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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

       *

       

       

        그날 이후 일주일, 이반은 평화로운 정원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면 날붙이를 들고 뛰어오는 에시디스를 제외한다면 그렇단 이야기다. 그녀는 선공형 몬스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선공형 문명인으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변화다.

       

         

          어쨌건, 프리첸카야에 터진 환란은 일주일 안에 정리되었다.

         

         사건의 규모로 보나, 그 여파로 보나 어떻게 하더라도 일주일 안에 모든 일이 마무리될 수는 없는 법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프리첸카야는 유능한 첩보기관(대내 첩보를 우선시한다.)이 있다.

         

         드미트리는 그와 그의 부하들이 만들어 낸 이 아름다운 결말을 자랑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동네방네 개국공신입네 떠들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퍼억!

         

         “끄으으어윽!?”

         “자세가 흐트러졌다. 다시.”

         “슨브늠… 즈그….”

         “다시.”

         

         

         그는 지금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로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보면, 이반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면서 기꺼이 물구나무를 선 기이한 후배들 사이에서.

         

         줏대도 자존심도 없는 것들…. 드미트리는 흘러버린 요즘 세대 첩보요원들의 정신력에 한탄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용사 파티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칠용장 직접 도살 기록을 보유한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두려움이 아니라 그.

         

         존경심?

         

         존경심. 그래.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절, 방첩사령부의 전신이었던 절멸부대에서도 한따까리 하시던 원로님이시니까.

         

         그래, 존경심. 결코 두려운 게 아니다. 아니?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나 저 선배나 둘 다 같은 계급(중령)이 아닌가. 거기다 그는 아직 젊으므로, 진급하게 되면 두고 볼 일이다.

         

         

        -아, 페트로비치 중령. 왔는가?

        -뭐? 아, 미안하네. 계급장에 줄이 부족하면 소리가 약해지더군. 잘 들리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조금 더 빠릿한 목소리로 말해 보겠나? 크흠. 물을 ‘대령’ 해보게 ‘중령’ 으하하하. 어허, 아무리 전역해도 그렇지. 한번 군인이면 영원한 군인….

         

        -아, 잠시만요. 말로, 선생님. 선생님 말로 합시다. 아.

        -죄송. 아니 죄송하다니까요. 사과한다고. 아뇨. 반말이라니. 제가 언제요.

        -아, 그거 포션, 아니 그거 내려놓으시고.

         

         

         “…으극.”

         

         

         상상 속에서 처맞던 드미트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존경심이야.

         

         

        *

         

         

         이반은 방첩사령부의 군기를 한바탕 다잡은 이후에야 장황한 설명에 납득할 수 있었다.

         

         폭약 매설이야 뭐, 그렇다 치고.

         

         근위사단의 반란 준비…? 막는 데 힘들었겠군. 사전에 감지한 것도 훌륭해.

         

         지하에서 드워프…? 이건 또 뭔….

         

         귀족원 왕세자파의 연락망 파괴, 현 국왕의 구금, 국고 및 보물전의 탈취. 오, 대단하군.

         

         프리첸카야가 같은 날에 겪어야 했던 이 사건들을 대충 납득하곤, 필사적인 해명 (‘선배님 업무 범위엔 손끝 하나 대지 않으려다 보니 하하, 일선 요원들과 그, 라포 형성이 좀 덜 되었었나 봅니다. 아하하하.’)을 들은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첩사령부가 바빴다는 사정은 잘 알겠다.

         

         하지만, 원래 방첩사령부는 바빠야 하는 곳이 아니던가?

         

         가끔 보면 이 미개한 전근대 시대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풍조가 있었다.

         

         이를 과격하게 비유하자면 이와 같다. 칼이 날카롭다고 칭찬하는 사람이나 펜에서 잉크가 나온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방첩사령부가 첩보 활동을 하느라 바빠서 주요 호위 대상을 방기했다는 데에 이해를 해야 하나?

         

         나 땐 안 그랬는데. 나는 용사 파티 척후조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적전 잠입도 하고, 정보 탈취도 하고 주요 자산 사보타주도 했는데. (사실이다.)

         

         왜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것 하나 못 하는가. 이는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반은 주말을 통째로 방첩사령부의 정신 교육에 할애했다.

         

         방첩사령부의 요원들은 지금의 직장을 만든 창업자에게 직접 멘토링을 받아 기쁘고,

         

         이반은 프리첸카야의 첩보요원들이 한결 정예해진 것에 기뻤으며

         

         드미트리는 주말에도 무보수 출근 후 반기 훈련계획에 없던 훈련 강제 참여로 슬퍼졌다.

         

         

        *

         

         

         한참의 대거리가 끝난 이후, 드미트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짚고 소파에 앉은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선배. 내일은 학교 가세요?”

         “가야지.”

         “그, 음. 아… 이거 우리 전하께서 아직 말하지 말래서 도저히 말을 못 하겠는데. 음. 곧…. 성은…? 성은. 그래 성은이 있을 겁니다.”

         “성은?”

         “네, 곧이라고 해 봐야 우리 전하 성격 생각하면 아마도 내일…. 내일은 좀 깔끔하게 입고 출근하세요. 가능하면 수염을 좀 정리라도 하시고.”

         “내가 공개적인 내사를 받을 만한 입장은 아닐 텐데.”

         “예, 뭐 우리가 다 그렇죠. 하지만 공개적인 치하 말고 되게 사적인 치하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해서요. 아시죠? 그 왜, 남녀 간의 내밀한.”

         

         

         이반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 헛소리에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는 사춘기 소년이 아니었으므로, 합리적인 성인으로서 왕녀의 입장을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 막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다져놓았다지만, 왕녀는 결국 왕위 이양을 사양해야 했다. 멀쩡한 임금을 끌어내릴 충분한 명분이 없던 탓이다.

         

         왕세자가 납치되고 수도에 테러가 일어난 것은 왕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공표되었다.) 왕의 무능을 공박하는 순간 방첩사령부를 위시한 수도 근위 군제가 모두 갈려 나간다.

         

         아무리 귀족원이 득세했다 하더라도 그런 꼴을 보아선 안 된다. 수도 근위사단을 포함한 군제는 당연하게도 고위 귀족들의 앞마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은 무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무능한 몇몇 간신들이 임금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결론 지어진 이상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왕녀는 공식적으로 방첩사령부나 이반 그 자신에게 어떤 ‘성은’ 같은 것을 하사할 수는 없다. 애초에 어떤 국가도 비밀요원에게 공개적으로 사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녀석이라 하더라도, 왕녀와 관련된 일로 농담을 할 녀석은 아니니까.

         

         이반은 생각에 잠긴 채로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문득 보니, 칠이 벗겨진 고아원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반년에 한 번씩 건물 미화에 대대적인 자본을 투자하는데도 이렇다. (고아원생들이 담을 밟고 돌아다닌 탓이다.)

         

         기왕 주는 것이라면 돈이 좋겠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장실로 향했다.

         

         

        *

         

         

         언젠가 회고했듯이 모든 아카데미물의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아카데미 교장(또는 총장)은 세계관 최강자다.

         

         그렇다. 관록 있는 행정관료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대체 왜 천재마법사(어린 아이의 외형)이나 반로환동한 전대의 고수(어린아이의 외형)을 앉히는 지는 몰라도 대개 그랬다.

         

         생각해 보면 덤블도어도 유럽 최강자였으므로, 영국 천마(인생의 목표가 초중고 복합 교육시설 타격)를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덤블도어 사후 호그와트의 꼴을 보면 대단히 신뢰성 높은 일이다.

         

         지금 이 시대에 세계관 최강자를 꼽으라면 전 세대의 몇몇 강자들이 논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상식적인 사람들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직을 맡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이 와중에, ‘프리첸카야 최강자’를 꼽으라면 공교롭게도 ‘행정관료 수반’ 출신이며 ‘군부와 재무부와 사법부와 입법부가 동시에 복종’하고 ‘그러나 동시에 이젠 공식적인 지위도 없으니 명예직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고, ‘때마침 결혼 적령기’인 한 사람이 있다.

         

         대체 무력이 최강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전근대가 아무리 미개하다지만 지구에서도 무력만으로 권력을 쥔 사람은 고대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다.

         

         자연스럽게도 ‘최강’이란 뜻은 당연히 ‘가장 강한 권력’을 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랬다.

         

         프리첸카야 최강자.

         

         엘리자베타 키릴로브나 크라실로프는 월요일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한 (전)총장을 집으로 무사히 귀가시킨 후(크라실로프는 퇴직금을 주지 않는다.), 총장실의 전면 개수를 시행했다.

         

         

         “아, 거긴 흑단목으로.”

         “예, 폐, 아니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렇게 예를 차리지 말게. 나는 지금 총장으로 온 것이 아닌가.”

         “예, 총장님!!”

         

         

         총장실을 동궁정 집무실로 전환하는 작업은 놀랍게도 오전 내에 끝났다. 프리첸카야에선 시간 대신 인간을 갈아버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시간과 달리 인간은 언제든 재생산 가능한 자원이다.

         

         그럭저럭 사람이 살만한 꼴(동궁정의 50% 정도만 사치했다는 의미에서)이 된 총장실에 앉아서, 엘리자베타는 그제야 시위 무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를 불러오도록.”

         “어명을 받드나이다. 폐하.”

         “어허.”

         “예, 총장님.”

         

         

         총장으로 취급받고 싶다면 왕실근위대를 왕실에 두고 오란 이야기를 감히 떠올리지도 않은 채, 근위대 시위 무관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총장실을 떠났다.

         

         엘리자베타는 쭉 기지개를 키며 창밖을 바라봤다.

         

         화창한 여름날의 교정은, 지난 나날의 혼란과는 상관없다는 듯 활기찬 학생들로 가득했다.

         

         부럽다.

         

         엘리자베타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정규 교육과정이란 개념이 없는 이 세상은, 고등교육을 대부분 가정교육으로 해결하니까.

         

         그녀의 유년기의 절반은 궁정에서, 남은 절반은 전장에서 지났다. 그녀가 배운 교육은 귀족 예법과 궁정 예법을 포함해 군사학, 정치학, 군주론에 치중되어 있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또래들과 삼삼오오 몰려다닌 경험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저기 저 학생들과 그녀는 나이 차이조차 얼마 나지 않았다. (그녀는 10년 터울 아래까진 또래로 친다. 따라서 이반 또한 그녀의 또래다.)

         

         

         “흐음….”

         

         

         성 얀스크 대학의 총장에 취임한다는 공식 발표가 지금쯤 귀족원에 닿았을 것이다. 그 늙은이들은 아주 몸이 달아오를 테지.

         

         성 얀스크 대학은 국제적 명문이다. 따라서 귀족들은 단지 교육열 뿐만 아니라, 국제적 사교활동의 일환으로 제 자식들을 이 학교에 어떻게든 입학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렇다.

         

         대학을 완전히 점거하면, 프리첸카야 귀족들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볼모를 잡힌 꼴이 된다는 사실.

         

         엘리자베타는 차갑게 웃었다. 가히 막부의 지배자, 왕국의 어둠을 통제하는 군주다운 미소였다.

         

         뛰어난 군주는 한 가지 정책으로 수십 가지의 이점을 쟁취하는 법이다. 대학 총장직은 다만 귀족원을 향한 위협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건 부가적 목표에 불과하다. 귀족원을 얼러 주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식도 많았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의 진정한 전술 목표는….

         

         

         “총장님. 모셔왔습니다.”

         “들라 하라.”

         

         

         그런 말투를 쓸 거라면 대체 왜 총장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근위대 무관이 총장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등 뒤에서, 깔끔하게 세탁된 작업복을 입고 뽀송뽀송한 수건을 목에 두른 남자가 함께 들어섰다.

         

         

         “왔는가.”

         “…예.”

         “앉게. 할 말이 많아.”

         

         

         사내는 총장실을 점거하고 있는 엘리자베타를 잠시 바라보고, 그가 기억하는 형태와 완전히 달라진 총장실을 한 차례 둘러본 뒤에, 잠시 천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돈 받긴 글렀군.

         

         그러나 그것은 왕혈 앞에서 보일 법한 예의는 아닌 탓에, 그 상식적이고 공손한 사내는 곧 소파에 앉았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의 용어해설

    내사內賜, 사여賜與, 치하致賀 : 임금이 신하에게,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건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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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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