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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본청의 이 층에 별도의 교수실이 마련되었다. 문에는 ‘전투수석교수 디안’이라는 명패가.

       

       내가 배정된 교수실은 작고 아담했다. 내 전임자가 사표 던지고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의자와 책상 등 가구가 그대로 있어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

       

        각종 문구류는 모두 아카데미에서 지급해 주기로 했고 문제는 저 책장과 선반인데….

       

       교수실 벽 한쪽에 서있는 텅 빈 책장과 선반이 영 거슬린다. 그렇다고 꽂아둘 책이나 전시할 것들이 없으니 좀 곤란하단 말이지.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디안 님! 여기 교수가 되신 것은 확실하죠?”

       

       내 부름을 받고 온 올리시아가 가방에 담아온 것들을 꺼내며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올리시아가 가져온 것은 브룬스웰에서부터 사용하던 찻잔세트 주전자, 그리고 군것질거리들.

       

       “응당 교수라면 여기에 뭐 책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진짜 시험 봐서 들어온 사람도 아니고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가르치는 것들도 이론이 아니라 실전경험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사무실에 엉뚱한 것들을 잔뜩 쌓아두면 높으신 분께서 불편해 하실 텐데요.”

       “그럼 관두지 뭐.”

       

       그러자 올리시아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는 그 촌동네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생각해 보니 올리시아는 늘 브룬스웰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브룬스웰이 싫다기 보다는 좀 더 발전한 도시로 가고 싶어 했지.

       

       저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술취한 무식한 선원과 비린내 풍기는 바닷바람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상점가와 말쑥한 귀족가 자제들을 더 좋아할 때니까.

       

       “아무튼 디안 님께서는 꼭 여기 붙어 계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시라고요.”

       “그래그래. 알았다. 그런 김에 차나 한 잔 타주라. 회의 들어가야 돼.”

       “여기서 마시고 가세요. 신참교수가 찻잔 들고 회의 참석한다고 건방지다 욕 먹지 마시고.”

       “뭐 어때. 회의 때 차 마시는 게 큰 잘못도 아니고.”

       

       올리시아가 타준 찻잔을 들고 복도를 걸어 회의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많은 시선들이 내게 쏠렸다. 다양한 성별과 종족으로 구성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다. 어디 보자. 드워프는 당연히 있고 오크도 있네. 말이 좀 통하는 수준이려나.

       

       “문을 막고 뭐하는 거지?”

       

       뒤를 돌아보니 다크엘프 키르린 교장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 찻잔은 뭐고? 고맙지만 사양하지. 나는 아침에는 주로….”

       “예? 이거요? 저 마실 건데요?”

       

       차를 한 모금 호로록하자 키르린 교장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당장 비켜.”

       

       나를 지나치는 교장을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자리가 어디냐. 저기인가. 교장 옆이군.

       

       “앉지 마라. 안 그래도 소개를 할 참이었으니까.”

       

       막 의자에 앉으려는데 교장이 제지하기에 엉거주춤 다시 일어났다. 손에는 찻잔을 든 채였다.

       

       “모두 주목. 저자는 새로 부임한 전투수석교수 디안이다.”

       

        교수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낮게 웅성였다.

       

       “우리 아카데미 커리큘럼에 적합한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로 오늘부터 한가족이 되었으니 잘 지내기 바란다. 이상.”

       

       교장의 말이 끝나자 교수들이 박수를 쳤고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간단하게 인삿말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일정입니다.”

       

       막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첫인사에 쓰려고 농담도 몇 가지 준비했는데.

       

       “반갑습니다, 수석교수님. 저는 전투학과 침투교수 리나라고 합니다.”

       

       머쓱하게 자리에 앉자 옆자리의 교수가 상체를 기울이며 작게 소곤소곤 인사했다. 짧은 단발머리에 발랄한 인상의 여자였다.

       

       “반가워, 리나 교관.”

       “제가 좋은 팁 하나 드릴게요. 오늘은 종합전투교수님하고 절대 사석에서 마주치지 마세요.”

       

       리나 교수가 눈짓하는 곳은 테이블의 반대편. 거기에 완고한 인상의 아저씨가 앉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전투학과 최고참이신데요. 회의중에 뭔가 마시고 먹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세요.”

       “참고해 둘게. 그래도 이건 아까우니까 마시는 편이 낫겠어.”

       

       손에 쥐고 있는 찻잔을 빠르게 몇 모금 홀짝이자 뭐가 그리 웃긴지 리나 교수가 입을 가리고 킥킥댔고 종합전투교수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회의 순서는 오늘 기상, 일정, 아카데미생 상태, 기타 특이사항 등의 평범한 것.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안전성 평가’였다.

       

       안전성 평가는 쉽게 말해서 실시하는 교육훈련 중 예상되는 위험요소들을 사전에 식별해 조치하는 절차인데 그 과정이 너무도 빡세서 깜짝 놀랐다.

       

       항목만 해도 거의 오십 개가 넘는 데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교장이 직접 조정에 나서는 게 아닌가?

       

       “거기 그 부분은 학생들의 발목부상이 예상되니 평지에서의 실습으로 대체해.”

       “지금 초봄이니 바닷물이 많이 차가울 텐데, 잠수훈련은 저체온증이 예상되니 다음 분기로 연기해.”

       “교육 전 체조시간을 조금 더 늘리는 게 어떻겠어. 그래야 부상 위험을 줄일 수 있을 듯한데.”

       

       이렇게 교장이 난도질을 하고 나니 원래 계획되어 있던 교육훈련의 절반이 날아갔다. 뭐냐, 이건.

       

       “원래 이렇게 하나…?”

       “그, 교장님께서… 애들 다치고 사고나는 거에 엄청 민감하셔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리나 교수를 본 나는 단박에 상황을 깨달았다. 키르린 교장이 쫓겨날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이러는 것이었군?

       

       현생의 군대에서도 사고 하나 터지면 애꿎은 지휘관들 줄줄이 모가지 날아가는 일이 다반사. 가뜩이나 2황녀가 어떻게든 갈아치우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인지라 키르린은 아주 조금의 잡음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데…. 불안하다, 이거.

       

       

       # # # # #

       

       

       회의가 끝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종합전투훈련장.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큰 교육장인 동시에 곧 배출을 앞둔 학생들이 있는 곳이다.

       

       전투학과의 교육훈련 전반에 대해 알아야 하는 전투수석교수의 첫 방문지로 적절한 장소지. 지금 내 앞에서 걸어가는 종합전투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회의중에 취식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수석교수님.”

       

       왕년에 한가닥 했을 법한 넓은 어깨에 굵은 목, 그리고 흰수염을 길게 땋은 난 종합전투교수는 생긴 것과 달리 의외로 뒤끝이 상당히 긴 인간이었다. 차 한 잔 마신 게 대체 뭐가 문제라고.

       

       “다음부터는 자제해 주십시오.”

       “아침에 차 마시는 게 습관이라서. 노력은 해볼게.”

       

       그러자 종합전투교수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먹을 만큼 먹었어. 그리고 수석교수면 일반교수보다 상급자 아닌가? 하대하는 게 뭐가 문제가 되지?”

       “먹을 만큼 먹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자네의 그 수염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손가락으로 종합전투교수의 흰수염을 가리켰다.

       

       “회의중에 차 마시는 건 못 넘어가도 명색이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사람이 수염을 그리 기르는 건 큰 문제삼지 않는 모양이지?”

       “이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아마 수석교수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잘 알다마다. 장거리순찰대 출신이라 자랑하는 거 아니야.”

       

       군단 장거리순찰대는 몇 달씩 적진 깊숙히 침투해 활동하기 때문에 수염을 제때 깎지 못해 저렇게 땋고 다니는데 그게 지금은 전통으로 굳어졌다. 웃기는 전통이다.

       

       “얼마나 오래 복무했고 또 어느 전장에서 활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우위에 서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이 나이에 수석교수 달고 있는 거 보면 답 나오지 않아?”

       

       종합전투교수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해졌지만 그렇다고 뭐라 반박할 말은 찾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인데 너무 몰아붙이기는 좀 그래서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회의중에는 어지간하면 뭐 안 먹도록 노력을 하겠어. 그러니 기분 풀자고. 매사 너무 빡빡하게 굴면 나중에 큰 병 걸려.”

       “…알겠습니다.”

       

       

       # # # # #

       

       

       도착한 종합전투훈련장은 아카데미 안에 있는 야산의 와지선. 여기 아래서부터 야산 꼭대기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 제한시간 내에 산 꼭대기의 깃발에 도달해하는 게 훈련코스.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경로상에 수십 개의 각종 장애물들이 늘어서 있어 이것을 극복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출발선의 통제탑에 올라가 아카데미생들이 코스를 실습하는 것을 모두 지켜봤다. 약 서른 명 가량의 아카데미생들이 각자 다른 속도로 정상을 향해 개미처럼 나아갔다.

       

       그런데 어째 다들 행동이 굉장히 굼뜬 것이 영 이상하다. 게다가 장애물 중 몇 군데는 우회로가 있거나 판자 등을 다리처럼 깔아둔 것이 아닌가?

       

       “퓽! 퓽! 퓽!”

       

       심지어 엄폐물 뒤에서 활을 쏴 적을 제압하는 구간에서는 화살을 먹이지 않은 활을 쏘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이거 대체?!

       

       “교수. 뭐야, 이거? 왜 훈련을 대충해?”

       “교장님의 지시로 위험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안전하게 실시중입니다.”

       

       내막을 들어보니 부상 위험이 높은 장애물은 아예 생략하고 활을 쏘는 것도 행여나 오발이 날까 봐 화살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이건 손을 좀 봐야겠네. 이런 식이면 배출한 아카데미생의 수준이 낮아지고 그러면 감찰대와 첩보부 등에서 백 프로 컴플레인이 들어오겠지.

       

       그 컴플레인을 확인한 2황녀는 옳다됐다 하고 교장의 모가지를 자르려고 나설 것이고 교장의 모가지가 날아가면 그 공석에 끌려 올라가는 건 내가 될 게 뻔하다.

       

       만약 내가 가지 않으면 이제 막 아기를 돌보기 시작한 라이너스를 다시 불러오겠다 협박하겠지. 그렇게는 절대 안 된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데.

       

       “여기 아카데미에 마법사 있지?”

       “있기는 합니다만…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마법사를 불러 와. 지금부터 여기는 내가 직접 통제한다.”

       

       

       # # # # #

       

       

       쿠르릉, 쿠르릉.

       

       서류들 사이에 파묻혀 업무를 보던 키르린은 갑작스러운 폭음과 진동에 깜짝 놀라 창가로 달려갔다. 저기 종합전투훈련장이 있는 야산 중턱에서 장대한 흙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왜 저러지? 오늘 실시하는 교육훈련 중에 이런 소란이 일어날 요소는 모두 제거했는데?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새로운 흙구름이 발생하자 키르린은 문득 아까 디안이 종합전투훈련을 참관하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설마…?!

       

       키르린은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도 아까워 창문을 열고 이 층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착지한 키르린은 곧바로 땅을 뒤흔드는 폭발을 연달아 일으키는 종합훈련장으로 내달렸다.

       

       “헉?!”

       

       훈련장에 도착한 키르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지금 훈련장에는 수십 명의 아카데미생들이 죽어라 달려 산을 오르는 중. 마치 고지쟁탈전에 임하는 현역 군단병의 모습이다.

       

       그런 아카데미생들의 후방으로 번쩍이는 빛줄기가 마구 내리꽂히며 폭발했다.

       

       그 빛줄기의 근원은 출발선의 통제탑. 통제탑 위에 아카데미 소속의 마법사가 신나게 공격마법을 쏘아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번에는 저쪽으로! 계속 밀어붙여!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수석교수 디안이 기다란 나뭇가지를 마구 휘두르며 사격지휘를 하고 있었다.

       

       “훈련의 땀 한 방울이 실전의 피 한 바가지다! 계속 퍼부어!”

       “으아아아악! 이 미친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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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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