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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02

   슬슬 이 세상에 발을 들인 지 언 2년이 지나가는지라 몇몇 부분이 흐릿해지고 있는 나이다만 그래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던전에 대한 것은 그 중 하나다.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은 그 장소를 마주한 순간 모든 걸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루엘의 인형이 기다리고 있는 이 던전에 피비린내가 날 리 없다. 고결하며 깐깐한 성기사가 도사리는 던전에 어찌 악취가 풍기겠는가.

   

   아악. 젠장. 진짜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네. 무기 하나 제대로 못 휘두르는 상황에서 변수라니.

   

   “…어찌된 일일까요.”

   “뭐긴 뭐야. 다른 허접이 먼저 여길 발견했단 거지.”

   

   이 곳에 들어오는 조건은 ‘주신의 신성을 품을 것’이 아니라 ‘주신의 신성을 불어넣을 것’이다.

   

   전자는 나와 페이비이외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후자라면 얼마든 방법이 존재한다.

   

   당장 아르테아 가문의 창고에만 쳐들어가도 입장권을 수도 없이 구할 수 있을 걸.

   

   그러니 우연찮게 누군가 이 장소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특히 이 곳이 성직자로 가득한 성지라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문제는 다른 쪽이다. 성기사 루엘을 흉내낸 인형은 지금의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까탈스러운 인간이다.

   

   자신의 거처가 엉망이 되는 걸 보고 있을리 없다.

   

   누군가 이 곳에서 무언가 일을 벌였다면 루엘은 분명 침입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였겠지.

   

   헌데도 막지 못했다. 지하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왜? 침입자가 루엘의 인형을 쓰러트렸기 때문에.

   

   “일단 물러서는 게 어떤가. 이제 이 곳은 적지다. 비밀을 파고 들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아서의 의견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추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긴 이상 한 번 물러서는 편이 좋다. 우리의 전력이 꽤 강한 축이라 한들 교회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머리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그걸 입 바깥으로 낼 순 없었다.

   

   “그…렇겠죠.”

   

   옳다 말하면서도 두 손을 가슴켠에 끌어모은 채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페이비를 보고 있자면 도저히 돌아가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능왕자님. 겁 먹은 건가요? 앞으로 나가기 무서워서 다리가 벌벌 떨려요?”

   “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할 뿐.”

   “그게 쫄았다는 거랑 뭐가 다른 건지 난 모르겠는데에요오.”

   

   아마도 페이비는 지하에서 과거를 보고 있을 거다. 자신이 성녀로 만들어지던 때의 기억을.

   

   잊고 있었던 과거를 두 눈으로 마주하고 극복하는 데 성공한 그녀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 날의 악몽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

   

   “못 이길 것 같으니까 도망칠거면 칼은 왜 들고 다니신대? 맨손으로 다니는 게 더 허접 같아서 동정심을 유발하기 좋을 텐데.”

   “영애님.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일단.”

   “시끄러. 허접성녀.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만류하려는 페이비의 입을 다소 강압적으로 틀어막는다.

   

   모두 다 널 위한 것도 아냐. 페이비.

   

   이딴 허접들한테 처발린 할아버지를 놀려줄 기회이기도 하거든.

   

   지금도 내 안에선 가라드의 호쾌한 웃음과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뒤섞이고 있다고.

   

   진상을 보게 되면 얼마나 더 재밌어질지 기대가 돼.

   

   “정말 괜찮겠느냐. 우린 그렇다쳐도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 넌 만약의 사태에 위험할 거다.”

   “푸하핳! 무능왕자님이 절 걱정하시는 건가요!? 지금도 왕자님같은 허접은 한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거든요?”

   “…손 모양새가 왜 그런가.”

   “왜요? 제가 뭐 이상한 거 했나요?”

   

   메이스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을 뿐인데 왜 헛기침을 하는 건지 몰라.

   

   아무튼 아서의 동의는 구했겠다 다른 두 사람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프레이는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안절부절하고 있었고 조이는 이미 자신의 주변에 몇 개의 마법진을 띄워놓은 상태였다.

   

   “이 안에서 뭐가 기다리고 있건 간에 요정의 숲보다 위험하진 않잖아요?”

   “그야 당연하지. 여기 있는 녀석들은 쓰레기라는 단어면 충분한 잔챙이들이야.”

   “그럼 무슨 상관인가요. 오히려 잘 됐죠. 에르기누스님께 배운 걸 써볼 기회가 생긴 셈이니.”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며 어깨를 피는 조이의 모습은 믿음직…스럽지는 못했고 솔직히 불안했다.

   

   저렇게 자신만만할수록 더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저지를 것 같으니까. 여태까지의 전적이 그렇잖아.

   

   “뭔가요. 그 눈은! 여기까지 오면서 제가 얼마나 마법을 잘 다루는 지 보셨잖아요! 믿어주세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먼저 찔려서 난리람.”

   “눈으로! 눈으로 말하셨잖아요!”

   “뭐래. 하여간 정말 이런 얼빵이가 어떻게 공작영애인건지 궁금하다니까.”

   “으아앙!”

   

   조이를 희생양삼아서 무거운 공기를 덜어낸 나는 다시금 페이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이비는 가만 날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서 고갤 끄덕였다. 눈가가 살짝 붉어진 걸 보면 눈물이 나오려는 모양이다.

   

   “다들 알겠지만 나 지금 연약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내리는 명령에 집중해. 너네들의 바보짓을 지켜줄 방패는 없어.”

   

   이게 게임이라면 지금 내 친구들 스펙만으로도 최종보스를 가지고 놀 수 있다만 여긴 현실이고 게임의 논리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니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여기에서 만날 적은 주신교회의 성직자라고 봐야겠지.

   

   구체적으로는 아마도 심문관 계열.

   

   그 놈들이 이 곳을 거처로 삼았다면 여러 함정을 만들어뒀을 거다.

   

   나오는 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 소수는 순순히 쓰러져주지 않을 거다.

   

   우리를 인지한 순간부터 유격전을 걸면서 자신들이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내려 하겠지.

   

   상대의 스펙은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음.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이네.

   

   “가자. 허접들.”

   

   지하 복도에 발을 내딛은 나는 내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복도에 자리한 함정은 분명 심문관의 방식이었다.

   

   “바보검사. 준비해.”

   “응!”

   

   

   갈림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모르는 체 하며 함정에 손을 댄 순간 적이 움직였다.

   

   우리가 함정에 빠질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것일 테지.

   

   “꺄아!?”

   

   그러니 저를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비명을 질러준다. 높고 선명한 내 목소리가 복도를 채우고 저 너머에서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하핳!♡ 기대했어?♡”

   

   단도를 던질 준비를 하던 그가 멍하니 내 웃음을 바라보는 동안 바람을 두른 프레이가 순식간에 남자 앞에 도달한다.

   

   뒤늦게 자신의 위기를 눈치챈 남자가 고갤 돌리지만 그 때는 이미 프레이의 검이 그 목에 닿은 뒤였다.

   

   “…끅!?”

   

   죽음의 감각에 굳어버린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밧줄에 쉬이 걸려들었다.

   

   속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남자였지만 저 밧줄은 신을 저버린 심문관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어찌 인간의 힘으로 부서지겠는가.

   

   으음. 너무 쉬운데?

   

   아무리 내 도발에 걸렸다지만 아예 반응조차 못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이딴게 교회의 심문관?

   

   고갤 갸웃거리며 남자 쪽으로 다가간 나는 발버둥치는 그의 고간을 몇 번 걷어차서 거품을 물게 만들었다.

   

   “…그. 제압한 건 좋다만 심문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나?”

   “머리가 어떻게 된 녀석들이라 말이 안 통할 걸요. 지금도 봐요. 너무 좋아서 거품을 물고 있잖아요. 이런 어마어마한 마조쓰레기한테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절대 좋아서 기절한 건 아닌 것 같다만.”

   “영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보를 기대하긴 어려울 겁니다. 심문관은 고문에 대응하는 법도 익히니까요.”

   “아. 과연 그렇군요. 하긴 심문관이 심문 당할 때를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죠.”

   

   고갤 주억거리는 아서를 지나 어둠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 때 사람이었던 것의 뼈와 살이 보였다. 살 위에 남은 흔적은 분명 이빨자국.

   

   …식인? 사람을 먹었어?

   

   <방금 전에 포박한 녀석. 하루 이틀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완전 기아상태잖아.>

   <거기에 더해 쓰러진 옷 아래에 새겨진 상처를 봐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놓아준거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 녀석들은 사냥하는 쪽이 아니라 사냥당하는 쪽이라는 거지.>

   

   사냥당하고 있었다고? 심문관들이?

   

   누구한테. 라는 물음은 필요치 않았다. 이 지하가 본래 누구의 영역이었는지 떠올린다면 금방 답이 나오니까.

   

   <하하핳. 다른 의미로 재밌어졌네. 성기사 루엘의 타락인가.>

   <에르기누스 그 놈. 인형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건가. 과거의 나라면 다소 잔혹하게 제압할 수는 있어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진 않는다.>

   

   …이런 종류의 변수는 예상 못했는데.

   

   아. 젠장.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역사확인을 이용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테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역사확인은 소모가 심한 편이거든. 지금 그걸 썼다간 내용을 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걸.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달라질 건 없어. 처음으로 돌아온 것 뿐이야. 그렇다면 물러설 이유는 없지.

   

   “…죽은 이에게 안식이 있기를.”

   

   페이비가 사자를 위한 기도를 끝마친 걸 확인한 나는 다시금 던전공략을 위해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서 우리가 보게 된 광경은 잔혹하다는 말의 체현이었다.

   

   산 자를 위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은 시체. 비명을 내지르던 자의 얼굴 가죽. 썩어가는 고깃덩이. 공포에 벌벌 떨다 우리에게 제압당하는 심문관들. 여기저기 늘어진 오물과 검은 피.

   

   나와 페이비는 지하의 불온함이 무구한 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지옥은 무구하지 않은 자의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금술사인가? 그 놈의 던전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나는 군.”

   “…거긴 정말 끔찍했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음 한 걸음 지옥을 나아가던 도중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모르게 방패를 쥐고서 몸을 움직이려 했다. 허나 나의 움직임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 옆을 스치듯 달려간 프레이가 자신의 검으로 메이스를 튕겨냈으니까.

   

   “왔다. 오싹오싹한 적.”

   

   상대는 대답하는 대신 한 번 더 자신의 메이스를 휘둘렀다.

   

   프레아가 뒤로 물러남에 따라 바닥에 내리 꽂힌 메이스는 자그마한 지진마저 일으킬 만큼 위협적이었다.

   

   “허접들. 준비해.”

   

   망가져버린 성기사 루엘의 인형이 우릴 죽이기 위해 다가온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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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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