검에 단련의 성과가 담겼노라 확신했다.

   

   채앵!

   

   허나 기사의 검은 너무도 간단히 순백의 방패에 가로 막혔다.

   

   검격의 충격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검이 반으로 갈라져 허공을 날고, 훤히 드러난 기사의 몸을 향해 메이스가 날아든다.

   

   직선적인 공격이라 판단한 기사는 메이스를 회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지만.

   

   여자아이가 히죽 웃는 걸 보고서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기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일어날 순… 없나.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분명 상대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 턱 밑에 공격이 닿아있다니.

   

   꼭 요정의 장난에 홀린 것만 같군.

   

   

   이제 이 세상에서 요정을 볼 순 없으니 그럴리는 없.

   

   – 약하네.

   – 아냐! 루시가 강한 거야!

   – 그냥 둘 다 아냐?

   

   허. 허허허. 여자아이의 머리 위에서 재잘거리는 요정들을 본 기사는 깜짝 놀라 머리카락 안으로 숨어드는 요정들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영웅이시여.”

   

   영웅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는 영웅이 해내지 못한 일조차 이루어내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좋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군.

   

   수백년이란 기간 동안 오롯이 주인의 명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던 인형이 눈을 감자 인형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자신의 몸마저도 잃어버린 기사를 보던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기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

   

   요정여왕은 숲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한다는 게 느껴지네. 장난감이 되어 줄 인간들이 자신의 발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인가.

   

   목숨에 위해가 갈 장난은 하지 말라고 명령해뒀지만 이래서야 완벽히 지켜지긴 어렵겼어.

   

   성녀님의 협력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 분과 다른 성직자들이 있다면 누군가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협력을 하겠다 말한 직후에 문제가 생기면 나도 곤란하거든. 아무도 요정의 선택을 못 받는 건 상대의 잘못이지만 피가 흐르는 건 귀책사유가 나한테 오잖아.

   

   그리고 뭣보다, 요정들이 누군가를 죽였다간 영웅님이 진짜 싫어할 것 같은걸.

   

   요정보다도 요정 같은 그 분에게만큼은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아. 에르기누스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소중한 사람이 한 명에서 둘로 늘어난 건가.

   

   즐겁네. 추하게라도 살아있길 잘했어.

   

   숲의 한 가운데에서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수풀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고 눈을 굽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그는 요정여왕이 기다리던 상대였다.

   

   “안녕하세요. 솔라딘 왕국의 1왕자님.”

   “저를 아십니까?”

   “요정들은 수다스러우니까요.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내버려두지 않는답니다.”

   “저는 눈에 띕니까?”

   “아무렴요. 왕국의 유력한 후계자이신데 반짝반짝이죠.”

   

   후계자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르네 솔라딘의 마음 속 어둠이 요동쳤다.

   

   어둠의 신격을 일부나마 나눠 받으면서 얻은 이 능력은 꽤 편리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해주니까.

   

   “마음에 드는 요정은 찾으셨나요?”

   “그 전에 제게 호의를 보이는 분이 없었습니다.”

   

   뭐어. 그렇겠지. 영웅님은 요정들을 구원해 준 분인 걸. 그런 사람을 독점하려 든다면 미움을 살 수밖에.

   

   “무언가 방법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아뇨. 없습니다. 요정들은 순수하고 바보같지만 때때로 완고하거든요.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이에겐 힘을 빌려주지 않아요.”

   “그것이 당신의 명이라도?”

   “네. 저의 명이라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어머. 이렇게 쉽게 포기하시나요? 좀 더 물어보시리라 생각했었는데.”

   “예전이라면 그랬을 겁니다만. 이젠 힘을 지녀도 별 의미가 없는지라.”

   “왜죠?”

   “아시잖습니까. 요정들은 수다스러우니.”

   

   르네 솔라딘의 눈가에는 진득한 체념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요정여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이란 자리에 주어지는 권력은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몇 번이나 그 권력에 몰두한 이를 보았기에 안다. 이름뿐인 자리라도 거머쥐기 위해 그녀를 찾아와 힘을 달라 발악한 이들을 떠나보냈기에 이해하고 있다.

   

   헌데 눈앞의 아이는 너무도 간단히 권력을 포기했다.

   

   아아. 그렇구나. 아이이기 때문이네.

   

   “한 가지 물음에 대답해주신다면 제가 당신께 힘을 빌려드릴 수도 있답니다?”

   “그것 참 관대한 제안이시군요. 물어보실 건 무엇입니까?”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요정여왕의 질문을 듣고서 처음으로 당혹을 드러낸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왕이 되는 것입니다.”

   “오답이네요. 그건 당신의 꿈이 아니에요.”

   “…예?”

   “후일 자신의 답을 찾는다면 그 때 대답하러 와주세요. 이 숲은 언제나 당신을 환영할테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인사를 건넨 요정여왕은 몸을 돌리려다 멈칫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참.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알른 영애께 접근하기 위해 주변인에게 협조를 요청한단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주 큰 일이 날 거랍니다.”

   “큰 일. 입니까.”

   “네. 영애는 당신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고 있거든요.”

   

   정작 본인은 주변 사람들이 유난을 떤다 정도로만 생각하시는 듯 하지만 그 분들 상당히 진심이라.

   

   만약 영웅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결혼 싫다 그러면 나라가 엎어지지 않으려나?

   

   물론 그 전선에는 나도 있을 거야. 영웅님을 울린 괘씸한 녀석들을 용서할 리 없잖아.

   

   “…서 가다니.”

   

   나쁘고 무례한 사람들을 혼내주는 걸 상상하던 여왕은 주먹을 꾹 움켜쥔 르네의 혼잣말을 듣고 고갤 갸웃했다.

   

   “무슨 말씀 하셨나요?”

   “조언에 감사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요정여왕은 넘실거리는 장난기를 꾹 억누르면서 르네를 배웅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

   

   루시가 홀로 가라드님의 성을 나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베네딕은 별 망설임 없이 고갤 끄덕였다.

   

   몇 번이고 자신의 딸이 지닌 특이성을 보았던 그다.

   

   공략이란 부분에서 루시만큼이나 뛰어난 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존재치 않을 터이니. 루시의 약해진 몸을 알면서도 베네딕이 약지 손가락을 건 것은 그런 그녀를 믿기 때문이었다.

   

   “다음입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나 루시는 베네딕의 기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던전에 숙련된 이들조차도 떠올릴 수 없을만큼 신묘한 수를 사용하던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루시는 이상할 정도로 성실하게 기사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줬다.

   

   우회로는 몇 가지나 있다. 상대 측의 기사들이 성실한만큼 저들을 농락할 수단은 차고 넘쳐. 내 눈에도 몇 가지 수가 보일 정도이니 루시에겐 이보다 많은 것이 보일 테지.

   

   심지어 루시는 성에 발을 들이고 나서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마저도 저항하기 어려워하는 힘을 감춘 채 기사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려 나갔다.

   

   꼭 이 성을 지키던 자들에게 경의를 바치는 것처럼.

   

   “저것은 네게 경의를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고급스러운 술이 목에 달라붙는 것처럼 귓가에 달라붙는 목소리를 따라 고갤 돌리자 어느새 인간의 형상을 취한 리나님이 이국의 담배를 문 것이 보였다.

   

   “당신의 딸인 자신은 이만큼이나 강해졌다고.”

   

   리나의 말을 듣고서 다시 루시를 향해 고갤 돌린 베네딕은 그녀가 싸우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루시가 상대하는 기사들은 분명 강했다.

   

   신화 시대의 기사가 만들어낸 시련은 맹자가 아니고서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계속해서 승리를 이어 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더 강했기 때문.

   

   루시는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연전을 감행하고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기사를 상대하고 있다.

   

   “눈치챘다면 뒤에서 가만 지켜보기나 해라.”

   “…리나님. 대체 언제쯤 저는 못난 아비가 아닐 수 있는 걸까요.”

   “글쎄다. 그건 인간의 일이지 않으냐. 나한테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못 해줘.”

   

   평소 괴악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시긴 하지만 그래도 숲의 주인은 숲의 주인이구나.

   

   리나의 지혜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던 베네딕은 그녀가 히죽 웃는 것과 동시에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린 걸 보고 눈을 끔뻑였다.

   

   “흐헤헿. 정말 저 갑옷을 만든 대장장이에겐 감사해야겠어.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도 아름답잖으냐.”

   

   …조금이라도 이 분을 재평가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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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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