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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아셀라에게 보험도 들었겠다, 주치의 시험 참가도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그래, 까짓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황실 주치의가 되었을 때의 장점.

     

    보수, 빵빵하지. 연봉이 금화 백 개는 가뿐히 넘는다. 심지어 황가 구성원 담당이다? 이백 개도 볼 수 있다.

     

    5년만 일해도 제도에서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다.

     

    사회적 지위도 상당하다.

    9품계로 나뉜 사회 계급에서 따지면 3품계에 해당한다. 시장과 동급인 수준이다.

     

    황실 안에서도 수석 집사보다도 위다.

     

    ‘내 개인적으로도 달성할 일이 많아.’

     

    지원을 한다는 약속도 받아냈겠다, 의사가 되어 업적을 쌓을 수 있다.

     

    가까이 있는 만큼 아셀라가 발생시킬 배드엔딩을 삭제할 기회도 많아진다.

     

    황실 정치에 관여할 기회도 생긴다.

    우리 가문이 멸문하는 사건을 막기도 좀 더 편해진다.

     

    ‘그 모든 걸 상쇄할 단점이라면.’

     

    아셀라의 얼굴을 매일 아침 봐야 하고,

    아셀라의 얼굴을 매일 점심 봐야 하고,

    아셀라의 얼굴을 매일 저녁 봐야 하는 거.

     

    생각해 보니까 엔딩 리스트 필요 없네.

     

    아셀라를 보면 내가 죽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플래시백 되니까.

     

    살아있는 영상 녹화 수정구 되시겠다.

     

    아직 젖살이 덜 빠져서 얼굴이 동글동글하기도 하고.

     

    됐어. 어차피 방향은 정했고, 하기로 했으면 더 징징댈 필요 없이 하기로 했다.

     

    ‘시험은 시녀장이 감독한다 했으니 준비하긴 해야겠어.’

     

    필기는 이미 진행돼서 한 차례 후보군이 걸러진 모양이다.

     

    남은 건 실기. 나도 필기를 따로 보긴 해야 하겠지만 이건 어차피 껌이고.

     

    최종 후보를 뽑을 중요한 실기 시험은 일주일 후다.

    그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은 마저 이걸 삭제하자.’

     

     

    [No. 003 : 백인의 효수 31%]

     

     

    노란 장미를 황비에게 선물하는 사건에서 아셀라가 영감을 얻는 배드엔딩이다.

     

     

    아셀라는 화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게 좋네.”

     

    아셀라가 화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사박사박 걸어 발코니를 나섰다.

    시녀장이 그녀를 마중하여 이동할 채비를 한다.

     

    “어마마마는 어디 계셔?”

     

    “본관에서 후작님과 회담 중이십니다.”

     

    “만나러 갈래.”

     

    “알겠습니다.”

     

    아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품있게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나는 막스를 돌아보았다.

    혀를 빼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이 가시밭의 유일한 솜사탕이랄까.

     

    “나도 다녀올게, 막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왕, 하고 막스가 대답했다.

     

     

     

    ***

     

     

     

    정원길을 따라 동관에서 중앙관으로.

     

    아셀라의 뒤를 밟는 모양새가 됐다.

     

    귀하신 황녀는 시녀들이 따르고 망나니인 나는 설렁설렁 혼자 걸어간다.

    내가 따라가는 걸 눈치채진 못한 듯했다.

     

    황비는 본관 앞, 잘 정돈된 회담용 앞마당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슬쩍 버드나무에 몸을 숨기고 모습을 지켜본다.

     

    ‘제3 황비 카밀라 폰 뷔르템펠트였지.’

     

    분명 황실에서 그다지 권력이 강한 파벌은 아니었다.

     

    ‘은발. 마녀야.’

     

    황비는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마나를 많이 사용해온 증거로 타고난 머리 색이 모두 빠져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아셀라가 10년 후 가지게 될 바로 그 색깔이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나버린 마녀가 우리 가문의 권력을 업고 싶어했나.’

     

    나와 아셀라의 정략혼이 성립한 건 황비의 의도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아셀라는 조금 떨어진 중앙관 입구에 말없이 다소곳이 서 있다.

    황비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먼저 아셀라를 눈치챘다.

    황비에게 아셀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황비가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셀라를 향해 사박사박 걸어간다.

     

    둘이 자리를 옮긴다. 비밀 회담이라도 가질 기세로 그늘진 위치로 숨어든다.

     

    나는 둘의 대화를 듣기 위해 가까운 버드나무 뒤로 위치를 옮겼다.

     

    “아셀라, 어쩐 일인가요?”

     

    “어마마마께 드릴 선물이 있어요.”

     

    아셀라가 품에 안고 있던 물건을 다소곳이 내밀었다.

     

    내가 만든 노란 장미의 화관이었다.

     

    딸아이가 주는 깜짝 선물이라.

     

    나도 아버지께 저런 걸 주면 점수 좀 따려나? 생각하고 있으니, 황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게 뭔가요?”

     

    “노란 장미, 인데요.”

     

    황비가 화관을 받아든다.

    천천히 빙글 돌리며 살펴본다.

     

    “아셀라.”

     

    “네.”

     

    황비의 목소리는 이제 얼어붙은 수준이 되어, 창처럼 고막을 찔러왔다.

     

    “후작가에서는 기품 있게 얌전히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 같은데.”

     

    황비는 화관의 장미를 주름진 손가락으로 스륵 쓰다듬다가, 뚝.

     

    장미꽃을 줄기에서 떼어내 버렸다.

     

    “겨우 이딴 것 때문에 중요한 회담을 방해했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황비가 날카롭게 아셀라를 쏘아붙였다.

     

    아셀라는 더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일의 경중을 깨닫거라. 겨우 네 주치의를 정하러 내가 이 시골까지 행차한 줄 아느냐? 고트베르크 가문의 협력이 있어야 황실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단 말이야.”

     

    역시 그런 목적으로 혼약을 추진했군.

     

    사교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황실 안에도 여러 파벌이 있다. 귀족은 어디에 줄을 설지 항상 간을 보고 있다.

     

    아버지는 독실한 신자라 정치에는 약한 편이다.

     

    지리적으로도 고트베르크 가의 영지는 제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미래를 본다면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 가문이다.

     

    ‘치유사 명가라서 성녀가 탄생할 확률이 높으니까.’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지만 마왕이 나타난다면 성녀를 소유한 파벌이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황비는 거기에 베팅해서 우리 가문을 눈독들였겠지.

     

    황비는 아셀라를 계속해서 구박해나갔다.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서 그 멍청한 망나니를 꼬실 준비나 해. 쌍으로 멍청하니 어울리긴 하겠어. 이 혼약은 절대 깨져선 안 돼. 몸이라도 써서 그 망나니를 잡아둬라.”

     

    방금 저 아줌마가 나한테 멍청하다고 했어?

     

    “안 그러면 네 목도 언젠가 이렇게 몸에서 똑 떨어질 거란다.”

     

    황비가 떼어냈던 노란 장미꽃을 아셀라의 눈앞에 들이민다.

     

    그녀가 마법을 썼다.

    독 속성이었던 모양이다. 장미꽃이 순식간에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내렸으니까.

     

    순식간에 시뻘겋게 흘러내린 장미꽃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아셀라는 인형인 양 무표정을 유지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비가 화관을 손에서 놓았다.

    아셀라가 심혈을 기울여 골라온 장미꽃은 바닥에 떨어지며 찌그러진다.

     

    황비가 몸을 틀어 아셀라를 떠나간다.

     

    아셀라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화관을 집어 들었다.

     

    글씨가 빨갛게 점등하며 확률이 올라간다.

     

     

    [No. 003 : 백인의 효수 31% → 77%]

     

     

    나도 모르게 이마를 탁 치게 된다.

     

    ‘일의 경중을 모르는 게 누구야.’

     

    확률이 두 배가 넘게 올라가잖아.

     

    아니, 내가 더 빨리 개입을 안 해서 올랐다는 뜻인가.

     

    이게 내 잘못이야?

     

    ‘가지가지 하네.’

     

    뭐, 나를 멍청이라고 부른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멍청이라고 부른 건 못 참아.’

     

     

    아셀라를 향해 걸어나간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내가 여기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못된 잘못을 들킨 아이 같은 태도다.

     

    나는 아셀라에게서 화관을 뺏어 들었다.

    솟아오르는 혈관을 억제하며 예를 담아 황비를 불렀다.

     

    “존안을 뵙습니다, 황비님.”

     

    황비가 나를 돌아본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한다.

     

    나를 본 그녀의 표정이 잠시 흠칫했다가, 곧 싱그럽게 풀어진다.

     

    “어머, 고트베르크 공자님. 미처 계신 줄 몰랐군요.”

     

    “하하, 멀리서도 황비님의 기품은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더군요. 버선발로 달려 나온 무례를 용서해주시죠.”

     

    “무슨 말씀을요. 덕분에….”

     

    “그런데.”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감히 그런 무례를 당할 줄은 몰랐는지 황비의 얼굴이 굳었다.

     

    이 정도로 충격받으면 섭하지. 지금부터 시작인데.

     

    “황비님께서 저희 가문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신 모양입니다.”

     

    “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화관 말입니다만.”

     

    내가 노란 장미의 화관을 그녀에게 슥 내밀었다.

     

    “노란 장미는 저희 가문의 초대 가주께서 직접 교배하시어 지금까지 재배를 이어오고 있는, 고트베르크 가의 특산품입니다.”

     

    당연히 구라다.

    초대 가주가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음, 그렇군요. 미처 몰랐어요.”

     

    황비의 얼굴에 슬며시 당혹감이 드리웠다.

     

    “그리고 이 화관은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황녀님께 부탁드려 황비님께 조공 드릴 헌상품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랬군요.”

     

    황비는 변명할 건덕지가 없다.

     

    아셀라가 이게 내 헌상품이었다는 말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혼약자의 흠이니 감점.

     

    그렇다고 헌상품을 받지 않을 의도였다고 하면 우리 가문에게 더더욱 결례가 되는 행위다.

     

    물론 후작가는 황실보다 아래다.

     

    하지만 아셀라라면 몰라도 황비는 황제의 눈 밖에 난 몸이라 우리 가문이 필요하다.

     

    그녀는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런데, 행여 후작가의 자제가 황실이 기분 나쁘다고 난장판을 피우기라도 한다면?

     

    회담이고 혼약이고 나발이고 물 건너가는 거야.

     

    상대가 황가여도 충분히 가능하지.

     

    나는 소문이 자자한 개망나니거든.

     

    “…공자님.”

     

    진퇴양난이다.

     

    황비는 이게 내가 판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눈매가 매섭게 변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미움을 사고 있다.

     

    근데 난 네가 하나도 안 무서워.

     

    넌 날 못 죽이겠지만 아셀라는 실제로 죽이거든.

     

    네가 뭘 어쩔 건데 이 아줌마야.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교착상태가 끝나질 않지.

     

    내가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헌상품을 받아주신다면 가주님께는 이야기가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알겠어요.”

     

    황비가 천천히 내게서 화관을 전달받았다.

     

    코가 끊임없이 씰룩이는 게 어지간히 열 받은 모양이다.

     

    좀 웃기네.

     

    “…그냥 망나니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주제에 정치질은.”

     

    그녀가 스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 이거 참.”

     

    무슨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꼭 한마디를 덧붙이는지.

     

    얌전히 받아갔으면 잘 끝났잖아.

    내가 도발을 무시할 성인은 아니라서.

     

    “이런, 한 송이가 떨어졌군요.”

     

    나는 품속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아까 위험해서 정장에 넣어놨던, 아직 가시가 정리되지 않은 한 송이였다.

     

    “마저 받아가시죠.”

     

    화관을 들어 부자유스러운 황비의 손.

     

    그곳에 장미를 끼워 넣는다.

     

    “아얏…!”

     

    황비의 얼굴이 고통으로 찌그러졌다.

    괜찮다. 피는 안 나게 잘 찔렀다.

     

    입술이 떨어졌다 말았다 하는 모습이 욕을 목까지 냈다가 삼키는 모양이었다.

     

    그런다고 지가 뭘 어쩌겠어.

     

    결국 황비는 이를 갈며 돌아갔다.

     

    ‘휴. 어디 보자.’

     

    시스템창을 확인한다.

     

     

    [No. 003 : 백인의 효수 77% → 0%]

    [변동됨]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됐다.’

     

    속으로 쾌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참수형 당하는 미래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아주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야. 이거지, 이거.

     

    해방감을 즐기는데 별안간, 등 뒤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공자.”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에 아셀라의 얼굴이 있길래 깜짝 놀랐다.

     

    무심코 뒷걸음질을 쳐서 떨어진다.

    역시 적응이 안 돼.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데 아셀라가 쿵쿵대며 내게 다가왔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공자, 궁금한 게 있는데.”

     

    “예, 황녀님.”

     

    “너, 이름이 뭐야?”

     

    아직도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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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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