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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

     

    철그럭, 철그럭.

     

    월광궁 기사들의 무거운 중갑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복도에 울려 퍼졌다.

     

    선두에서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는 이는 당연하지만 월광궁의 주인 아셀라다.

     

    기사들은 평소와 다르게 풀플레이트 아머로 완전장비하고 깃발까지 치켜들었다.

     

    드래곤이라도 토벌하러 출정할 기세다.

     

    콰앙!

     

    시종들이 복도 끝 문을 힘차게 열자 아셀라가 재판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녀의 옆에 슬그머니 붙어있다.

     

     

    재판장은 좌우대칭 구조다.

    우측에는 참관인들이 주르륵 앉아있다. 그중에는 황족도 몇 있다.

     

    건너편에서도 문이 열리고 기사의 무리가 우리를 향해 힘차게 걸어온다.

     

    그 선두에서 금발을 휘날리는 남자는 물론, 게오르크 2황자였다.

     

    순식간에 지근거리까지 맞붙은 아셀라와 게오르크.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아셀라, 감히 내게 재판을 걸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했구나. 하늘 같은 오라비께 지켜야 할 예의가 있지 않나?”

     

    아셀라는 팔짱을 끼고는 게오르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문답무용. 검이나 뽑아.”

     

    “주제를 모르는군. 내가 서부 공작을 암살하려 했다고? 이유도 증거도 없는 시비용 의혹 제기야. 어이가 없어.”

     

    게오르크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음, 증거라면 있습니다.”

     

    “뭐라고?”

     

    내 발언에 게오르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도회장을 습격한 암살자는 2인. 도적은 기사들이 현장에서 사살했지요. 흑마술사는 월광궁이 생포해서 구금했거든요. 그런데 이놈이 입이 꽤 가벼웠습니다.”

     

    게오르크가 입술을 꽉 여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사실 생포한 암살자는 흑마술로 금언 봉인을 당한 상태다.

    해주에는 실패했다. 목숨만 붙어있다.

     

    하지만 게오르크는 그걸 알 수 없으니 진짜 들통이 났다는 불안감에 이 재판을 묻어버려야만 한다.

     

    아셀라가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게오르크를 가리켰다.

     

    “본녀의 안위를, 나아가 황실과 수많은 귀족의 안전을 위협한 죄.”

     

    또박또박 선언하는 아셀라.

     

    “피로 대가를 치르거라, 게오르크.”

     

    “윽.”

     

    게오르크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금방 기세등등하게 반격해왔다.

     

    “웃기지 마라. 짐을 허황된 말로 함정에 빠트린 죄, 너야말로 똑똑히 갚아야 할 것이다 아셀라!”

     

    “재판이나 하시죠 황자님. 이렇게 해서 시시비비는 영원히 가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왼편을 가리켰다.

     

    아셀라와 게오르크는 재판장을 가로로 반으로 가른 중앙에서 맞붙었다.

     

    그 중앙선을 따라가면, 재판관이 앉아있는 법관석이 있다.

     

    “게오르크 폰 뷔르템펠트 2황자 전하,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3황녀 전하는 각기 결투 재판으로 진실을 가릴 것을 동의하십니까?”

     

    “물론이야.”

     

    “바라던 바다.”

     

    재판관에게 즉시 선언하는 두 사람.

     

    “입회인은 앞으로.”

     

    “네네! 이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라우가가 폴짝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두 사람과 동맹관계도 없고 같은 입장에 있는 승계권자니 입회인으로는 적절하다.

     

    “어디 보자, 신앙심 충만한 보조가 필요했었지. 주치의 보이슈군은 앞으로!”

     

    “명을 받들지요, 황녀님.”

     

    라우가의 주치의, 보이슈가 앞으로 나섰다. 내의원에서 몇 번 지나친 적 있다.

     

    키가 작은 동안의 청년이다. 외모만 보면 소년이라고 할까. 라우가랑 같이 서 있으니 오히려 그가 연하로 보인다.

     

    라우가는 결투의 과정과 결과를 입회하고, 보이슈가 신앙심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다.

     

    보이슈가 차분한 미성으로 설명했다.

     

    “결투 재판에서는 승자의 주장이 진실입니다. 여신님께서 진실을 말하는 분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지요.”

     

    여신교가 널리 퍼진 제국에서 결투 재판이 성립 가능한 이유다.

     

    뭐, 내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지금처럼 필요할 땐 써먹어야지.

     

    군대 간 무력충돌을 아셀라와 게오르크의 일대일 대결로 바꿔서 전력을 우위로 가져올 수 있다.

     

    “그럼 여신님께 선언을 부탁드립니다. 2황자님이 주장하시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아셀라는 짐을 근거 없이 모함했으며 이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배상은 월광궁으로 받겠다.”

     

    “3황녀님이 주장하시는 진실은요?”

     

    여기서는 내가 나섰다.

     

    “게오르크 전하가 이번 아셀라 전하 및 슈바르츠슈바이크 대공 암살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다는 진실입니다.”

     

    “암살 사건에 진범이 있단 말인가?”

    “그게 월광궁이 주장하는 쟁점이군.”

     

    참관인들이 수군거린다.

     

    “배상은 그렇군요. 게오르크 전하가 진범을 밝히고 3년간 황궁에서 나가 지내시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금 뭐라고? 짐을 황실에서 쫓아내겠단 소리냐?”

     

    게오르크가 생각지 못한 조건에 당황했다.

     

    죄의 인정이 아니라 진범을 밝히라고 문장을 바꾼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결투 재판은 승자의 말이 진실이 된다.

     

    게오르크가 암살자를 고용한 실행범이 아니라면 진범의 존재는 영영 묻힌다.

     

    또한 암살이 황실 내부 싸움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모양이 되니, 황제는 싫어할 게 뻔하다.

     

    황제의 명은 절대적이다. 그가 결투를 무효로 해버리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뭐, 진범이야 높은 확률로 카밀라겠지.

     

    “토진궁에는 전하 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이 자주 오가지요. 그 중 진범이 있어서 전하께서 관리 책임을 숨기고자 했다면 3년 퇴궁 정도야 마땅한 벌이지 않겠습니까?”

     

    “하, 감히 짐에게 벌을 내리겠다 이 소리냐? 일개 주치의인 네놈이!”

     

    “벌을 내리는 건 제가 아닙니다. 재판이죠.”

     

    게오르크가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쥐었다.

     

    “불경이 선을 넘다 못해 하늘을 찌르는구나. 짐이 패배할 일은 절대 없다. 짐이 네놈처럼 허약해 빠진 샌님으로 보이나?”

     

    스릉!

     

    게오르크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온갖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중검이다.

     

    “짐은 황실 기사단 소드마스터에게 단련받은 적도 있는 몸이다. 이 결투에서 나와 아셀라,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자명하지!”

     

    게오르크가 자신만만하게 나올 만도 했다.

    그도 일단은 검술을 배운 소드 유저다. 어지간한 기사단 소대장 급 실력은 된다.

     

    아셀라가 솜씨 좋은 마법사긴 해도 일대일 결투에서는 근접직인 검사가 원거리직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한 번 거리를 좁히면 방어할 수단이 일체 사라지기 때문이다.

     

    “너희들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진짜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아니지?”

     

    라우가가 조금 걱정하며 물었다. 게오르크와 아셀라 모두 역정을 냈다.

     

    “짐은 진심이다!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리가 없잖아!”

     

    “먼저 모욕당한 쪽은 월광궁이야. 토진궁의 뿌리를 뽑아주겠어.”

     

    라우가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알았어. 아셀라와 게오르크 둘이서 진검승부의 결투다 이거지.”

     

    “라우가 황녀님, 입회인으로서 결투 재판의 규칙 6항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규칙?”

     

    내가 요청했다. 라우가의 주치의 보이슈가 서적을 펼쳤다.

     

    “규칙 6항. 남성과 여성이 진검승부 결투를 할 경우 남성 측에 핸디캡을 줍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게오르크가 성을 냈지만 대법관 역시 엄숙하게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여성 측이 근력에서 불리하기에 생겨난 조항입니다.”

     

    “그건 마법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대의 규칙 아닌가!”

     

    “전통은 전통입니다. 남성의 하반신을 땅에 묻은 채 결투를 진행한 전례 등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셀라가 턱을 까딱이며 대답했다.

     

    “결투장에 휴대할 수 있는 건 무기 한 자루와 갑주가 전부지. 휴대품을 하나 더 추가하겠어.”

     

    “추가 무기의 휴대… 전례가 있습니다. 인정해도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떻겠습니까, 황녀님?”

     

    라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없던 얘기도 아니고, 입회인으로서 인정하겠습니다!”

     

    “벌써부터 술수를….”

     

    게오르크가 당황했다.

     

    결투는 이미 시작했다고, 게오르크.

     

    관련 서적 정도는 미리 읽어왔어야지.

     

    “휴대할 무기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아셀라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신하는 주군의 소유물이야. 방패이자 무기가 되어야 하지. 내 신하를 하나 가지고 결투에 임하겠어.”

     

    “마, 말도 안 되는! 인정할 수 없다!”

     

    게오르크가 역정을 냈다. 그도 우리의 의도를 눈치챘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타냐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익스퍼트인 그녀는 순식간에 게오르크를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핸디캡은 없앤다. 명예로운 결투다. 외부인 없이 일대일로만 진행하겠다.”

     

    “전하께서 여덟 살이나 어린 여성과 진심으로 치고받는 건 명예로우시고요?”

     

    “이놈이…!”

     

    게오르크가 나를 향해 이를 뿌득 갈았다.

     

    “저희는 엄연히 결투 재판의 규칙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맘에 들지 않으신다면 의혹을 인정하고 도망치시는 길뿐입니다만.”

     

    “주치의, 네놈이 꾸몄군.”

     

    홱, 게오르크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래. 추가할 휴대품이 주치의, 네놈이면 받아들이마. 전부터 네놈이 짐에게 저지른 불경은 셀 수도 없어. 그 목을 직접 벨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

     

    긴박한 전개에 재판장이 술렁거린다.

     

    결투에서야 상대를 죽여도 합법이다. 나는 게오르크에게 살해당해도 억울해할 수 없게 된다.

     

    비전투요원인 나 정도는 결투에 있으나 마나니 승률은 변함없다고 여겼겠지.

     

    게오르크가 재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놈을 황궁에서 쫓아낼 수도 없다.

     

    아셀라를 돌아본다.

     

    그녀 역시 이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답을 머뭇거렸다.

     

     

    [No. 012 : 제국의 멸망 30% → 38%]

     

     

    황실에 대한 아셀라의 증오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비열함에 질릴 만도 하지.

    게오르크를 내쫓을 기회다.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결투는 성립시켜야 한다.

     

    “좋습니다. 제가 참가하죠.”

     

    내 대답에 게오르크가 승리를 확신하며 씨익 웃었다.

     

    “조건이 합의되었군요. 여신님의 가호가 진실을 말하는 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보이슈가 신성력을 발현해 역할을 마친다.

     

    짝! 라우가가 손뼉을 부딪쳤다.

     

    “입회인으로서 게오르크와 아셀라의 결투 재판이 성립했음을 선언합니다! 날짜는 2주일 후!”

     

    아셀라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게오르크를 내려다본다.

     

    “쯧! 기분 나쁜 여자 같으니.”

     

    게오르크는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몸을 틀어 재판장을 나섰다.

     

     

     

    우리 역시 들어왔던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공자,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니나 다를까 아셀라가 바로 나를 타박해왔다.

    “게오르크가 꽁무니를 빼거나 유리한 조건으로 결투를 성립시키는 시나리오였잖아. 공자가 나랑 출전해서 어쩌려고 그래.”  

    화가 많이 나셨네.

     

    “걱정 마세요. 결투는 반드시 이깁니다.”

     

    “게오르크는 그렇게까지 무시할 정도는 아니야. 엄연한 검사라고.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말은 저렇게 해도 게오르크가 대놓고 황녀님의 목숨을 노릴 순 없습니다. 일이 커졌으니 황제 폐하도 관전하실 테지요. 대놓고 황실에 불을 지필 후계자를 좋게 보실 리는 없잖아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정말, 됐어.”

     

    아셀라가 툴툴대며 팔짱을 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압승하겠어. 공자, 검이라도 수련할 거니?”

     

    “할 만큼은 해야죠. 황녀님은 마법 연습에 집중해 주세요.”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셀라에게 부탁했다.

     

    “기사단만 빌려주세요. 재료를 채취할 인력이 필요하거든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 표지가 나왔어요! 몇 년 후의 황녀님이에요!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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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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