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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

        

         “어…… 음… 일단 피는 멈추긴 했는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과 거의 사라진 신음소리.

         극적으로 호전됐다고 봐도 좋을 헬레나의 상태에 기뻐한 것도 잠시,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지는 아무리 살펴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간을 다시 확인해봐도, 서로의 의식이 접촉했던 건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양손으로 세야 할 만큼 산재해 있던 출혈부는 전부 굳은 피, 어느새 내려앉은 딱지가 실혈을 방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총알이 얕게 박힌 허벅지 같은 경우엔,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살이 이물질을 밀어내며 스스로를 치유하느라 바빴으니.  

         

         급한 위기는 넘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지표면으로의 탈출이라는 관문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결과가 좋으니 마냥 괜찮다고 하기엔 치른 대가가 만만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어지럽네….”

         

         후들거리는 다리를 편하게 뻗은 채 뒤로 풀썩 넘어졌다.

         실혈사의 조건은 혈액을 일정양이 아니라 일정비율 잃는 거라고 내가 말했던가? 세상에 코피로 죽은 첫번째 멍청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이저를 올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

         

         “스읍… 쿨럭?! 콜록, 콜록! 으엑!!”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역겨운 탄내에 황급히 도로 닫아버렸지만 어쨌거나.

         

         엄습해오는 어지러움과 두통. 거기에 이런 말하긴 부끄럽지만 극심한 허기로 인한 탈력감까지.

         

         무슨 어비스 다이브보다 심한 부작용도 그렇고, 헬레나의 의식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도 고려하면. 인체에 있는 기계부에 함부로 접속을 시도하는 건 존나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과연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주의하는 게 좋겠다.

         

          – 작전 일시중단…! 강력한 에너지 파동 및 전력차단이 관측되었다. …경찰병력은 퇴각한 징수 부대 대신 지하로 진입해 상황을 확인하도록. –

         

         “……아주 난리가 났네!”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적당한 탈출로를 물색하던 와중, 다급한 명령이 고막을 울렸다.

         그나마 나는 경찰 소속으로 남아있는 상태라 다행이지만, 이제는 정말 고민할 여유도 남지 않았다.

         

         뭔가 지랄맞게 일이 꼬였다는 걸 깨닫고 상대적으로 잃었을 때 손해가 적은 이들로 간을 보려는 모양인데… 아직 유효한 내 신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변수를 만들 가능성은 적었다.

         

         그 이유는 기업의 똘마니 짓거리를 하면서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경찰이 상호간에도 신원을 감추는 건 꼭 사생활 때문만은 아니다.

         

         만약의 경우에. 정말 가능성은 낮지만 지금처럼 집 지키는 개가 더는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간단하게 해당 직원의 식별장치를 꺼버리고 새로운 넘버링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동고동락한 사이라는 인식이 옅어지는 걸 노리고 만들어진 제도이자 규범이다.

         

         강한 척하는 양아치일지언정, 완전한 악인은 되지 못한 자들에게서 동료의식마저 제거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간 일하면서 얼추 낯을 익힌 그들도 적으로 나타난다면 응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일단은 헬레나를 끌고 물러나야 한다.

         

         현재 고를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

         고장 난 기계들이 널린 깊은 곳으로 피신하거나, 혹은 역으로 앤이 작살 내버려서 아무도 내려오지 못하는 3번 엘리베이터 근처로 가거나.

         

         “헬레나? 움직일 수 있…. 아니, 미안!! 진짜 일어나려고 하진 말고! 힘만 좀 어떻게 빼 봐!”

         

         “으극!! …괜찮아, 묘하게 그립고… 따듯한 꿈을 꾼 것 같아서 기운이 좀 났으니까아아…!!”

         

         몸 안에 잔류한 납덩어리들과 잃은 피는 분명 그대로거늘. 이동하자는 내 말 한마디에 악착같이 바닥을 긁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끼기긱! 끼이이익.

         

         양팔 밑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후 뒷걸음질치며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간헐적으로 무게가 가벼워지고 신발 쓸리는 소리가 울리는 걸 보아, 중간중간 헬레나도 지면을 밀어서 내 부담을 덜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쉬운 대로 떠올린 작전은 이거다.

         

         내려오는 게 어차피 경찰들이라면, 진입한 병력들이 좀 뒤섞이길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것.

         박탈당한 헬레나의 식별번호는 마침 확실하게 공석이 된 엔지니어 코드로 바꿔버리면 된다.

         

         물론 이 위장의 문제점은 누군가 통신으로 더블 체크라도 하거나, 엔지니어가 같이 내려오지 않은 걸 아는 DS3 주간근무조와 마주치는 순간 파탄 난다는 거지만. 되던 안 되던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즉각 사살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면 된다.

         

         “그러니까 누가 물어보면 거슬리더라도 망설이지 말고 DS3-CE1이라고 대답하는 거야? 알겠지?”

         

         “조금…… 많이 아이러니하네.”

         

         떨떠름함으로 가득 찬 답을 애써 무시했다.

         나라고 간신히 묻은 민감한 문제를 장난 삼아 끄집어낸 게 아니다.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쓰겠다고 다짐한 것뿐이지.

         

         여지껏 입을 헤 벌린 채로 쓰러진 수염남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도대체 뭐하던 인간인지는 몰라도 헬레나가 끌고 다니던 남자이니 쓸모는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읏차! 어디 불편한 곳은…… 생각해보니 너무 많겠네.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나중에 두고 봐.”

         

         자력으로 움직이는 게 어려운 그녀부터 천천히 눕히고 간병인인 나도 머리맡에 주저앉았다.

         

         일방적으로 간호 받는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헬레나가 불평을 늘어놨으나, 이거 어쩌나? 나는 몰라도 그녀는 하베스트 플래닛에서는 더는 못 지낼 텐데!

         

         “나중이고 뭐고.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파라다이스의 비밀시설에 머리를 들이박은 거야? 새 신분이야… 할아버지랑 내가 노력한다고 치더라도.”

         

         실없는 생각은 머리속에 고이 모셔 두고.

         얼굴이 노출된 데이터는 내가 닥치는 대로 삭제하긴 했어도, 이곳에서는 수배자가 될 게 뻔한 그녀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정확히는, 내가 간섭한 파장이 헬레나의 발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글쎄. 더는 여기 있기 싫어서, 원래는 어디 정착지에라도 숨어살까 했는데.”

         

         “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뭔가를 고민하는 헬레나의 태도에 마른 침을 삼켰다.

         만일 심적인 상처가 너무 커서 은둔자로 살아가겠다 하면, 나는 그녀를 설득할 근거가 없었다.

         

         …당연히 그럴 자격도 없었고.

         

         그저 지나치게 원작과 괴리한 결정만을 내리지 않았기를 빌면서 뒷말을 기다렸지만, 정작 사람 마음에 돌을 던진 당사자는 조마조마하는 나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러더라고? 성인군자 같은 건 세상에 없으니까 내키는 대로 살아 달라고.”

         

         아니, 그거야 기운내라고 응원한 거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 초인이 벌써 은퇴 계획이나 짜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려던 찰나에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더 큰 도시인 네오 헤이븐으로 가서, 누구처럼 용병 일이나 해보려고. …혹시 모르잖아? 쓰러진 팀원을 위해 구급차부터 불러주는 해커라도 만날지?”

         

         “……아?”

         

         과정과 이유에 내가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음에도 운명처럼 헬레나는 그곳을 골랐다.

         네오 헤이븐, 에메랄드 시티. 모든 흐름이 모여들고 예견된 암투가 시작되는 장소. 더군다나 흥미를 가진 직업조차 하필 용병이라니.

         

         그간의 내 노력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고민과 헛다리짚기의 최후가 원작 그대로라면 꽤 허망했겠으나. 왠지 그녀의 말투에 서린 밝은 분위기는 설명하긴 힘든 뿌듯함과 어렴풋한 불빛을 가져다주었다.

         

         “어이, 거기! DS3조 엔지니어 둘! 관제실 지박령들이 여기 왜 있나?”

         

         “?!”

         

         아무래도 불빛은 우리를 발견한 경찰들의 조명이었나 보다.

         

         이쪽을 찌를 기세로 내밀어진 총구가 거두어지고 일단의 무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온다.

         

         그 소속은 DS2, 2번 게이트 근무조. 오다가다 공용구역에서 몇 번 스치긴 했어도 친근하게 잡담을 나눌 관계는 아니다.

         차라리 잘 됐다. 간결하게 용건만 교환하는 쪽이 거짓말을 들키기도 어렵겠지.               

         

         “아직 살아 있습니다만, 침입자와 먼저 조우한 탓에 부상을 입은 터라…. 그래도 여기 인질은 확보했습니다!”

         

         “뭐? …정말이군. 지휘부! 생사를 알 수 없다던 연구인력을 발견했다. 수염 형태를 묘사하라니 그게 뭔 씹 개떡같은! …아니, 대강 일치하는 것 같다. 데리고 돌아가겠다!”

         

         대충 90퍼센트의 진실에 10퍼센트의 거짓을 섞은 데다, 양보할 공적까지 친절하게 마련해 놨으니 이만하면 속아 넘어가주는 게 예의리라.

         

         …하지만 시발, 같은 경찰이 부상당한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봐 놓고도. 다짜고짜 남자만 쏙 데려가겠다는 건 양심이 없지 않냐? 존나 나쁜 새끼들아?!

         

         “죄송하지만. 같이 동행하게만 해주시면 알아서 의료구역으로 향하겠습니다.”

         

         조원이 저벅저벅 걸어와서 기절한 남자를 들쳐업는 걸 지켜보는 DS2의 조장에게 정당한 부탁 겸 요구를 했다.

         

         막상 헬레나를 옮길 방법이 걱정되긴 했지만,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니까 어디까지나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기만전술을 시도할 수 있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철컥!

         

         “무슨, 잠깐!!”

         

         옆머리. 귓가 쪽에 예고도 없이 총구가 틀어박혔다.

         

         바이저 위로 접촉했는데도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고, 준비한 변명이나 핑계거리를 한방에 모조리 까먹게 만들 정도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미안하지만 바로 요 앞에서 DS3 애들이랑 만났었거든? 그런데 엔지니어랑 같이 왔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못 들었단 말이지…. 후딱 튀어 오라고 연락은 넣었으니까, 기다려보라고 형씨.”

         

         “…….”

         

         아무래도 재수가 없으려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모양이다.

         

         못난 동생의 회심의 한수가 막힌 낌새에 헬레나가 또 멋대로 몸을 일으켜 싸우려고 한다.

         

         그녀의 경우엔 소총이 아예 이마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정말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들어서라도 밀어내기까지 하려는 게 어째 본인이 다 죽어갈 때보다도 훨씬 패기로웠다.

         

         제발 헬레나! 부탁이니까 조금만, 드레이퓨스한테 흥정이라도 해보게 참아줘!

         

         이미 의심이 지펴진 상황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봐야 방아쇠만 가벼워질 것 같았기에, 전전긍긍하면서 연락처를 펼쳤다.

         그리고 최하단에 처박아 둔 불길한 황금빛 번호를 누르기 직전, 한 때의 직장동료들이 당도해버렸다.

         

         “…우리 엔지니어들이 여기 있다고?”

         

         DS3의 1번부터 4번까지. 거의 폐허가 되었다지만 원래는 이곳의 존재조차 모르던 이들을 다 투입하는 것에는 저항이 있었는지 소규모 분대로 쪼개진 이들이 나타났다.

         

         이러면 명령불복종에 월권행위, 눈치가 있다면 무단침입까지 확실하게 적용되어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애매하게 반항하려다 진짜 큰일나느니 지금이라도 전면 항복하는 게….

         

         “아, 이거 고맙군! 도중에 따로 떨어져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찾아서 다행이야.”

         

         ““뭐……?””

         

         지나가던 징수 부대도 믿어줄 능청스러운 말투에 주변 모두가 당황했지만 헬레나의 자리를 이어받은 원 2번 부대원은 정말 태연하게 대꾸했다.

         

         “피차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좋지 않나? 얼른 우리 애물단지들 넘겨주고 갈 길 가자고.”

         

         “그거야… 그렇지.”

         

         긴가민가하면서도, 워낙 자신감 넘치는 언변에 설득당해버린 그들이 남자를 데리고 물러난다.

         

         곧이어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되자마자 이 세상 모든 호들갑이 다 쏟아져 나왔다.

         

         “……야, 갔냐? 쫄려 뒤지는 줄 알았네…!”

         “꼬맹이 엔지니어 씨, 이거 우리 조장님 맞지?! 어!?”

         “뭘 물어봐 씨벌. 체형부터가 딱 그 사람이구만! 그러게 위험하게스리 기업 뒷조사를 왜 하냐니까, 하여간 말은 뒤지게 안 들어주셔요!”

         “으아, 피딱지 좀 봐라. 증혈제…! 증혈제 같은 거 가진 새끼 없냐? 어?”

         

         “아하하….”

         

         격렬한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기분이다.

         최초의 당황은 기막힘으로. 이내 기쁨과 강한 긍정으로 변화하며 저절로 헛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아… 그래.

         헬레나라는 영웅을 직시하고 미쳐버린 인간도 있다면, 반대로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추종자들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나 따위가 없었어도, 의식불명한 헬레나의 생존을 보장해준 최후의 보루였겠지.

         

         “이… 바보, 멍청이 같은 놈들이….”

         

         “조장 덕분에 타 먹은 성과금이 있는데 이쯤은 할 수 있지!”

         “지랄은! 여기서 평생 살 게 아니면 기업이 모를 만한 사설병원이나 아는 대로 불어봐.”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의 등장에 물기 가득해진 헬레나의 탄식이 가슴을 울렸다.

         서로의 이름조차 제대로 몰라, 조장이니 새끼니 바보니 마구잡이로 불러 대는 게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역시… 살아가며 누군가를 믿는 게 잘못됐을 리가 없다. 다만 그 상대를 잘 골라야 할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걸로 운이 없었던 헬레나의 흉터가 조금이라도 작아졌기를 바라며 나는 후송할 의료시설로 그녀가 신뢰하는 모 임플란트 샵을 지목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선생! 환자 좀 잘 부탁해!!

    이걸로 길고 길었던 마음 속의 진심, 내면의 사랑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원래는 각각 다른 소제목으로 분류했던 에피소드 두 개를… 앤 때문에 합쳤더니 혼자서 무려 20화 연재분을 잡아 먹어버렸네요.

    다음부터는 유사성이 좀 있더라도 이런 무지막지한 숫자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서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지각하는) 글을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까지 눌러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뇌물입니다 님의 호쾌한 50코인 후원과 충언 감사드립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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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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