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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1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감정은 나로서는 엄청나게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나는 그런 종류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보지 않았다거나, 누군가를 해치고 싶을 정도로 분노한 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그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가족을 사랑하긴 했다. 만약 부모님께서 돌아가신다면 나는 평생 부모님께 잘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부모님께는 언제나 애틋한 감정이 있었고, 함께 살며 부딪히긴 하더라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뛰며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왔을 때도 사무치게 반갑기는 했지만, 이런 수준의 감정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또, 누군가를 싫어한 적도 많았다.

        

       친구였다가 사소한 싸움을 계기로 서로 극도로 싫어하게 된 경우도 있었고, 일하는 곳에 주기적으로 들리는 손놈도 하나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든 패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고, 머릿속으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뒤에서 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참아본 적은 없었다.

        

       “이리 온.”

        

       최나경이 나를 향해서 양팔을 쭉 뻗은 채로 말한다.

        

       한 발자국, 예사라의 몸이 그쪽으로 움직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져나오는 감정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다.

        

       그건 정말 기이한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히 감정을 느끼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니라 예사라가 느끼는 감정일지 모른다.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키고 그대로 영영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예사라의 기억과 감정이, 저 최나경이라는 존재를 보고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감정에 백 퍼센트 동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예사라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도, 방법도, 원인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예사라의 몸에 들어왔다. 예사라 본인의 인격이 아직 남아있다면, 나는 지금 예사라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어쩌면 내가 예사라 본인이라고 주장해도 될 정도로.

        

       하지만, 같은 몸속에 갇힌 정신이면서도, 나는 예사라를 마치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기분을 받았다.

        

       나는 이곳에 서 있다.

        

       예사라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예사라에게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기괴한 상황이 겹치고 겹쳐서, 예사라의 몸은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어색한 모습으로 걸음을 한 걸음씩 떼고 있다.

        

       “…….”

        

       나— 아니, 예사라를 보고 웃고 있던 최나경의 얼굴이 다소 흐려졌다.

        

       저 여자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온 걸까?

        

       하늘이, 이수아, 신소희에게 따로 협박이나 제안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최나경은 애초부터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마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예사라가 들어올 문을 향해 앉아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나경의 팔이 서서히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예사라의 심장이 더 격렬하게 뛰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빨리 가면 돼.

        

       마치 그렇게 나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왜?

        

       나는 물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예사라의 인격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심장이, 뇌에 남은 기억이 몸의 주도권을 찾으려고 하고 있을 뿐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설득을, 참 이상하게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유일한 사람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보고 살아온—

        

       내 앞에서 유일하게 반응해주는, 사람다운 사람이니까.

        

       내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

        

       그래.

        

       이제야, 이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새장 바깥에 밝고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데도, 예사라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사라가 적은 유서에 어떻게 쓰여있었지?

        

       부디 당신이 저를 사랑해줬으면.

        

       그래서 나의 죽음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으면.

        

       그래, 그랬다.

        

       그건 ‘문자 그대로’ 였다.

        

       예사라가 새장 바깥으로 나가건 말건, 살아서 생을 유지하건, 죽건, 어떻게 하건.

        

       예사라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은 옛날부터 한 사람뿐이었다. 소중한 사람도, 증오스러운 사람도, 그저 한 사람뿐이었다.

        

       돈?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의미가 있었기에.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을 이용하려는 모든 존재로부터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준,

        

       유년기를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 대신 사랑을 쏟아준,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이런 감옥에 가두고, 모든 인간관계를 파탄 내 버리고, 평범한 삶을 빼앗고, 감정도, 꿈도, 모두 빼앗고 짓밟아버린 주제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모든 빼앗긴 것에 익숙해질 만할 때 쯤 찾아와, 자신에게 사랑을 쏟아주는 ‘어머님’.

        

       예사라에게 있어, 최나경이라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였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오로지 세상에 한 명뿐인 자기 사람.

        

       예사라는 이미,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약을 한 움큼 삼키기 한참 전부터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가지 소망합니다. 부디 어머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길. 제가 어린 시절 어머님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저를 사랑하시길……

        

        

       예사라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자신이 죽어 자신이 사랑하지만 증오하는 저 여자에게 평생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문자 그대로였던 것이다.

        

       *

        

       “…….”

        

       세 소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로 들어온 예사라를 보고 숨을 삼켰다.

        

       마치 당장이라도 버진 로드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복장은, 누가 보더라도 반할 것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예사라가 최나경의 품으로 가지 않기를 바랐다.

        

       저 옷을 입고, 최나경에게 안긴 예사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상대가 그녀의 양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정상이 아니다.

        

       소파에 앉아있는 세 명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찌감치 의심하던 유하늘도,

        

       ‘회장님’이 ‘어머님’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다소 안심했던 신소희도,

        

       그리고, 애초에 뭔가 잘못된 집안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이수아도.

        

       이 상황이 확실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그 여자를 보는 사라도, 분명히 위험한 상황이다.

        

       사라가 한 걸음 움직이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마치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발걸음으로 한 발자국씩 움직이는 그 모습은,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기도 했고, 가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가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그걸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건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회장과 예사라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이어져 내려온 의식.

        

       “…….”

        

       하지만 지금, 사라는 그 의식을 온몸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억지로 한 걸음 옮긴다.

        

       가고 싶지만,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사라는 억지로, 억지로 걸음을 조금씩 옮겨나갔다.

        

       양팔을 벌리고 있던 최나경의 입에서 미소가 서서히 옅어졌다. 올라가 있던 팔이 서서히 내려왔다.

        

       ……사라의 걸음은 그 시점에서, 완전히 멈춰있었다.

        

       그리고,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사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사라야!”

        

       그 모습에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유하늘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라를 향해 달려간 유하늘은, 그렇게 달려갔으면서도 쉽게 사라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저 사라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애타게 사라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를 뿐이었다.

        

       사라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공허하게 풀린 동공을 바닥을 향해 힘없이 내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마, 그동안 사라를 몇 번이고 보아왔을 최나경조차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한참 동안 그 상태로, 침묵이 감돌았다.

        

       최나경이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최나경 쪽을 바라보았다.

        

       최나경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동안 가만히 서서 무표정하게 사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돌려 그 옆에 앉은 유하늘을 바라보았다.

        

       유하늘도, 최나경을 보았다.

        

       최나경은 노려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유하늘을 가만히,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입꼬리 끝은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표정을 보고 웃고 있는다고는 생각하지 못 하리라.

        

       최나경의 시선은 아직 소파에 굳어있는 신소희와 이수아도 한 번씩 훑었다.

        

       그 시선에 변화는 없다. 웃고 있지만 표정 없는 듯한 기괴한 분위기.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악한 욕망이 느껴지는 얼굴이 세 사람을 훑었다.

        

       마치, 자기 생각을 확인하듯.

        

       “…….”

        

       그녀는 곧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여전히 열려있는 문이었다.

        

       처음에는 거침없던 걸음은, 사라 앞에서 한 번 멈췄다.

        

       그때까지 실 풀린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던 사라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여, 자신에 앞에 선 최나경을 올려다보았다.

        

       “…….”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시선 두 개가 한동안 서로에게 머물러있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둘 다 뭔가 애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하지만 아마도, 그 감정은 전해지지 못했다.

        

       최나경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결코 느려지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사라는 그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 걸음 소리를 계속 듣고 있을 뿐이었다.

        

       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스륵 닫힌다.

        

       유하늘은 손을 들어 사라에게 향하다가, 이내 닿지 못하고 다시 거두었다.

        

       사라는, 오늘, 한 가지 중요한 것을 포기했다.

        

       그것이 뭔지,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저 그렇게 그녀의 옆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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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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