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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01

   교황과의 대화를 끝마친 라자로 전 추기경 현 교황대리는 긴 한숨과 함께 허리를 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건지는 모르겠다만 아직 교회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시군.

   

   그 분과 함께 성지에 머문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번해만큼 교황의 외출이 잦은 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교황이라는 지위는 주신 교회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인물이다.

   

   성녀라는 직책이 만들어지며 그 의미가 조금 나누어졌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스코트에 불과하니 완벽하게 교황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교회에는 반드시 교황의 자리를 지닌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 때문에 대륙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주신 교회의 교황은 직위에 오른 내내 휴식이란 단어를 잊고 살아야 한다.

   

   실제로 과거의 교황 중에서는 과로로 사망한 이들이 여럿 존재할 지경이니 업무의 과중함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현재의 교황은 이번 년도가 되기 전까지 역사상 그 어떤 교황보다도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아래에 있는 자들이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빌빌대는 와중에도 교황은 쉼없이 일을 해왔다.

   

   이런 과정이 몇 년이 지나니 어느새 현 교황은 교회에서 너무나도 큰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내가 성하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어찌저찌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만 이것이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능력의 차원이 달라. 성하께서는 슬쩍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해결할 일을 난 몇 십 분 동안 부여잡고 있어야 하니 나로써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사람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

   

   안 그래도 몇 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솎아내기 탓에 교회 내부의 인력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녀님이 기적에 가까운 일을 벌여주신 덕에 인력의 분산이 더 심해졌다.

   

   그 분을 무어라 할 생각은 없다.

   

   주신께 미움받아야 할 태생을 지닌 채 주신의 간택을 받은 것만으로 존경스러운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발을 내딛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어찌 원망을 할까.

   

   하아. 빌어먹을. 이십년 정도만 더 젊었어도 이렇게 투정을 부리진 않았을 터인데.

   

   “교황대리님.”

   

   비서의 목소리를 따라 고갤 든 라자로는 그가 품 안에 지닌 서류더미를 보고 미간에 힘을 더했다.

   

   “그건 또 뭐지?”

   “현재 재판을 기다리는 이들의 탄원서입니다. 지위 있는 이들의 것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정도 양인가.”

   

   절로 한탄이 새어 나오는 군. 긴 세월 이어진 주신 교회의 부패가 저만큼 커다랗다는 이야기니까.

   

   어찌 어둠의 악신마저도 무너져내렸거늘 교회에 자리한 어둠은 뽑아도 뽑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리고 오늘 성녀님과 그 친우분들이 성지에 오셨습니다.”

   “요정의 숲 토벌에서 공을 세우신 분들인가.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긴 한다만.”

   “의향을 전해드릴까요?”

   “됐다. 노친네가 그분들 시간을 뺏어서 무얼 하겠는가. 애시당초 그럴 시간도 없어.”

   “체사레 추기경께서는 이미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체사레 추기경이?”

   

   뭣 같은 영감탱이. 또 무슨 생각이냐.

   

   제 발로 단두대에 목을 올려도 모자랄 쓰레기가 왜 새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을 건드리냔 말이다.

   

   명분이고 뭐고 들이박을까 생각을 하던 라자로는 길게 숨을 내쉬고 펜을 집어 들었다.

   

   “다른 소식은?”

   “예술 교단의 세력이 옛 어둠의 추종자들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는 새로운 어둠의 원조를 받은 것으로…”

   

   *

   

   페이비와 함께 성지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던 건 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성지의 특이한 신성도 아닌 현재의 페이비가 지닌 명성이었다.

   

   “성녀님! 여긴 어쩐 일로…”

   “자리가 없으시다면 여기 앉아서…”

   “폐가 아니라면 저희를 위한 기도를…”

   “성녀님…!”

   “성녀님…!”

   

   허접주신이 성지에 내려온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열광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페이비가 성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페이비가 인기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아카데미에 있을 무렵에도 페이비가 지나가면 황송해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는걸.

   

   그치만 나는 페이비의 친구고, 페이비의 고결한 모습만큼이나 허술하고 바보 같은 모습도 자주 봐 온 사람이란 말이지.

   

   내 옆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페이비의 모습만보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성녀의 위엄을 보이는 페이비를 보고 있자면 뭔가 어색해.

   

   “그.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계속 시간이 지체되네요.”

   

   성지의 신도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돌아온 페이비는 사과의 말을 전했지만 정작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분명 페이비 때문에 시간이 끌린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받은 게 많기도 한 걸.

   

   ‘페이비도 힘들겠네요.’

   

   숭배받는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은 아니다.

   

   다른 이를 숭배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 사람이 나와 다르다 여겨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숭배하는 자와 숭배받는 자는 결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없다. 성지에 있는 한 페이비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끝에 외톨이가 된다.

   

   <너 대신 고난을 감수하고 있는 아이다. 아껴주거라.>

   ‘말하지 않으셔도 아끼고 있거든요.’

   <에이. 이걸로는 부족하지. 좀 더 통 크게 서비스를 해주라고.>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 군.>

   ‘저기요! 두 분! 나불대지말고 계속 싸우시죠!?’

   

   갑자기 싸우다 말고 의기투합한 두사람에게 성질을 낸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이죠. 여기선 뭐 해주고 싶어도 못 한다고요.’

   

   성지에 머무는 이들이 우리를 존중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페이비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내가 페이비한테 허접성녀라고 부르면서 매도를 해 봐!

   

   나무에 매달려서 구워지지 않겠어!?

   

   주신 교회의 성지에서 주신의 사도가 화형당하는 촌극은 좀 그렇잖아!

   

   너무 과한 상상 아니냐고?

   

   마냥 그렇지만도 않을 걸? 주신 교회의 사람들이 날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페이비가 우리 옆에 없을 때면 심심찮게 적의 어린 시선들이 날아든다.

   

   다른 친구들 때문은 아니다.

   

   오롯이 나 때문이다.

   

   처음에는 루시가 예전에 벌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주교 얼굴에 발길질하고 신상까지 부순 꼬맹이가 루시인 걸. 충분히 싫어할 만한 조건이잖아.

   

   근데 조이랑 아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그건 별 상관도 없더라.

   

   ‘주신 교회의 신자들이 루시를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상황이 그렇거든요.’

   ‘성녀님과 친한데다 고결한 신성을 품고 있고 주신의 인도로 전설적인 성기사의 무기까지 거머쥔 게 너다만, 정작 주신 교회의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답하기가 애매해. 예술교단과 함께 한 일이 어디 한 두 개여야지.’

   

   주신의 사도라는 입장을 아는 내 친구들이야 내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주신의 사람이란 걸 의심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저들이 보기에 나란 인간은 주신께 많은 걸 받아놓고 예술교단에 투신한 쓰레기인 것이다.

   

   그런 꼬맹이가 뻔뻔하게 성지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저들 입장에서 얼마나 고깝겠는가.

   

   상황을 이해한 나는 그냥 저들의 적의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자면 누구마냥 마조가 된 건 아냐. 그냥 생각을 다르게 하다보니 좀 재밌어졌을 뿐.

   

   생각해봐. 쟤네들이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성녀님은 내가 손을 잡아주기만 해도 얼굴이 벌게지는 부끄럼쟁이고, 쟤네가 신앙하는 주신님은 나한테 매도 당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페도변태새끼잖아.

   

   일종의 NTR을 한 셈이라고!

   

   메스가키 금태양이라니. 이건 또 무슨 끔찍한 혼종이란 말인가.

   

   ‘우효~ 초 귀여운 성녀님하고 초 역겨운 주신님 게또다제~’ 같은 대사를 떠올리고 있자니 적의고 나발이고 웃음을 참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즐거운 성지견학을 끝마친 날의 밤.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이 곳에서 숙박을 하기로 한 우리는 밤중에 몰래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성지 내부를 돌아다니는 인원이 여럿 있었지만 그건 우리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면 우리한텐 어둠의 권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거든!

   

   어둠의 악신이 다루던 이 권능은 주신의 사도인 나와 성녀인 페이비조차 간파할 수 없을 정도야!

   

   근데 반푼이 성직자들 따위가 우리를 알아볼 수 있겠냐!

   

   한 밤중에 숙소에서 빠져나온 것은 물론이고 페이비가 있는 곳에도 가뿐히 침입한 우리들은 순조롭게 목표로 하던 장소로 향했다.

   

   “어둠의 권능을 이용해 성지 내부를 돌아다닌다니. 단어만 늘어놓으면 이단자가 따로 없군.”

   “시끄러워요! 왕자님!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렸단 말이에요!”

   “…두 분. 성녀라는 직위를 가지고서 암행을 하는 제 입장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건. 어.”

   “미안해요. 페이비.”

   “참 같잖은 걸로 고민하네. 쓰레기들이 정해놓은 규칙 같은 거 알 바야? 그딴 것보다 내 목소리가 더 가치 있잖아?”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주신의 사도가 범행에 동참하고 있는 이상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냐?

   

   이런 의문을 담아서 목소리를 냈지만 친구들의 미묘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건가보다.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성지 내부를 돌아다니던 우리는 달이 하늘의 가운데에 도달했을 즈음 목표로 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여긴… 참회실이네요.”

   

   성직자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발을 움직인 나는 방 끝에 있는 신상에 손을 가져다댔다.

   

   거창한 무언가는 필요치 않았다.

   

   던전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기 위한 조건은 어디까지나 ‘주신의 신성을 불어넣을 것’이니까.

   

   신상에 신성을 불어넣기 무섭게 나타난 문을 확인한 나는 따라오란 말을 하고서 훌쩍 던전으로 뛰어들었다.

   

   ‘…어라?’

   

   그리고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난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던전의 지하에서는 결코 느껴져선 안 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흐아! 이젠 어둠의 권능을 거둬도 되는 거죠?!”

   “두 번 하고 싶은 일은 아니군.”

   “맞아. 너무 쉬워서 재미 없었… 어라? 피냄새?”

   “…영애님. 이건.”

   

   절로 토악질이 나오는 죽음의 냄새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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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o님! 응원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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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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