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0

       “이야, 굉장하네.”

       

       차원문을 통과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차원문의 출구는 이브로니크 성이 위치한 호시리아 협곡의 아래쪽 평지.

       

       지금 호시리아 협곡은 과거의 참상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온전히 협곡의 절경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치솟은 양쪽의 절벽 표면 날카로운 바위와 우둘투둘한 돌출부 투성이.

       

       그 사이를 타고 내려오는 작은 폭포들이 만들어낸 물안개 사이로 햇빛에 반사된 무지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폭포를 타고 모인 맑은 시냇물이 협곡 사이를 졸졸 흘렀고 그 주변에 알록달록한 야생화가 만개해 향기를 은은하게 퍼뜨렸다.

       

       당시에는 절벽을 기어오르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도 볼 수 있었다.

       

       바글바글 몰려 있는 사람들과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수직 승강기.

       

       격렬한 전투와 완전히 무너져 버린 협곡의 벽은 이끼가 뒤덮힌 완만한 돌무더기가 되었고 그 앞에는 기념품 가게와 카페로 보이는 상가들이 즙리하게 늘어서 있었다.

       

       관광지가 되었다더니 진짜였네.

       

       그 모든 것을 절벽 위의 이브로니크 성이 고고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낯설어도 저 이브로니크 성만큼은 10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절벽을 연장해 쌓은 성벽과 여기저기 숨겨진 총안구와 함정들. 협곡 전체를 사거리에 둘 수 있는 첨탑이 불쑥불쑥 솟아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다만 그때 하늘을 뒤덮은 와이번들과 성벽과 절벽을 타고 흐르는 피는 이제 찾을 수 없다.

       

       “다들 올라갑시다!”

       

       드워프가 기증했다는 대형 승강기는 한번에 열 명이 탑승하는데 이게 절벽을 따라 총 다섯 개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 이브로니크 성 관리과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우리는 승강기 하나를 통째로 빌려 차례로 학생들을 위로 올려보냈다.

       

       “교수님?! 왜 승강기를 타나요?!”

       

       그때 갑자기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을 지나 나이틀리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럼 기어서 올라가냐?”

       

       “전적지 답사잖아요!”

       

       “뭔 소리야? 편하게 갈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해?”

       

       “이, 이게 아니었는데…!”

       

       절망하는 나이틀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개소리야, 지금?

       

       “그런데 너 손 다쳤냐?”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을 가리키자 나이틀리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기를 올라가라 시킬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나이틀리가 가리킨 것은 방금 내가 본 라이너스의 침투로.

       

       “저길? 미쳤냐? 저기를 어떻게 올라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 녀석.

       

       “됐어. 빨리 승강기에 타.”

       

       나이틀리를 밀어넣고 나도 타자 승강기가 덜컹대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그때 저기서 키르린이 번개처럼 뛰어와 아슬아슬하게 승강기에 올라탔다.

       

       “교장님. 위험하게 왜 그러세요. 학생들한테 모범을 보여야지.”

       

       “헤헷, 미안해. 나도 여기는 처음이라 들떠서.”

       

       키르린미 멋쩍게 웃으며 귀엣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데 좀 좁네. 이왕 만들 거면 크게 만들지.”

       

       그러면서 키르린이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미안…. 좁아서 어쩔 수 없어….”

       

       평소 입는 흰색 터틀넥 아래 가슴의 감촉이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하아, 이 다크엘프가 진짜….

       

       교장이라는 작자가 도대체 학생들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그러나 학생들은 다행히도 키르린의 어설픈 추태에는 관심도 없었다.

       

       “와아아.”

       

       승강기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학생들이 감탄했고 나이틀리도 방금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아휴, 좁아…. 미안미안….”

       

       그 와중에 키르린은 공간이 있는데도 거의 나랑 융합될 기세로 달라붙는다.

       

       “에쿠… 닿아 버렸네…. 조금만 참아…. 왜 이렇게 여긴 좁지, 미안해….”

       

       키르린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사과하고 변명하면서 부비적부비적.

       

       “아이고…. 교장님…. 거기는 손 대지 마세요….”

       

       “미안….”

       

       실수인 척하던 키르린이 황급하게 손을 뒤로 뺐다.

       

       지금 키르린의 꼬락서니를 보니 역시 셀린느는 셀린느다. 10년이 지나도 그 날카로운 감은 죽지를 않았네.

       

       

       # # # # #

       

       

       빠르게 올라간 승강기는 이브로니크 성 바로 앞의 협소한 평지에 멈춰섰다.

       

       이곳은 과거 마왕군이 방어를 위해 뿌린 독기와 지뢰지대가 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과 가이드, 잡상인 등으로 인산인해 시장통이 되어 있었다.

       

       “너무 빨리 올라오네….”

       

       승강기에서 내린 키르린이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특임 아카데미 학생들은 이쪽으로!”

       

       오렌디가 허공에 아카데미 문양을 마법으로 그리며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거기로 가니 이스메라 교수가 오만상을 찡그린 채 손으로 입과 코를 동시에 틀어막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독기 같은 건 없다고 하셨잖아요.”

       

       “넝우 사앙이 망아서 숭웅 시이 종 공앙하웅용.”

       

       농담을 던지자 이스메라가 억지로 눈웃음을 지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사람들 체취가 불결하다 이거지. 순혈엘프답네.

       

       “안녕하십니까! 특임 아카데미 졸업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모든 학생과 교수들이 다 올라오자 성 관리과의 가이드가 깃발을 흔들며 우리를 안내했다.

       

       평지를 가로질러 성으로 들어가며 가이드는 성에 얽힌 역사적 상식들을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제국 북쪽에는 국경을 따라 좌우로 길게 늘어선 호시아 산맥이 있다.

       

       인간이 감히 극복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지형의 호시아 산맥은 전통적으로 제국의 천연장벽.

       

       제국에 속하기를 거부한 호전적인 소왕국과 부족연맹을 막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제국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깊은 산골짜기에는 온갖 마물과 수배를 피해 도망친 범죄자 등이 득실거려 미치지 않고서야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호시아 산맥을 넘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 호시아 산맥에는 유일하게 사람이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호시리아 협곡.

       

       바로 이브로니크 성이 위치한 곳이다.

       

       미친듯이 들쭉날쭉 솟아난 산맥이 거짓말처럼 절단되어 좌우 폭 약 백여 미터의 매우 좁은 통로를 형성.

       

       오직 이곳을 통해서만 호시아 산맥을 안전하게 넘을 수 있기에 예로부터 제국의 핵심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이 협곡에 말도 안 되는 공사를 감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브로니크 성 축성.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르는 절벽을 높이 20미터의 벽으로 틀어막는 것으로 모자라 제국은 절벽 중턱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 보며 방어할 수 있는 성을 짓기 시작했다.

       

       북부의 적들의 온갖 방해와 현장사고 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국은 50년만에 이브로니크 성을 완공.

       

       이후 수백 년 간 제국을 지키는 완고한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약 10년 전 마왕군이 준동하며 모두 역사속 이야기가 되어 버렸죠.”

       

       와이번 기수라는 전대미문의 병종을 막을 수단이 이브로니크 성에는 전무했다.

       

       그렇게 마왕군에게 빼앗긴 이브로니크 성은 역으로 제국을 포위하며 마왕군의 후방을 막아주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에 제국은 이브로니크 성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애초에 공략이 거의 불가능한 위치에 지어진 성.

       

       거기다 마왕군이 쓰는 독기와 지뢰 때문에 제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며 서로 피를 피로 씻는 공성전을 장기간 이어갔다.

       

       결국 황성에서 대륙의 영웅 라이너스를 투입하면서 이 좁은 협곡에서의 지옥도는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당시 라이너스 경께서는 독기와 지뢰지대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완벽히 대담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의 침투를 계획하게 되는데요.”

       

       가이드가 깃발로 성의 아래쪽 절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바로 대륙의 영웅 라이너스 경이 홀로 절벽을 기어올라 철옹성 이브로니크 성문을 연 침투로입니다.”

       

       저쪽 성벽에서 절벽을 지나 까마득한 지면까지 일정 간격을 두고 노란색 표시가 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와, 설마 라이너스랑 내가 기어오른 경로를 그대로 표시해 놨을 줄이야.

       

       그나저나 이제 보니 진짜 높다. 저기를 기어오를 생각을 했다니, 정말 새삼 미친 짓이었네.

       

       “우욱!”

       

       그때 내 옆에 서있던 펠레미아가 입을 틀어 막으며 토할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

       

       “너 괜찮냐? 고소공포증이 있어?”

       

       “아니, 아닙니다…. 웁!”

       

       “저기 마야 사제한테 가서 봐달라고 해.”

       

       펠레미아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뒤쪽의 마야 사제에게로 비틀비틀 달려갔다.

       

       “펠레미아 교수님,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저번 술집에서부터 계속 저러시네.”

       

       리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펠레미아를 돌아봤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지 뭐.”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게 있어.”

       

       내가 펠레미아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여기 이브로니크 성 탈환전 당시의 기억.

       

       아마 지금까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절벽 가장가리로 가서 나와 라이너스가 기어 올라온 침투로를 내려다 봤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에 저 절벽에는 피와 시체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내 귀에는 그때 하늘을 날아다니던 병사들의 비명이 남아 있다.

       

       

       # # # # #

       

       

       라이너스와 디안이 이브로니크 성 탈환임무를 받고 막 도착한 호시리아 협곡.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을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빽빽하게 날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이브로니크 성 위쪽으로 차원문을 열고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왕군의 조치.

       

       때문에 지금 인간연합군은 협곡의 아래쪽에서 성으로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설마 맨몸으로 싸우는 건가? 투석기 같은 것도 없이?”

       

       디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석기들이 휘익- 성 위로 돌을 날려보내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상승한 돌들은 이윽고 성벽을 강하게 때리며 토마토마냥 터졌다.

       

       그것을 본 디안은 의문을 품었다.

       

       ‘깨지는 게 아니라 터진다고? 새로운 신형탄환인가?’

       

       “저, 저건!?”

       

       디안보다 눈이 좋은 라이너스가 먼저 그것이 뭔지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장 멈춰!!”

       

       노성을 지르며 라이너스가 무작정 전투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디안과 라이너스가 달리는 가운데 또 한번 투석기들이 성을 향해 돌을 쏘아 올렸다.

       

       “Uwaaaaaaaak!!”

       

       그제서야 디안은 그게 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손발이 꽁꽁 묶인 마족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날아가 성과 절벽에 부딪혔다.

       

       그에 대응하듯 성벽 너머에서 무언가 이쪽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졌다.

       

       디안 바로 옆에 인간 병사가 추락해 터졌다.

       

       

       

       

       

       

    다음화 보기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