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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누군가가 날 불러세웠다. 붉은 머리카락과 홍색의 눈동자를 한 남학생, 로르웰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

         

       내가 드디어 환각을 보나 싶었다. 아니면 몽유병에 걸렸거나.

         

       아카데미 재학생이 입학도 안 한 나에게 선배라고 부르는 만한 일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나는 나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저보고 한 말씀인가요?”

       “저번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선배.”

       “전 선배가 아닌데요. 여기 다니지도 않고.”

       “새벽부터 화계마도 연구실에서 나오셨잖아요.”

         

       어,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나 스스로를 남에게 소개할 때 ‘하스펠트 교수님의 전속 대학원생입니다’ 라고 말한 적이 왕왕 있었지만, 그건 하스펠트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다른 사람과 통성명을 할 때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대학원생처럼 살고 있지만, 진짜 신분은 노예. 그냥 수학 좀 하고 마도이론에 적용할 줄 아는 고급 노예일 뿐이다.

         

       세간에서 노예 계층을 보는 인식은 좋지 않다. 아카데미 재학생이야 제3의 신분을 가지니 노예에 대한 편견이 적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만사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로르웰이 내 신분을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실제로 대화를 나눠봐야만 아는 일이었다.

         

       원래부터 신분제에 별 신경을 안 쓰는 하스펠트 교수, 그리고 평민에서 귀족이 된 헤를라인 교수. 이 둘을 제외하면 아카데미에서 내 신분을 알고 난 뒤에도 잘 대해주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뒷배경이 있는 마당에, 내 진짜 신분을 이 남학생에게 말한다? 여러 번 볼 사람도 아닌데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딴소리를 했다가 들키면 그것대로 문제인데.

         

       좋아. 이렇게 된 이상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전략으로 간다.

         

       “선배…?”

       “전 선배가 아닙니다. 클라이스 하스펠트 교수님의 전속 조수죠.”

       “조수? 아, 그래서 이곳에서 나오신 거군요.”

       “네. 교수님께서 시간상 하기 어려우신 일을 대신 도맡아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바쁘신 몸이니까요.”

       “그러면 그 사실도 아시겠네요?”

       “네?”

       “사실 제가 하스펠트 선생님의 수업을 듣거든요. ‘기초화염마도’라는 수업인데…. 그, 선생님께서 어제 강의하실 때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셨어요. 평소보다 과제도 더 적게 내주시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거기까진 잘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그러면…. 저, 혹시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로르웰은 품에서 마전지 한 장을 꺼냈다. 마전지에는 상급 화염마도를 새기다 만 흔적이 있었다.

         

       “이거, 오늘 아침 수업까지 해야 하는 과제인데 정말 못 풀겠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

         

       아카데미를 원래 세계의 교육기관과 일대일 대응해서 볼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냐, 대학교냐. 둘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물어봐도 대답하기가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고등학교와 대학교 반반 섞인 것에 사관학교 한 스푼 넣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카데미 학부생은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특히 1학년은 담임이라는 게 정해져 있고, 지정된 교실에서만 이론 수업을 받으니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학부생이 교수를 선생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실제로 그 학생들이 원래 세계의 고등학생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거.

         

       “정말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로르웰의 눈동자가 또랑또랑하게 빛났다.

         

       “지금은 시간이 괜찮으니까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친구들을 데려올게요.”

         

       교수님의 조수라고 분명 말했는데도 나를 튜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심적 나이가 계란 한 판에 가까운 나로서는 그 태도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원래는 마땅히 거절해도 됐을 걸 일부러 도와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선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로르웰은 하스펠트 교수의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즉 하스펠트와 어떤 식으로든 접점이 있는 인물.

         

       나중에 아카데미에 합격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날 변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하스펠트가 나와 완전히 척을 지고 살면 그건 그것대로 힘드니까. 공작의 눈총을 산다니,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거든.

         

       예컨대 기브 엔 테이크라는 소리다.

         

       “조수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번과 같은 조합이다. 남학생 둘에 여학생 둘. 몸가짐을 보니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해가는 모습이 보인다.

         

       와, 이렇게 보니까 인지부조화가 오는데. 난 입학도 안 한 주제에 얘네보다 2년은 먼저 여기서 살았던 거잖아. 이게 말이 되나?

         

       우리는 근처에 마련된 큰 목재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동기와 같이 과제를 하는 모습도 캠퍼스 라이프의 일부겠지. 아, 좋을 때다.

         

       로르웰이 센스 있게 커피를 사 왔다. 그가 텀블러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밀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식물성 알칼로이드로 몸의 피로를 누그러뜨렸다.

         

       아아, 카페인. 내 삶의 빛이여.

         

       “저번 주에 하스펠트 교수님께서 내주신 숙제는 이 스크롤을 완성하는 거였어요. 근데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너무해! 우린 이제 기초 과정을 배우는데 이런 걸 내주시면 어떡하라는 거야?”

         

       그래. 그 마음 잘 안다. 나도 당해봤거든.

         

       수학을 잘 한다고 했나요? 그럼 이 정도 마력식은 구축할 수 있겠군요.

         

       그러면서 다음 날까지 상급 화염식 다섯 개를 완성해오라는 과제를 낸 사람이 하스펠트였다. 이세계 진입 특전으로 받은 불쏘시개 논문이 없었더라면 첫날부터 노예시장에 되팔릴 뻔했어.

         

       “어떻게 풀 방법이 없을까요?”

       “흐음.”

         

       복잡한 마력식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준은 상급 화염마도.

         

       특정한 마법을 구현하는 식은 아니다. 기초적인 폐회로를 완성하는 과정을 묻는 것이었다.

         

       확실히. 1학년에게 내 주는 과제로는 지랄맞기 그지없었다.

         

       나는 회로의 북동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에 어떤 마석을 배치하는 게 좋을까요?”

       “수업에서는 순환부를 증폭해줄 수 있는 소자를 고르는 게 좋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거기에 맞는 마석이 없다는 말이죠?”

         

       네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은 한숨을 푹 내쉬기도 했다.

         

       “개화부 출력을 조정해보긴 했나요?”

        “소용없었어요. 교수님께서 못해도 30 시버트 이상의 출력을 내 오라고 시키셨는데…….”

         

       그 말에 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삼십 시버트?”

       “네.”

         

       지난 3년간 수만 가지 회로를 봐 온 나라면 알 수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재료만으로는 뭔 짓을 해도 그만한 출력을 지닌 스크롤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이렇게 열심히 해 갔는데 정작 수업시간에서 ‘사실 그 문제는 정답이 없어요’ 따위의 소리를 듣는다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허탈해할까.

         

       “오늘 하스펠트 교수님 수업이 언제까지죠?”

       “오전 여덟 시에 있어요.”

         

       못해도 열 시까진 연구실에 안 돌아오시겠군. 원래의 나라면 그때까지 빗자루질을 하고 있어야겠지만.

         

       연구성과를 먼저 알릴 기회였다. 자기가 낸 과제를 학생들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해결해간 걸 본다면 트랜지스터의 쓸모를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하스펠트가 눈썰미 하난 좋으니까.

         

       나는 힙색에서 트랜지스터 열두 개를 꺼내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이게 뭔가요?”

       “마석입니다.”

       “이런 마석은 본 적이 없어요.”

       “최근에 시장에 풀리기 시작한 거니까요. 이렇게 생겼어도 최상급이랍니다.”

       “최, 최상급?”

       “트랜지스터라고 부르는 마석입니다. 트랜지스터는 마력 전도성과 저항을 동시에 가진 물질을 뜻하죠.”

       

       내 말에 학생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소자가 있기는 해요?”

       “사용해보면 알 수 있어요. 이 친구를 잘 써먹으면 마력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할 수 있죠. 물론 회로의 출력을 증폭시키는 것도 가능해요.”

         

       나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려주지는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는 건 대학교육에 알맞지 않은 교수법이다.

         

       적당히 호기심을 유도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 그것이 내 나름의 교육방침이었다.

         

       내가 준 힌트는 딱 두 개. 첫 번째는 트랜지스터의 세 발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류가 흐를 수도,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하면 마력이 아예 끊겨버리네.”

       “어째서…? 난 똑같이 했는데 왜 흐르지?”

       “마석이 좌우 대칭이잖아. 반대 방향으로 꽂아 봐.”

       “아! 그렇구나. 이제 됐다.”

         

       이어서 두 번째. 트랜지스터를 세 개만 사용해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그 이하로 쓰면 30 시버트라는 목표치에 도달할 수 없다. 이걸 정확하게 아는 이유는 오늘 새벽까지 스스로 연구하며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됐다!”

       “나도…!”

       “이렇게 쉬운 거였어?”

         

       네 명 모두 30분이 채 되지 않아 과제를 완성했다. 각자의 마력으로 회로를 작동시키자 목표치 이상의 출력이 나타났다. 테이블에서 자그마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데 완성한 회로가 서로 다르네.”

       “당연하죠. 회로를 구성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니까요.”

         

       내 말에 학생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새내기들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들은 뒤 연구실로 돌아왔다. 하스펠트 교수가 없는 개인 연구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스펠트 교수의 책상이 엉망이었다. 깔끔은 있는 대로 떠는 그 마녀가 자기 연구실을 이따위로 어지르고 나갔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제 뭔 짓거리를 한 거지?

         

       책상에 가득 놓인 서류 더미부터 정리했다. 그러던 와중, 종이 사이로 금칠이 된 편지지 한 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무심결에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

       [친애하는 하스펠트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둘째 아들이 올해 아카데미 입시를 볼 때가 되었네. 자네가 있는 학교 말일세.]

         

       [그런데 말이야, 사전답사를 한답시고 아들내미가 잠행했을 때 자네를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 물론 자네가 곁에 두고 다니는 노예와 함께 말일세. 듣자 하니 아들이 그 노예에 관심을 두게 되어버린 모양이네.]

         

       [쓰잘데기 없는 연심이라도 생긴 건지, 하필이면 첩으로 들이고 싶다는 말이 있더군. 짐도 처음에는 극렬히 반대했지. 고귀한 황실 핏줄이 노예를 아내로 맞이한다니.]

         

       [그래도 고집을 꺾긴 어려워 보이네. 결국 멍청한 아들과 타협을 해 버리고 말았어. 일단 이곳 시종으로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오기로 말이야. 하여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하네.]

         

       [지금으로부터 4개월 뒤에, 금화 3만 장과 맞바꾸는 것은 어떤가? 개국공신 가문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서 그러네. 혹시라도 원하는 게 따로 있다면 들어주겠네.]

         

       [답장은 필요 없네. 편할 때 황성으로 와서 차나 한 잔 들게나.]

         

       [황제, 옐친 필리우트 (인)]

       ####

         

         

       “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2/07/31 : 황실에서 제안한 주인공의 몸값을 상향 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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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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