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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설움도 잠시, 천마는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눈물, 눈물이라.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젖먹이 시절 이래로 여태껏 이 내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울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스스로를 위해선 더더욱 그러했고.

       

       그녀를 낳은 아버지도, 어미도, 그리고 부친의 사후 그녀를 기른 신교의 교인들도.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그런 연약한 면모를 보이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다. 세상은 강자존이라고. 결국 최후의 순간에, 믿을 건 자기자신의 힘밖에 없다고.

       

       그녀의 어미는 말했다. 세상은 강자존이라고. 여자란, 암컷이란 강한 수컷을 따르는 법이라고. 자신보다 열등한 수컷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삶이라고.

       

       그녀의 교인들은 말했다. 세상은 강자존이라고. 행복이란 오직 충분한 힘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힘 없는 자는 불합리한 폭력 앞에서 가진 바 모든 것을 잃을 뿐이라고.

       

       하여 그녀는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패도를 걸었다. 강자를 만나면 싸워 이긴다. 그리하여 굴복하면 거두고, 거스르면 죽인다. 그것이 유목민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중원의 비옥한 땅을 일구며 사는 정주민들과는 다른, 눈 덮인 천산의 이치였다.

       

       

       그래,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진리를 깨우쳤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비극도, 본질은 결국 힘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다치는 것이 싫다면 그 어떤 폭력에도 상처 입지 않는 육신을 이루면 된다. 그래서 그녀는 금강불괴를 이뤘다.

       

       늙고 병드는 것이 두렵다면 세월도 병마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육신을 이루면 된다. 그래서 그녀는 만독불침 불로영생을 이뤘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해당하기 전에 적들을 모조리 쳐죽이면 된다. 그렇게 그녀는 지금껏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다.

       

       

       허나… 제아무리 강해져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했으니.

       

       이따금씩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공허함만큼은, 손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으로서, 지성체로서 그녀가 가진 자연스러운 욕구. 나를 바라봐줬으면 한다. 나를 좋게 봐줬으면 한다. 나를 인정하고,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한다.

       

       본래 인간이 약자로서 사회를 조직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달시킨 본능을, 그녀는 버리지 못했다. 아니, 버리지 않았다. 중원을 일통하고 인적 없는 동굴 속에서 폐관 수련을 하면서, 그녀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마주보았다.

       

       일체의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았다면 그녀는 마선魔仙으로서 세상의 섭리를 초월하여 선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비를 도륙내버린 화산의 검선이 그러했듯.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잘라내면서까지 만사에 초탈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뤄낸다. 끝없는 욕망을 거세함으로서 행복에 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바를 모두 성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마도였고.

       그녀의 집착, 욕망, 심마ㅡ 그 모두가 그녀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하여 여지껏 간직하고 있었던 심마였건만.

       그것이 이토록 급작스럽고, 강렬하게 터지다니.

       천하의 그녀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뭇 사람의 관심과 추종,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건만…”

       

       아무래도 엊그제의 짧은 여행은, 그녀가 생각한 이상으로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3평 남짓의 기관실 속에서, 그녀는 궁궐 같은 신교의 대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안락함을 느꼈다. 그곳에서 천마신교의 30대 교주라는 그녀의 신분은 단순한 직함에 불과했다. 그의 곁에서 그녀는 만인을 짓누르는 파괴의 권화가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인간 파천무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무래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느낀 일말의 따스함에 취해버린 모양이었다. 냉정한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감정의 교류에 그만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른다.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그 온기를 나만이 독점하고 싶다고.

       

       “본좌는… 천마신교의 30대 교주. 만마의 지존이며 무림의 절대자.”

       

       부정하지 않겠다. 내면의 심마를. 자신의 나약함을.

       

       하지만 욕망에 그저 휘둘릴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아비가 천하를 얻기 일보직전에 범했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으니까. 더 이상 감정에 휩쓸리지 않겠다. 스스로의 주먹을 무뎌지게 하지 않겠다.

       

       “천마 파천무이니라.”

       

       스스로에게 강조하듯, 그녀는 결연한 낯으로 되뇌였다.

       

       

       ***

       

       

       꿈을 꿨다. 그다지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야릇하고 기분 좋은 꿈을.

       

       사르륵 흘러내려 뺨을 간질이는, 태양을 녹여 엮은 듯한 부드러운 금발.

       묘한 열기를 띈 채 떨리는 청록색 눈동자와, 가녀린 속눈썹.

       그리고 입술에 와닿는 따스하고 몰캉한 감촉까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자고 있어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런 행복한 고민이 뇌리를 스쳐지나간 순간.

       

       흐리멍텅하던 의식이 깨어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헛숨을 들이키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뭐가 뭔지 분간도 못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군요.]

       

       천천히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용사가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오히려 한층 더 빛나는 듯한 느낌까지 드는 화사한 미모.

       

       청록색 눈동자에 감도는 순진한 인상과 눈매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기색이 묘하게 뒤섞여, 어린 듯하면서 동시에 성숙한 것도 같은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풍겼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난처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역이 잘 안 된 걸까요? 아무래도 성검을 좀 더 조율해야…]

       “아뇨, 아뇨. 잘 들립니다. 제가 원래 아침잠에 좀 약해서.”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성검을 조정하려는 그녀를 만류했다. 내가 제대로 반응하자, 그제야 그녀는 안심했다는 듯 성검을 내려놓았다.

       

       [다행이네요. 신성력을 이용해서 통언의 은사를 재현해봤는데, 잘 된 모양이에요.]

       “통언의 은사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또는 이종족끼리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신의 기적입니다. 꽤 편리하죠?]

       “꽤 수준이 아닌데요…”

       

       아무래도 세부적인 원리는 달라도, 천마의 혜광심어와 대충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갤러리에 접속했다는 건 모시던 신도 없어졌다는 뜻일 텐데, 대체 어떻게 신성력을 사용하는 걸까.

       

       물어봤다간 괜히 분위기만 무거워질 것 같아서 자제했다. 지금은 그보다도 해야 할 게 있지 않던가.

       

       “뻗어있느라고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최진윤이라고 합니다.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그녀는 엷게 웃으며 답했다.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에요. 제 이름은 페러그린 아리아론도, 편하게 ‘페르’라고 줄여 부르셔도 돼요.]

       “아, 네.”

       

       초면에 애칭을 입에 담을 정도로 사교력 넘치는 성격은 못 되는데요. 이럴 때만큼은 갤러리가 그리웠다. 음슴체를 쓰든 반말을 쓰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격식 따윈 찾아볼 수도 없는 무법지대 말이다.

       

       스스로의 모자란 인싸력을 자책하며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가, 어느새 7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대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제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신 겁니까?”

       [예. 혹시라도 재차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적게 잡아도 4시간 반 이상을 옆에서 지켜주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지루하셨을 텐데… 괜한 수고를 끼쳐드렸네요.”

       [아뇨,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실내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쏜살처럼 지나갔는걸요.]

       

       그녀는 널찍한 우주선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쇠붙이로 만들어져, 하늘은 물론이고 우주를 떠다니는 배라니. 제 세상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에요.]

       “지금은 고장났지만요.”

       [사람의 손이 닿은 건,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언젠가는 낡고 못 쓰게 되니까요.]

       

       그녀는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부럽기라도 한 것마냥,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벽면을 쓰다듬었다.

       

       [이것이 신도, 마왕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산물.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쌓아올린 결실…]

       “그렇게 감탄하실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딴 고물 탐사선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우주전함도 반으로 갈라버리셨잖아요?”

       [가진 바 힘의 크기가 전부는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제 힘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수한 생명을 농락하고 희생시켜 얻은, 피로 맺어올린 것이니까요.]

       “그래요? 저도 마찬가진데.”

       [네?]

       

       멍하게 되묻는 그녀에게, 왼팔의 알통을 오른손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이 몸이요. 개조 수술을 받고 이렇게 튼실해진 거거든요.”

       

       그 전에도 적어도 군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체력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운동 좀 한 일반인 수준이었다. 지금의 쓸데없이 튼튼한 몸은 전적으로 과학 기술 덕분인 것이다.

       

       “사실 사람을 대상으로는 해본 적 없는 실험이라 아무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제가 첫빠따로 지원했어요. 수술 안 받아도 어차피 전쟁통에 죽을 거면 받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럼 당신 이외의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은 게…]

       

       순진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에게,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알려주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서요. 오히려 제가 성공한 걸 보고 정부에서 사람을 갈아넣었거든요. 안 봐도 뻔해요, 강화인간으로 파일럿부터 특수부대까지 꽉꽉 채워넣고 싶었겠죠.”

       [아…]

       “게다가 사람들도 또 제가 전쟁에서 활약할 때마다 이상한 환상을 품어가지곤, 프로젝트에 자원하는 인원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그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됐게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미국 갔지.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한다.

       

       만약 내가 실패해서 죽었다면, 프로젝트는 훨씬 일찍 사양길을 걷지 않았을까. 훨씬 적은 사람의 생명이 소모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음울한 이야기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대충 뭉뚱그렸다.

       

       “뭐, 그런 겁니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게 그거에요.”

       [그런가요…]

       

       신이 사람을 다스리는 곳이나,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곳이나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거다. 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의 기술력도 전쟁과 착취, 기만과 정복… 결국은 무수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갈아넣은 끝에 탄생한 것 아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아침 댓바람부터 축 처지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합시다. 있는 건 조막만 한 보존식 에너지바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괜찮다면 하나 드실ㄹ…?”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우주식량을 가지러 가려던 찰나,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대경하여 갈 곳을 모르고 달달 떠는 한 쌍의 청록색 눈동자와,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갑자기 왜 넋을 놓고 저러고 있는 것이지? 내가 뭐 말을 잘못하기라도 했나? 뭔가 극대노 스위치라도 누른 탓에 저렇게 말문이 막히고 얼굴에 피가 도는 것인가??

       

       의문스레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그제서야 눈치챘다.

       

       “……아.”

       

       정면에서 약간 아래,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ㅡ

       

       다름 아닌, 아침 아니랄까봐 어김없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내 고간의 텐트가 있었다. 헐렁한 반바지로도 도무지 감출 수 없는 남성성의 상징이 그녀의 면전에 과시하듯 솟아올라 있었다.

       

       평소에는 혼자 지내다 보니까 전혀 의식 안 하고 있었는데, 개씨발 좆됐다…! 영락없이 초면부터 발정하는 음습한 한남으로 낙인 찍히게 생길 판이라, 나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해명을 시작했다.

       

       “그,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당연한 생리 현상입니다. 아시죠…?”

       

       하지만 머리가 새하얗게 빈 통에, 유창한 해명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괜히 더 수상쩍게만 느껴지는 추한 변명에, 용사는 내 바지의 융기를 힐끔힐끔 훔쳐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네에…]

       

       전혀 납득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스스로도 그건 오해라고 도저히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까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입술에 남은 부드러운 감촉이 뇌리를 스쳐지나간 순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던 하반신의 괴물이 한 차례 추악하게 꿈틀거렸다.

       

       “……”

       [……]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녀의 뜻 모를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냥 죽고 싶다. 진짜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니 천마님 지금 이해가 잘 안 되시나 본데…
    지금 브레이크 밟고 계실 때가 아니라니깐? 풀악셀 안 밟으면 또 금발거유백인한테 밀려난다고 아ㅋㅋ

    응기잇히야님, 이광상님 후원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해요옷… 요즘 모기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판에 자꾸 잠을 설쳐서 컨디션을 조진 것입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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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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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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