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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99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결정한 바로 다음 날. 나는 바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협조해달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순화된 발언이고 실제로는 쓸모있어질 기회를 주겠다는 수준의 고압적인 망언이었다고 생각한다만 이런 내 어투에 익숙해진 친구들은 따로 사정을 묻지도 않고 언제 가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과거의 루엘님과 같은 모양을 한 인형이 도사리는 곳인가.”

   “영웅님하고 싸우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에 도착한 이들에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해 말해줬더니 아서와 프레이가 눈을 반짝였다.

   

   한 쪽은 침착해보여도 영웅담에 환장한 오타쿠고 다른 한 쪽은 강한 상대라면 아무래도 좋은 바보니까.

   

   음. 역시 두 사람 잘 어울려. 저번에 아서가 부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자기들도 모르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치만. 저. 루시. 루엘님은 당신의 무기 안에 깃들어 계시는 거죠?”

   

   조이의 물음에 고갤 끄덕였다. 지난 번에 할아버지가 내 몸에 깃든 걸 봤다고 했으니 부정해봐야 의미가 없다.

   

   “이제 만나러 가는 건 동정찐따님이 만들어 둔 가짜. 꼰대할배가 혈기넘치던 시절을 재현해 둔 인형이야.”

   

   가짜라 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내가 전력이 아닌 짐덩어리가 되어 버린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지금의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이 스펙의 멤버들이 모였는데 지는 게 말이 안 되지.

   

   “참고로 꼰대할배는 지금도 안 가면 안되겠냐고 비는 중이야.”

   “…왜요?”

   “으음. 얼빵아. 옛날에 한 바보짓이 생각나서 이불 걷어찰 때 있지?”

   “그.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눈을 가만 못 두는 걸 보니까 있구나. 하긴, 얼빵이는 하루에 한 번은 실수하는 사람이니까. 없는 게 이상하긴 해.

   

   “그 바보가 그대로 네 앞에 등장한다고 생각해봐.”

   “재로 만들어버릴 거에요.”

   “그런 거야.”

   

   지금은 어제밤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사정을 이해한 가라드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할아버지를 진압하기 시작했거든.

   

   덕분에 내 내면세계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영웅들간의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 서로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대련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한 전투가 말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관전하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됐지.

   

   팝콘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풍경이었는데.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어설플 뿐 타인이 보기엔 대단한 분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루엘님은 교회에서 성인취급을 받는 전설적인 분이시니까요.”

   

   페이비는 기대가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마 현실은 그녀의 상상과는 다를 것이다. 그 정도였다면 할아버지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할 리가 없잖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루시 알른. 우린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거지? 지난 번과 같은 사막인가?”

   “뇌가 빈곤하시네요. 동정찐따님이 같은 곳에 장난감을 놔뒀을 리 없잖아요?”

   “그럼 어디지?”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잔뜩 있는 곳이요.”

   

   성지. 여태까지 내가 가는 걸 한없이 꺼리던 곳. 본래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몰래 들어갔다가 나올 계획을 했던 곳.

   

   허나 친구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는 계획을 바꿔야 한다.

   

   나 하나의 침입이 들킨다면 루시 알른의 기행이라면서 웃어넘길 수 있지만 우리 전원이 함께 침입했다가 들키면 국가의 문제가 되잖아.

   

   난 1왕비한테 명분을 주고 싶지 않단 말야!

   

   “원래라면 고결한 체하느라 진땀빼는 위선자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겠지만 다행히도 저희한텐 그 쓰레기들이 너무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지금의 페이비는 진정 성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예전이었다면 사정을 모르는 아랫사람들만 좋아하는 정도에서 끝이겠지만 이젠 꽤 위쪽 사람들의 호의까지도 품은 상태거든.

   

   지난번에 함께 왔던 추기경만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조이를 존중하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 단순한 착각은 아닐 거다.

   

   “가능하지. 허접성녀?”

   

   페이비라면 신이 나서 가능하다고 말할거라 생각했지만 기이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뭔데. 설마 이래놓고 내 착각이었다는 결말은 아니지? 카리아한테 물어보질 않아서 정확한 상황은 모른단 말야!

   

   “…여. 영애님.”

   

   우리들의 시선을 받아가면서도 우물쭈물거리던 페이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영애님께서 성지에 오시는 건가요!? 주신의 사도께서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오시는 거군요!?”

   

   그리고서 깨달았다. 페이비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망설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는 걸.

   

   “미리 말씀해주셨다면 영애님을 모실 준비를 했을 텐데! 아뇨.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우선 요한추기경님께 연락을 드려서 최소한의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복은… 흐갸악?!”

   

   평소의 침착함은 어디에 내다 버린 건지 서부극의 말처럼 질주하려는 페이비의 양뺨을 붙잡은 나는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난 거기 있는 노친네들한테 모셔지고 싶지 않거든? 네가 그 쪽 취향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해.”

   “대됴. 대됴하비다!”

   

   아직 교황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딴 짓을 하면 너무 눈에 띄잖아!

   

   안 그래도 1왕비랑 르네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여기서 골칫거리를 더 늘려서 어쩌잔 거야!

   

   내가 성지에 들린단 사실에 신이 난 건 알겠는데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살짝 열이 올라서 페이비의 볼이 부풀 때까지 처벌을 가한 난 푹 한숨을 내쉬고 울상이 된 그녀를 노려봤다.

   

   “냄새나는 노친네들 비위 맞추는 건 네가 해. 난 거기서 아무것도 할 생각 없어.”

   “그렇군요. 교황 성하께서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지금 영애님께서 오신다하시기에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영애님께서 가장 경계하는 건 성하시니까요.”

   “…뭐?”

   

   페이비의 말에 따르면 지난 번 요정의 숲에서 개입한 후 교황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모양이다.

   

   교황으로부터 명령을 전해 들은 전속비서도 있고, 그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페이비도 있기에 큰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교황의 갑작스런 실종에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상황인 듯 하다.

   

   “상황이 그리 좋진 않습니다. 솎아내기가 진행되던 와중에 최종결정권자가 사라져버린 거니까요. 카리아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는 이들도 여럿 있다 하셨습니다.”

   

   아직까진 눈치를 보고 있지만 이 실종이 지속되면 분명 큰 소란으로 이어질거란 페이비의 걱정을 듣던 난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줬다.

   

   상황이 너무 좋아. 하필이면 내가 거기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는데 교황이 자취를 감췄다고?

   

   이 시기에 무언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냐. 그렇다고 교황 수준의 강자가 라샤와 함께하는 데 무언가 곤란을 겪을 리도 없어.

   

   이 실종은 분명 의도적인 거다.

   

   왜지?

   

   나오지 않는 해답에 미간을 찌푸리던 난 새삼 내가 게임에 나오지 않는 상황에 무지하단 걸 느끼며 혀를 찼다.

   

   “출입을 도와드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래뵈도 교회의 성녀이니까요. 다만 정식적인 경로로 들어갈 경우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할 겁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뇨. 3왕자님. 그런 자잘한 건 제 권위로 무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건 성지의 규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지가 만들어질 때부터 철저히 지켜져왔던 규율은 누구도 가벼히 여길 수 없으니까요.”

   

   *

   

   요한 전 주교 현 추기경은 죽어라 일을 하는데도 늘어나기만 하는 업무의 산 앞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니만큼 어느 하나 거절 할 생각은 없다만 이 노구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양이다.

   

   그래서 기쁘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내게 가치가 있다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다만 지금 이 상태로 일을 지속하면 분명 실수가 나올 테니 조금 숨을 돌려야겠어.

   

   그가 주교였던 시절부터 좋아했던 찻잎에 손을 댄 요한이 온도가 오르는 걸 기다리던 그 때 책상 한 쪽에 소중하게 모셔 둔 수정구에서 빛이 났다.

   

   “성녀님?”

   – 요한추기경님. 급한 용무가 있어 연락을 드립니다.

   “말씀하시지요.”

   – 제 친구들과 함께 성지에 방문하려 합니다. 미리 절차를 밟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친우분들이라함은 예의 그 분들입니까?”

   – 그렇습니다.

   

   페이비의 긍정을 들은 요한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나 주신의 사도가 여기에 온다. 주신 교회 역사상 최초로 주신께서 간택한 영웅이 이 곳에 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요한은 지금 당장 거기에 맞는 예법을 준비해야 한단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잠시만요. 요한 추기경님. 이 곳에 오는 건 어디까지나 제 친구이자 알른 가문의 영애인 루시 알른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 알른 영애께서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

   

   현재의 교회가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거란 걸 그 분은 아시니까.

   

   하아. 젠장.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욕지거리가 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군.

   

   1년.

   

   단 1년만 늦게 오셨다면.

   

   최소한 이번 솎아내기가 끝난 후에 찾아와 주셨다면 주신의 사도께 바쳐야 할 예를 모두 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내일 점심 무렵에 찾아오시죠. 그 때까진 모든 걸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교황성하께서 이 곳에 없단 사실이다.

   

   영애께서 극도로 경계하는 그 사람이 있었다면 난 영애를 위해서라도 방문을 만류해야 했을 테니까.

   

   – 저. 요한 주교님.

   “왜 그러십니까?”

   –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을 망설이시는 것으로 보아 개인적인 용무겠군요.”

   –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일단 말씀해주십시오. 타당하다 생각하면 동의하겠습니다.”

   – …그. 제 친구들에게 교회의 복장을 입힐 수 있을까요?

   

   사사로운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개인적인 것일 줄은.

   

   부끄러워하는 조이의 모습에서 그녀의 바람이 무엇일지 어렵잖게 추측한 요한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가벼운 웃음과 함께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적당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두죠.”

   – 가. 감사합니다!

   

   굳이 규율에 얽매여 딱딱한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려 하는 마음이란 걸 주신의 사도께서 절실히 느끼게 해주지 않으셨나.

   

   그러니 손녀처럼 느껴지는 성녀님을 위해 이런 행패를 부려도 무어라 할 사람은 없겠지.

   

   그 분께서 교회의 복장을 입은 걸 내가 보고 싶기도 하고.

   

   새삼 자신이 일년 전과 많이 달라졌단 걸 느낀 요한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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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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