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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0

    오랜 시간동안 루크와 악연으로 이어져있던 흑마법사, 세이어가 죽었다.

    루크는 그의 영혼과 동기화하여 본질 자체를 역산하는 방식으로, 그는 따로 준비된 라이프베슬이 얼마가 되던간에 상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세이어라는 존재의 완전한 소멸,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그가 소멸을 맞이했다고해서 루크의 근심도 깔끔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 순간 남긴 유언이 아직 머릿속에 잔향처럼 떠돌고 있는 탓이다.

    ‘운명에게 버림받은 존재가, 온갖 운명적인 보정을 덕지덕지 두른 존재를 상대로 어찌 승리할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이후, 운명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루크의 머릿속을 맴돌며 루크의 머릿 속 이곳저곳을 찔러대고 있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정당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거대한 비호.

    그것은 ‘세상 밖의 침입자들’로부터 세계에 정당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태초의 규칙이자, 이는 불합리한 죽음, 납득하지 못할 불운, 존재 연속성의 상실과 같은 비운명적 재앙에 저항하는 강력한 힘이다.

    비유하자면, 운명이란 잘 짜여진 연극의 대본과도 같다.

    모두에게 탄생 즉시 부여되는 결말은, 삶을 하나의 거대한 연극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여신은 그 무대의 감독이고, 운명의 존재들은 연극의 등장인물들.

    세계라는 무대 위에 오르는 모든 존재는 각기 운명이라는 대본과 역할을 부여받고, 궁극적인 행복의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에 무대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에게 엄격하다.

    그 말은 즉,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에겐 당연한 비호가 그들에겐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세계에 정당하게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차별없이 부여되는 비호이기에 대부분은 그 위력을 체감하기 어렵지만, 운명은 그만큼 강력한 세계의 규칙이고, 역설이며, 중심이 되는 힘이다.

    그렇기에 운명이 없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세계에게 거부당한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운명적 방해를 맞이한다.

    만일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지.

    몇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운명은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마왕이 사망한 이후 수많은 마족들이 맞은 결말을 생각하면, 이는 사실에 가까운 추측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운명에게 버림받은 자라면, 더욱 정교한 계획을 짜야한다.

    하지만 계획이 너무 원대할 수도 없다.

    계획이 타인의 운명과 엮이면 엮일수록, 그 운명적인 방해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정교해질것이므로.

    당연히 성공할 수 없겠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의 방해를 계산하고 염두한 채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다.

    ‘계획이란건 말이지, 원래 실패를 상정하고 짜여지는 법이야.’

    전투의 승리가 반드시 전쟁의 승리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사소한 실패가 꼭 계획의 실패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실패를 염두한 계획을 세웠고, 무수한 실패 위에 마침내 성공의 결말을 드리웠다.

    즉, 이 모든 일들은 루크가 그 사실을 알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이미 마지막 단추를 채워넣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작은 실패는 곧 큰 실패가 될 것이고, 큰 실패는 곧 그보다 큰 성공이 되리라.

    ‘사실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어.’

    결론적으로,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열차에 오르기 전부터, 그는 이미 계획을 성공시켰다.

    앞선 3번의 결과가 있었기에,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패배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운명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반드시 승리하는 존재.

    실제로 이미 숱한 죽음을 선사한 불패의 대행자다.

    그러나 그 ‘승리’라는 말에는 헛점이 있다.

    반드시 승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승리를 향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성공’이라면?

    그래서 그는 열차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계획을 위해 스스로의 패배와 소멸을 각오한 채로 몸을 실었다.

    자신의 처참한 패배를 위해서, 그리고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

    때문에 루크는 이번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다.

    이미 계획은 완성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전투가 발생한 순간 이미 그는 성공에 다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쯤 되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열차에서 발생한 언데드들이 그저 단순한 언데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결과’였다는 것을.

    그들 그동안 세상의 뒷편에서 계속해온 ‘의식’이란건, 사실은 타인의 운명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를 위해서 루체스트라는 기업의 이름으로 ‘도플갱어 슬라임’을 그토록 연구하고 개발해왔던 것이다.

    타차원의 생명체인 도플갱어 또한 운명 밖에 존재하는 마물이고, 그들의 잠식현상은 존재의 특성으로서 작용하여 운명적인 실패 역시 작동하지 않기에.

    어떻게든 신체에 이식하기만 하면 살아있는 자의 몸을 잠식해 운명마저 집어삼키는 도플갱어는 그 계획을 돕는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러니까 그의 말대로, 언데드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 자체로 이미 성공의 증명이었다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 남아있던 운명의 흔적을 빼앗기는 순간, 그곳에 언데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크가 고민하는 주제는 이토록 명확하게 결론이 내려진 진실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루크가 궁금한 것은……..

    그 때였다.

    “하하하, 내게서 알아낸 지식이 네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다준 모양이네. 기분 좋은데?”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

    그것은 소멸한 흑마법사, 세이어였다.

    “…….”

    루크는 그의 등장이 놀랍지 않았다.

    일시적이나마 영혼이 얽히는 과정에서 미미하게 남아있는 영혼의 잔상.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가면 완전히 소멸해버릴, 의미없는 메아리일 뿐.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즉, 저것은 형체가 없는 환청이고, 환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적어도 간단한 문답만은 가능하리라.

    루크는 다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빈 공간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대는 자신이 운명에 버림받았다고 했지.”

    “그런 말을 했었지.”

    세이어는 분명 운명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런 철저한 계획을 세운 것이고, 결국 소멸까지 각오하고 모든 판을 짜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너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니까.”

    그가 마지막에 한탄한 것처럼, 그는 ‘버림받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겐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소멸시키는 방식이 영혼의 과부하를 이용한 방법이었던 만큼, 이는 어떤 반론의 여지도 없다.

    영혼이 운명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야기했던 상식.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버림받은 존재’는 그가 아니다.

    즉, 그가 기꺼이 계획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유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대의’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루크를 의문 속에 빠트리는 질문의 핵심이었다.

    “그러면 넌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거지?”

    만약 자신밖에 고려하지 않는 흑마법사가 스스로의 소멸마저 각오할 정도의 대의라고 한다면, 그건 대체 뭘까?

    그 궁극적인 질문에 세이어의 환영은 짙게 미소지었다.

    마치, 그간 말할 수 없어 지켜온 비밀을 말할 생각에 근질거린다는 듯이.

    ——

    그 무렵, 루크와 함께 비행기에 탄 시루드는 이륙과 동시에 잠에 빠진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자니? 진짜로 자는거야?”

    그런 루크의 모습에 시루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당시는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서 오늘 만나면 이야기할 생각으로 많은 질문들을 미루고 기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느긋하게 이야기할 상황이 되니, 루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꿈나라로 떠나버렸다.

    평소엔 약간만 건드려도 곧잘 일어나던 애가 오늘은 어깨를 두드려봐도, 볼을 찔러봐도 도통 꼼짝도 않고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속이 다 갑갑해진다.

    하고 싶었던 질문이 많았다.

    ‘케이트’의 존재는 언제부터 알았는지, 당시 침입자는 대체 누가 보낸 것이고, 무엇을 위해 찾아온 것인지, 자신이 돌아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심장의 서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지금은, 왜 그렇게 작아진건지.

    오늘은 그동안 궁금했던 걸 다 물어볼 수 있을거란 생각에 밤잠까지 설쳤는데, 자기는 저렇게 쿨쿨 자버리기야?

    설마 나한텐 말하기 싫어서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루크의 볼을 찌르는 시루드의 손가락이 점차 분주해졌다.

    그 모습에 소리드는 귀여운 손자를 보는 인자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한참 이야기할 생각에 들떴는데, 홀로 잠들어버린 것이 그리도 상심할 일이었니?”

    할아버지의 말에 그제서야 자신이 조바심에 참 예의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루드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루크가 어제 많이 힘들었던 것 같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저렇게 곯아떨어질 정도로요.”

    “흐음, 그렇겠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시루드의 투정에 가까운 목소리에, 소리드는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듯이 손자를 달랬다.

    루크는 불과 며칠 전에 목숨을 위협받았고, 집을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을 뿐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의 표적이 된 상태다.

    어른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고작 일주일 사이에 몰아닥쳤으니, 당연히 많이 지쳤겠지.

    게다가 원래는 가족들과 함께 베리튼으로 갔어야 했던 것을, 개인기의 정비중 발생한 갑작스러운 문제로 결항되어 일정을 미루게 되었으니, 혼자 에이레스에 남아 며칠동안 마음고생도 심하게 했을 것이다.

    그 미안함에 오늘 베이비시팅을 해준 보호자가 오면 감사인사와 약간의 성의라도 쥐어주려고 했건만,  급한 사정이 있었는지 아쉽게도 만나질 못했다.

    뭐,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물어서 건네주면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 아이를 내버려두려무나. 그 애가 그렇게 자버린게 일부러는 아닐테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야긴 언제라도 할 수 있지 않겠니?”

    “그건 그렇지만요…….”

    시루드도 루크의 사정은 이해가 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심술을 거두기 어려웠다.

    그래도 시루드가 그동안 루크에게 묻기 위해 마음 속에 삼키고 쌓아둔 궁금증과 물음들은, 루크의 숙면과 함께 여전히 해소할 길 없는 미궁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고 말았으니.

    적어도 할아버지에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는 해명을 해주고 자러가는 것이 그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의 예의가 아닌가?

    아니면, 하다못해 왜 그토록 아끼던 머리를 그렇게 짧게 잘랐는지 따위의 사소한 질문이라도 답해주고 자던지 말이다!

    결국 시루드는 다시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잠들어있는 루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래도, 이 모습의 루크가 자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가.

    지금 이 순간, 시루드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수확이라고 할만한 건 고작 그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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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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