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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06

   짧은 잠에서 깨어난 교황은 주변에 늘어서 있는 여러 이들의 시체를 본 후 라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다 처리했나? 한 때 교회의 정예라 불렸던 자들이다만.”

   “이런 놈들이? 헛소리도 적당히 해. 알른의 꼬맹이한테도 발릴 놈들이 정예는 무슨.”

   “그 분을 부를 땐 존중을 담아라.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할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어.”

   

   무슨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하던 라샤는 교황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당황해선 두 손을 펼쳤다.

   

   “왜?! 예전에 이렇게 불렀을땐 그냥 웃어넘겼잖아!”

   “그 때는 아직 주신의 사도에 대한 판단이 서기 전이었다.”

   “이젠 판단이 섰단 거네?”

   “하. 하하하! 그래! 판단이 섰다! 그 분은 주신께서 간택한 것이 당연한 사람이다!”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린 교황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미와 예술의 여신께서 애정을 쏟아부을만큼 아름다운 외견과는 관계 없다.

   

   여러 악신들의 분노를 살 정도로 무례한 어휘도 신경 쓰지 않는다.

   

   교황은 오롯이 상대의 내면을 보았다. 주신께서 인정할만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번에 얻은 결과는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루시 알른은 주신의 사도로 간택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신께서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내걸만한 영웅이며 용사였다.

   

   “성녀님이 진정한 성녀가 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을 때부터 확신했어야 했어! 아아! 불경한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럽구나! 위대하신 주신의 뜻을 의심한 스스로를 찢어발기고파!”

   

   그랬더라면 마음이 찢어질 것을 참아가며 루엘님의 인형을 모욕하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그 분께 미움을 살 필요 없이 대업을 준비할 수 있었을 터이거늘!

   

   멍청하고 미천했던 자신이 너무도 밉구나. 미워서 피눈물이 흐르는 듯 해.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데?”

   “모든 것.”

   

   성기사 루엘과 기사 가라드가 존중을 내비치는 것도.

   

   타락한 불신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내비치던 것도.

   

   자신이 꺼림칙하게 여기던 상대를 앞에 두고서도 당당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것도.

   

   스스로가 바라는 것만을 포용하겠단 광오함도.

   

   무엇보다 상대의 죄악마저도 품겠단 그 고결함이.

   

   “하아. 이것 참. 나이를 먹을대로 먹고서 위대한 주신 외의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줄이야. 세상 일은 알 수가 없군.”

   “노친네. 지금 좀 정신 나간 사람 같은 거 알지?”

   “걱정마라. 난 원래 정신이 나가 있었다.”

   

   본래는 대륙의 외각을 돌면서 여태 내버려 두었던 이단자들을 압박하고 다닐 생각이었다만 이렇게 되면 일정을 살짝 비틀어야겠군. 한 번은 도심에 들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니까.

   

   “라샤. 예술 교단에서 만든 예술품을 파는 곳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설마 그거 사려고?”

   “일종의 성물이지 않나.”

   “몰라.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인간은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군. 자네는 여성스러움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는 사람이니 말이야.”

   

   직설적인 발언에 라샤가 기분나쁜 티를 냈지만 교황은 그녀의 표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교회 쪽의 정보망을 사용할 수밖에 없나?

   

   요한 추기경의 선을 타면 원하는 걸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안타깝군.

   

   몇 개월 전이었다면 교황의 직위로 예술 교단의 사도와 직접 거래를 했을 터이거늘.

   

   “근데 있잖아. 노친네 계획대로 흘러가면 나중에 꼬맹… 주신의 사도께서 가만 보고 있을까?”

   “그럴 리가. 그 분께선 반드시 나를 막으려 할 것이다. 내가 하려는 일은 결코 주신께서 바랄 리 없는 일이니.”

   “그래도 괜찮은 거야?”

   “우문이구나! 난 위대한 주신께서 다시금 이 대지에 발을 내딛으실 수 있도록 하겠다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난 영원히 지옥을 떠돌 각오를 했다! 헌데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데에 망설임이 있을까!”

   “그게 아니라 방해받아서 실패할 수도 있지 않느냔 건데.”

   “그럴 수도 있겠지. 위대한 주신의 도움을 받는 사도님이다. 나 같은 잡 것의 계획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박살내도 이상하지 않아.”

   

   교황은 물음을 던진 라샤가 당황할만큼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허나 그건 그것대로 기쁜 일이다. 위대하신 주신께선 나 따위가 없어도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단 것이잖나.”

   

   교황의 지위에 오른 남자가 자신의 권력과 능력을 최선으로 활용해 수십년간 쌓아 올린 계획이다.

   

   이를 주신의 사도로 간택된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꼬마아이가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교황은 흔쾌히 웃으며 지옥으로 떠나갈 수 있으리라.

   

   자신 같은 미물의 발악으로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주신께서 드높은 권능과 지혜를 지니고 있단 뜻이니 말이다.

   

   “천천히 생각을 해보니 오히려 계획이 실패하는 쪽이 더 즐거울 것 같군.”

   “그럼 지금이라도 계획 포기할래?”

   “그럴 순 없지. 본의가 아니라고는 해도 시련의 역할을 부여받지 않았나. 이런 때일수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다.”

   

   묘하게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던 교황은 하루 빨리 왕국에 심어놓은 씨앗이 피어나길 바랐다.

   

   밑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젠 도미노가 넘어질 때를 기다리며 자잘한 일들을 수행할 뿐.

   

   “움직이지. 오늘따라 몸에 힘이 가득해.”

   “이렇게 고생했는데 마지막에 재미없기만 해봐.”

   

   *

   

   “흐냐!”

   

   신성이 흘러들어오는 충격에 정신세계에서 현실로 끌어당겨진 나는 내게로 쏘아지는 다섯 쌍의 시선을 마주하고 어깨를 움찔… 다섯 쌍?

   

   “이번엔 일찍 일어나셨네요. 루시!”

   “성녀님께서 몸에 이상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페이비 본인이 제일 불안해하고 있었잖아요!”

   “맞아. 성녀님 계속 안절부절했어.”

   “그. 제가 실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안도와 함께 부산스레 떠들어대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지나치면 정신세계에서 봤던 얼굴이 보인다.

   

   이 외견은 분명 할아버지가 영웅이라 불릴 무렵인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생각하고 있으려니 인형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주신의 사도시여! 고결한 뜻을 품은 당신께 폐를 끼쳤습니다!”

   

   …어. 네? 저요?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또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을는지!”

   

   사과의 말을 전하는 인형은 땅에 머리를 박아 무너트릴 것처럼 박력이 넘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상황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친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페이비가 헛기침을 했다.

   

   “영애님께서 쓰러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애님께 깃들었던 신성이 다시 이 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에 따라 회복한 인형님은 즉각 저희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셨고요.”

   “에르기누스님께서 남긴 뜻을 지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원형이 되는 루엘님께도 모욕이 될 죄를 저지른 저입니다! 그런 절 막아주신 분들에게 어찌 감사를 전하지 않겠습니까!”

   

   인형은 재차 고개를 숙였지만 조이를 향하는 시선만큼은 곱지 않았다.

   

   조이가 어둠의 권능을 사용하기 때문인가.

   

   안 좋은 기억을 지니고 있단 건 이해한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에 안 들어.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인형의 머리를 짓밟았다.

   

   “인형이 사과하는 방식은 사람하고 다른가?”

   “…사도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구해줬어도 머뜩찮은 티를 내는 게 사과구나? 재밌네.”

   “그것이.”

   “근데 그거 알아? 우리 얼빵이는 널 만든 동정찐따님의 제자거든. 졸지에 꼰대할배랑 동정찐따님 둘을 모욕한 꼴이네. 이야~ 대단해라~ 창조주조차 모욕하는 성기사라니~ 다음엔 누구야? 나야? 나 덮칠 거야?”

   

   꾸깃꾸깃 머리를 짓밟던 나는 당황한 인형이 사과의 말을 내뱉고 나서야 뒤로 물러섰다.

   

   나한테 밟혀서 여러모로 엉망이 된 얼굴로 인형이 사죄하자 조이가 당황해선 손을 내저었다.

   

   참 생긴 거랑 다르게 착하단 말야.

   

   다들 조이와 인형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몸 상태를 확인했다.

   

   할아버지의 신성을 포용함에 따라 어느 정도 회복이 되긴 했네.

   

   아직 만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병약루시에서 벗어나는덴 성공했어.

   

   이 정도면 며칠 내로 정상까지 돌아오겠다.

   

   여러모로 꼬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라던 결과를 이루었단 사실에 기뻐하던 난 문득 이 던전의 클리어보상을 떠올리고 인형의 목더미를 붙잡았다.

   

   “악질 인형. 너 우리한테 줘야 할 게 있지 않아?”

   “보수에 대한 말씀이시군요! 안 그래도 당신께서 깨어나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인형이 품 안에서 꺼낸 건 과거 할아버지가 허접주신에게 직접 축복을 부여받은 목걸이였다.

   

   저 목걸이의 효과는 지극히 단순하다. 신성의 양이 증가하고, 회복력이 늘어나며, 신성과 관계된 힘을 쓸 때 이로운 효과를 부여하는 물건이니까.

   

   문제는 저게 긴 시간 속에서 풍화된 상태라는거지.

   

   현 상태로 착용해봐야 효과는 미약한데 본래 성능까지 복구시키려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 아이템. 효율을 도외시하고 고점을 노릴 때나 구하러 오는 물건.

   

   지금의 나에겐 장식품 이상의 의미가 없을 장신구다만 성능과는 별개로 상징적인 의미는 있다.

   

   성기사 루엘이 사용하던 주신의 축복이 담긴 목걸이라니. 성직자들이 환장할 것 같지 않아? 성물에 미친 아르테아 백작이라면 거품을 물면서 이걸 구하려 들 걸?

   

   “허접 성녀.”

   “네?”

   “자. 받아.”

   

   그러니까 이건 페이비가 착용하는 게 옳다. 이 안에 담긴 상징성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게 페이비니까.

   

   “제…가요? 영애님께서 착용하시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냄새나는 목걸이를 나보고 끼라고?”

   “그치만 영애님께선 루엘님과.”

   “아아. 내가 주는 건 받기 싫다는 거구나? 허접성녀 주제에 건방지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가지고 싶어?”

   “네! 엄청요!”

   “그럼 부탁해봐.”

   

   부탁이란 단어에 눈동자를 떨던 페이비는 심호흡을 하고 방금 전의 인형마냥 머리를 박으려 했다.

   

   “주신의 사도시여. 부디 이 어린양에게 당신의 축복을 선사해주십시오.”

   “어. 그. 하! 허접성녀라 그런가 엄청 속물적이네! 어쩔 수 없지!”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난 주변의 질책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페이비에게 목걸이를 건네려했다만, 페이비는 손으로 목걸이를 받는 대신 눈을 꾹 감고 몸을 앞으로 뺐다.

   

   …직접 걸어달라는 거야?

   

   당혹스러웠지만 그녀의 바람을 거절할 순 없었다.

   

   방금 전에 페이비한테 빌어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물러서면 진짜 쓰레기가 되잖아!

   

   그리고 목걸이 걸어주는 게 뭐 어려워서! 그 정도야 얼마든 해줄 수 있지!

   

   자신만만하게 페이비의 앞으로 걸어간 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곤란함을 느끼게 됐다.

   

   흐에에. 신성주머니가 너무 커! 이건 닿기 싫어도 닿을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

   

   아냐. 진정해. 이래서야 허접주신하고 똑같은 놈이 되는 거라고! 교황의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할 순 없어! 

   

   결코 허접주신과 같은 인종이 될 수 없단 생각에 끊임없이 무념무상을 되새긴 나는 지극히 건전하게 목걸이를 걸어주는 데에 성공했다.

   

   그제서야 눈을 뜬 페이비는 목걸이를 매만지다가 이내 고갤 들어서는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님.”

   

   하아. 그래. 페이비 네가 기쁘다면 잘 된 일이겠지.

   

   “루시 알른. 이런 상황에 끼어들어서 미안하다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뭔데? 무능왕자님이 다시 걸어주고 싶어? 후흐흫. 음흉하네? 역시 사춘기 꼬맹…”

   “그런 게 아니라! 저 목걸이는 루엘님의 것이지 않나! 그렇다면 지하의 일에 성녀님이 개입했단 걸 상대 측에서도 알게 될 터!”

   

   그런 문제가 있겠네. 목걸이가 지닌 상징성이 이럴 땐 귀찮구나.

   

   지하의 일에 참여한 건 세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체사레 추기경 하나야.

   

   교황은 오히려 페이비를 칭찬할테고 교황과 함께 있던 사냥개는 그의 명령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내게 생각이 있다만.>

   ‘뭔데요?’

   <저 인형을 써먹어 보자꾸나. 도저히 인정하고 싶진 않다만 어쨌건 저는 나를 기반으로 만든 인형이니까.>

   

   할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듣던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굽혔다.

   

   계획대로 된다면 꽤 즐거울 것 같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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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으로 응원의 후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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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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