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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길드의 초보 모험가 지원용 가죽 갑옷 세트는 10실버. 손목 석궁의 감정가는 22실버였다.

       

       바네사의 아량 덕에 2실버 깎아도 30실버의 빚이 늘은 셈….

       

       이 돈이었으면 30연챠를 돌릴 수 있는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30실버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가장 저렴한 갑옷이랑 보조 무기 하나 맞추고 끝이라니.”

       

       길드를 나와 미궁 입구로 향하는 내내 투덜대고 있자니, 리디아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미궁도시에서 파는 장비는….”

       

       “특수하다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

       

       먼 과거. 이곳 판 대륙은 신들의 통치하에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신들은 신도를 아끼고, 신도는 신을 경외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이상향에 가까운 세상.

       

       하지만 이는 아쉽게도 1,000년 전에 끝을 맞이했다.

       

       멸신전쟁. 그 광기의 불꽃이 판 대륙 전체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에는 신도들끼리의 작은 분쟁에서 시작됐을 터인 싸움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신들이 직접 나서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당연히 가장 고통받는 것은 신화의 전쟁에 끼인 필멸자들이었다.

       

       처음으로 신을 부정하는 자들이 나온 것도 이때이며, 영원한 지배자인 줄 알았던 신이 가장 많이 죽은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글로는 차마 담지 못할 정도의 학살도, 신의 부재로 인한 혼란도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졌다.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일검에 산맥을 베어내고, 운석을 떨어뜨려 바다를 증발시키며, 절대적 명제인 줄 알았던 죽음이 그 의미를 잃은 전장.

       

       하나하나가 천지를 뒤집어 놓는 초월자들의 권능에 세상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빛의 신의 발악으로 태양이 지지 않는 날이 계속됐다. 거대한 해일이 나라 하나를 집어삼켰으며, 거짓이 정의의 거죽을 뒤집어쓴 탓에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이 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반쯤 부서지고서야 신들은 깨달았다. 머지않아 이 땅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거라는 걸.

       

       이러니저러니 해도 판 대륙과 필멸자들을 위해 힘 써온 신들이다. 전쟁을 멈추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문제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지만.

       

       너무 많은 신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간신히 신격만 유지하고 있을 뿐인 상황.

       

       유일하게 멀쩡한 신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로부터 사랑받았기에 차마 전쟁에 끼어들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공격받지도 않은 사랑의 여신 하나뿐이었다.

       

       남은 신들의 힘만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을 복구할 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랑의 여신. 그녀를 제외한 전원이 스스로의 존재를 희생하기로.

       

       그들은 세상에 흩어진 전쟁의 흔적을 하나씩 떠안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스러졌다.

       

       하나의 신이 잠들 때마다 하나의 재앙이 사라진다. 그 위에 또 다른 신의 시체가 겹쳐지고 재앙이 하나 더 모습을 감춘다.

       

       이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사랑의 여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취를 감춘 것과 동시에 판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선 마법의 신과 기사의 신을 따르는 신도들에게만 전해지던 권능. 마법과 오러가 세상에 널리 퍼졌다.

       

       누구나 재능만 있다면 마법사나 기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생명의 신의 유해는 회수조차 못 할 정도로 갈가리 찢겨 흩뿌려진 탓에 종족이 다른 부부도 자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광기의 신이 남긴 최후의 저주에 저항하지 못한 종족은 몬스터로 영락했으며, 대지의 신이나 불의 신 등. 원소 계열 신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에서는 정령이 태어났다.

       

       이 세계가 남녀역전 세계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정욕의 신과 순결의 신이 공멸하며 정조관념과 남녀의 성욕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평화를 되찾은 판 대륙이었으나,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으니.

       

       대륙의 중앙.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신들의 무덤이자, 수많은 재앙과 과거의 영광이 한데 뭉친 묘비.

       

       대미궁 판그레이브가 바로 그러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광야에 던져진 이들은 생각했다. 일단 미궁에서 뭔가 쓸만한 걸 찾아오자고.

       

       유일하게 지상에 남은 사랑의 여신은 그 용감한 자들을 돕기로 했다.

       

       사랑의 여신의 교단은 길드를 창립했고, 모험가를 자칭하는 자가 등장했으며, 이 모든 것에 힘입어 백지로 되돌아간 문명이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겨우 1,000년 만에 중세 수준까지 다시금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미궁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만 미궁이 그렇게 상냥한 곳은 아니다. 최초의 미궁은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시공간이 꼬인 것은 물론, 초입에서 괴물같이 강력한 적이 나오는가 하면 심부에서 하급 몬스터가 나오는 등. 난이도도 제멋대로였거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사랑의 여신이 오랜 시간 자신의 힘을 쏟아부어 미궁의 구조를 개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낮은 층계에서는 약한 몬스터가 나오고, 깊은 층계에서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식으로 알기 쉬운 밸런스 패치가 이루어졌지만….

       

       딱 하나. 시공의 뒤틀림만큼은 절반밖에 교정하지 못했다.

       

       초기 미궁처럼 잠깐 던전에 들어왔더니 밖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있었다거나, 반대로 며칠 만에 나왔을 뿐인데 노인이 되었다거나 하는 일은 사라졌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생물에 한한 일. 장비나 식량 같은 무생물이 순식간에 못 써먹게 되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둘. 하나는 고정 마법을 걸어 미궁의 뒤틀림에 저항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애초부터 미궁에 속한 것을 재사용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미궁도시에서 파는 장비는 하나같이 비쌀 수밖에 없다.

       

       미궁에서 구한 재료로 만든 물건이거나, 고오급 인력인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물건일 테니까.

       

       “맞죠?”

       

       “응. 자세하네. 혹시 요나는 신전 출신?”

       

       “신전 출신은 아니에요. 가끔 신전에서 배급하는 빵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죠.”

       

       “…아.”

       

       그제야 내 배경을 떠올렸는지 어색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너무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흔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기세를 타서 하룻밤 만에 완성한 설정을 읊었을 뿐이니까.

       

       시무룩해진 리디아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리디아 님. 모험가와 짐꾼의 관계라는 건 기사와 종자의 관계 같지 않나요?”

       

       “…종자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냐.”

       

       “에이. 저도 그동안 본 게 있잖아요. 수발을 든다는 점에서는 대충 비슷한 것 같은데…아닌가요?”

       

       “비슷하지만 달라. 종자는 돈을 받지 않아. 그저 존경과 신의만으로 기사를 따를 뿐. 기사도 마찬가지. 책임감을 갖고 종자를….”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눈을 반짝이는 리디아. 그녀가 중얼중얼 기사란 무엇인지, 종자는 어떻게 기사를 모셔야 하는지에 관한 일장 연설을 펼친다.

       

       이대로라면 이야기가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네. 적당히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나.

       

       “아아~ 안 들려요 안 들려!”

       

       귀를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어이없어하는 리디아.

       

       “요나. 어린애?”

       

       “어린애 맞는데요?”

       

       “그럼 어른 말 잘 들어.”

       

       “제가 다른 어른은 몰라도 리디아 님 말은 잘 들을 준비가 됐는데, 방금 건 좀 심했어요.” 

       

       “…하아.”

       

       손을 풀고 다시 옆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리디아.

       

       “어쨌건 이제 미궁. 요나는 긴장 안 돼?”

       

       “긴장할 필요가 있나요? 저는 짐꾼이고 싸우는 건 리디아인데?”

       

       “……?”

       

       멍하니 눈을 끔뻑인 리디아였으나, 이내 아차!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한동안 요나가 어디까지 싸우나 확인해 볼 생각. 난 안 나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인데요?”

       

       “방금 말했으니까.”

       

       “나설 생각 없다는 건 저 혼자 싸워야 한다는 뜻이고요?”

       

       “위험하면 도와줄게.”

       

       “혹시나 해서 묻는데 몇 층에 갈 생각인가요? 1층이죠? 1층 맞죠?!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진정해. 우선 1층부터 차근차근 내려갈 생각. 사냥한 몬스터의 마석은 전부 요나 거고.”

       

       “그건 고마워요! 근데 테스트는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저 그냥 짐꾼인 줄 알고 무기 같은 건 안 챙겼단 말이에요!”

       

       “유감. 조금 전 지나친 길드 대장간에서 고르지 그랬어.”

       

       “그땐 제가 싸울 거라는 걸 몰랐잖아요?!”

       

       “미궁에 가는데 무기 하나 없어? 요나 바보야?”

       

       “서, 석궁도 좋은 무기거든요?”

       

       “한 발 쏠 때마다 장전 필수. 휴대성과 의외성 덕에 보조 무기로서는 훌륭하지만…주 무기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아.”

       

       “크흑….”

       

       여기서 비겁하게 정론을 펼치다니!

       

       아니, 근데 이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나? 리디아가 정말 내게서 돈 받아먹을 생각으로 미궁에 데려가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애초에 수지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잖나.

       

       만약 돈만이 목적이었다면 나도 뒷골목 한 바퀴 돌아 슬쩍한 돈으로 갚거나, 엘리한데 일일 배 방구 자유이용권 같은 걸 팔아서 갚았을 테니까.

       

       하지만 리디아는 내게 기회를 주려고 했다.

       

       미궁에 대한 경험을 쌓고, 짐꾼으로서나마 미궁을 드나들며 힘을 쌓게 하여 장래에 범죄자가 아닌 모험가라는 선택지도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지금 리디아가 보여주는 호의는 너무 과한 것 같지만.

       

       아예 뒤를 봐줄 테니까 안심하고 싸워보라고? 이건 중견 이상의 클랜에서 신참 모험가를 키우는 거랑 비슷한 느낌 아닌가.

       

       아무리 고결한 리디아라도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막 퍼줄 리 없다.

       

       “…역시 제 몸이 목적이신가요 리디아 님?”

       

       “아냐. 엘리 선배가 알면 오열하니까 착각 멈춰.”

       

       리디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하아…정말 이유가 궁금해?”

       

       “네!”

       

       “엘리 선배에게는 비밀. 약속할 수 있어?”

       

       “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엘리에게 비밀로 하는 조건인 거죠? 괜찮네요. 저 입이 무거운 남자니 안심하세요!”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리디아가 작게 속삭였다.

       

       “엘리 선배가 정식으로 의뢰했어. 요나를 가르쳐 달라고. 그러니까 짐꾼으로 삼는 건 가르친 다음.”

       

       “에, 엘리이이이이이이이!!!!”

       

       돌아가면 공짜로 배 만지게 해줘야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 잘못자서 어깨가 아픈 거시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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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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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의 초보 모험가 지원용 가죽 갑옷 세트는 10실버. 손목 석궁의 감정가는 22실버였다.


       


       바네사의 아량 덕에 2실버 깎아도 30실버의 빚이 늘은 셈….


       


       이 돈이었으면 30연챠를 돌릴 수 있는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30실버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가장 저렴한 갑옷이랑 보조 무기 하나 맞추고 끝이라니.”


       


       길드를 나와 미궁 입구로 향하는 내내 투덜대고 있자니, 리디아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미궁도시에서 파는 장비는….”


       


       “특수하다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


       


       먼 과거. 이곳 판 대륙은 신들의 통치하에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신들은 신도를 아끼고, 신도는 신을 경외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이상향에 가까운 세상.


       


       하지만 이는 아쉽게도 1,000년 전에 끝을 맞이했다.


       


       멸신전쟁. 그 광기의 불꽃이 판 대륙 전체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에는 신도들끼리의 작은 분쟁에서 시작됐을 터인 싸움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신들이 직접 나서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당연히 가장 고통받는 것은 신화의 전쟁에 끼인 필멸자들이었다.


       


       처음으로 신을 부정하는 자들이 나온 것도 이때이며, 영원한 지배자인 줄 알았던 신이 가장 많이 죽은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글로는 차마 담지 못할 정도의 학살도, 신의 부재로 인한 혼란도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졌다.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일검에 산맥을 베어내고, 운석을 떨어뜨려 바다를 증발시키며, 절대적 명제인 줄 알았던 죽음이 그 의미를 잃은 전장.


       


       하나하나가 천지를 뒤집어 놓는 초월자들의 권능에 세상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빛의 신의 발악으로 태양이 지지 않는 날이 계속됐다. 거대한 해일이 나라 하나를 집어삼켰으며, 거짓이 정의의 거죽을 뒤집어쓴 탓에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이 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반쯤 부서지고서야 신들은 깨달았다. 머지않아 이 땅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거라는 걸.


       


       이러니저러니 해도 판 대륙과 필멸자들을 위해 힘 써온 신들이다. 전쟁을 멈추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문제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지만.


       


       너무 많은 신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간신히 신격만 유지하고 있을 뿐인 상황.


       


       유일하게 멀쩡한 신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로부터 사랑받았기에 차마 전쟁에 끼어들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공격받지도 않은 사랑의 여신 하나뿐이었다.


       


       남은 신들의 힘만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을 복구할 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랑의 여신. 그녀를 제외한 전원이 스스로의 존재를 희생하기로.


       


       그들은 세상에 흩어진 전쟁의 흔적을 하나씩 떠안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스러졌다.


       


       하나의 신이 잠들 때마다 하나의 재앙이 사라진다. 그 위에 또 다른 신의 시체가 겹쳐지고 재앙이 하나 더 모습을 감춘다.


       


       이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사랑의 여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취를 감춘 것과 동시에 판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선 마법의 신과 기사의 신을 따르는 신도들에게만 전해지던 권능. 마법과 오러가 세상에 널리 퍼졌다.


       


       누구나 재능만 있다면 마법사나 기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생명의 신의 유해는 회수조차 못 할 정도로 갈가리 찢겨 흩뿌려진 탓에 종족이 다른 부부도 자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광기의 신이 남긴 최후의 저주에 저항하지 못한 종족은 몬스터로 영락했으며, 대지의 신이나 불의 신 등. 원소 계열 신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에서는 정령이 태어났다.


       


       이 세계가 남녀역전 세계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정욕의 신과 순결의 신이 공멸하며 정조관념과 남녀의 성욕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평화를 되찾은 판 대륙이었으나,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으니.


       


       대륙의 중앙.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신들의 무덤이자, 수많은 재앙과 과거의 영광이 한데 뭉친 묘비.


       


       대미궁 판그레이브가 바로 그러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광야에 던져진 이들은 생각했다. 일단 미궁에서 뭔가 쓸만한 걸 찾아오자고.


       


       유일하게 지상에 남은 사랑의 여신은 그 용감한 자들을 돕기로 했다.


       


       사랑의 여신의 교단은 길드를 창립했고, 모험가를 자칭하는 자가 등장했으며, 이 모든 것에 힘입어 백지로 되돌아간 문명이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겨우 1,000년 만에 중세 수준까지 다시금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미궁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만 미궁이 그렇게 상냥한 곳은 아니다. 최초의 미궁은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시공간이 꼬인 것은 물론, 초입에서 괴물같이 강력한 적이 나오는가 하면 심부에서 하급 몬스터가 나오는 등. 난이도도 제멋대로였거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사랑의 여신이 오랜 시간 자신의 힘을 쏟아부어 미궁의 구조를 개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낮은 층계에서는 약한 몬스터가 나오고, 깊은 층계에서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식으로 알기 쉬운 밸런스 패치가 이루어졌지만….


       


       딱 하나. 시공의 뒤틀림만큼은 절반밖에 교정하지 못했다.


       


       초기 미궁처럼 잠깐 던전에 들어왔더니 밖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있었다거나, 반대로 며칠 만에 나왔을 뿐인데 노인이 되었다거나 하는 일은 사라졌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생물에 한한 일. 장비나 식량 같은 무생물이 순식간에 못 써먹게 되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둘. 하나는 고정 마법을 걸어 미궁의 뒤틀림에 저항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애초부터 미궁에 속한 것을 재사용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미궁도시에서 파는 장비는 하나같이 비쌀 수밖에 없다.


       


       미궁에서 구한 재료로 만든 물건이거나, 고오급 인력인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물건일 테니까.


       


       “맞죠?”


       


       “응. 자세하네. 혹시 요나는 신전 출신?”


       


       “신전 출신은 아니에요. 가끔 신전에서 배급하는 빵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죠.”


       


       “…아.”


       


       그제야 내 배경을 떠올렸는지 어색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너무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흔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기세를 타서 하룻밤 만에 완성한 설정을 읊었을 뿐이니까.


       


       시무룩해진 리디아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리디아 님. 모험가와 짐꾼의 관계라는 건 기사와 종자의 관계 같지 않나요?”


       


       “…종자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냐.”


       


       “에이. 저도 그동안 본 게 있잖아요. 수발을 든다는 점에서는 대충 비슷한 것 같은데…아닌가요?”


       


       “비슷하지만 달라. 종자는 돈을 받지 않아. 그저 존경과 신의만으로 기사를 따를 뿐. 기사도 마찬가지. 책임감을 갖고 종자를….”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눈을 반짝이는 리디아. 그녀가 중얼중얼 기사란 무엇인지, 종자는 어떻게 기사를 모셔야 하는지에 관한 일장 연설을 펼친다.


       


       이대로라면 이야기가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네. 적당히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나.


       


       “아아~ 안 들려요 안 들려!”


       


       귀를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어이없어하는 리디아.


       


       “요나. 어린애?”


       


       “어린애 맞는데요?”


       


       “그럼 어른 말 잘 들어.”


       


       “제가 다른 어른은 몰라도 리디아 님 말은 잘 들을 준비가 됐는데, 방금 건 좀 심했어요.” 


       


       “…하아.”


       


       손을 풀고 다시 옆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리디아.


       


       “어쨌건 이제 미궁. 요나는 긴장 안 돼?”


       


       “긴장할 필요가 있나요? 저는 짐꾼이고 싸우는 건 리디아인데?”


       


       “……?”


       


       멍하니 눈을 끔뻑인 리디아였으나, 이내 아차!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한동안 요나가 어디까지 싸우나 확인해 볼 생각. 난 안 나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인데요?”


       


       “방금 말했으니까.”


       


       “나설 생각 없다는 건 저 혼자 싸워야 한다는 뜻이고요?”


       


       “위험하면 도와줄게.”


       


       “혹시나 해서 묻는데 몇 층에 갈 생각인가요? 1층이죠? 1층 맞죠?!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진정해. 우선 1층부터 차근차근 내려갈 생각. 사냥한 몬스터의 마석은 전부 요나 거고.”


       


       “그건 고마워요! 근데 테스트는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저 그냥 짐꾼인 줄 알고 무기 같은 건 안 챙겼단 말이에요!”


       


       “유감. 조금 전 지나친 길드 대장간에서 고르지 그랬어.”


       


       “그땐 제가 싸울 거라는 걸 몰랐잖아요?!”


       


       “미궁에 가는데 무기 하나 없어? 요나 바보야?”


       


       “서, 석궁도 좋은 무기거든요?”


       


       “한 발 쏠 때마다 장전 필수. 휴대성과 의외성 덕에 보조 무기로서는 훌륭하지만…주 무기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아.”


       


       “크흑….”


       


       여기서 비겁하게 정론을 펼치다니!


       


       아니, 근데 이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나? 리디아가 정말 내게서 돈 받아먹을 생각으로 미궁에 데려가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애초에 수지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잖나.


       


       만약 돈만이 목적이었다면 나도 뒷골목 한 바퀴 돌아 슬쩍한 돈으로 갚거나, 엘리한데 일일 배 방구 자유이용권 같은 걸 팔아서 갚았을 테니까.


       


       하지만 리디아는 내게 기회를 주려고 했다.


       


       미궁에 대한 경험을 쌓고, 짐꾼으로서나마 미궁을 드나들며 힘을 쌓게 하여 장래에 범죄자가 아닌 모험가라는 선택지도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지금 리디아가 보여주는 호의는 너무 과한 것 같지만.


       


       아예 뒤를 봐줄 테니까 안심하고 싸워보라고? 이건 중견 이상의 클랜에서 신참 모험가를 키우는 거랑 비슷한 느낌 아닌가.


       


       아무리 고결한 리디아라도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막 퍼줄 리 없다.


       


       “…역시 제 몸이 목적이신가요 리디아 님?”


       


       “아냐. 엘리 선배가 알면 오열하니까 착각 멈춰.”


       


       리디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하아…정말 이유가 궁금해?”


       


       “네!”


       


       “엘리 선배에게는 비밀. 약속할 수 있어?”


       


       “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엘리에게 비밀로 하는 조건인 거죠? 괜찮네요. 저 입이 무거운 남자니 안심하세요!”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리디아가 작게 속삭였다.


       


       “엘리 선배가 정식으로 의뢰했어. 요나를 가르쳐 달라고. 그러니까 짐꾼으로 삼는 건 가르친 다음.”


       


       “에, 엘리이이이이이이이!!!!”


       


       돌아가면 공짜로 배 만지게 해줘야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 잘못자서 어깨가 아픈 거시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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