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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1

    아르윈은 야영지가 차려진 위치 인근을 자유롭게 둘러보았다.

     

    시야에 잡히는 모든게 새롭기만 하다.

     

     

    이미 한번 나와본 세상이었지만 그때와는 마음이 달라서 그럴까.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풍경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든다.

     

    한 평생 발목을 붙잡았던 쇠사슬이 풀렸다.

     

    세계수와 두 번 다시 엮일일이 없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넓고 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다.

     

    베르그와 혼인 생활을 이어가야한다.

     

    6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이 기간이 끝나야지만 완전한 자유가 찾아온다.

     

     

    아르윈은 어느새 자신을 위해 싸워주던 베르그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그와 함께한 시간이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170년의 삶에서 가장 긴 하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의 밀도만이 다른 느낌이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을 털어낸다.

     

     

    그리고는 눈 앞에 흐르는 개울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 하나 없는 흐르는 물줄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모양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을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또 얼마나 세상에 신기한게 많을지 의아해진다.

     

     

    “새삼 묻는거지만…바깥 세상에 나오니 어떠세요?”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질문한다.

     

    뒤를 돌아보니 네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윈은 달리 흔들리지 않는 소리로 답했다.

     

    “…좋네. 모든게 새로워.”

     

    네르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보다 행복해보이시는 것 같아 기뻐요.”

     

    “응. 꿈꿔왔던 순간이니까.”

     

    아르윈은 다가오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이내 네르가 침묵을 깨며 말한다.

     

     

    “…들었어요, 베르그한테.”

     

    “뭘?”

     

    “…관계를 갖지 않으셨다고. 다행이에요.”

     

    아르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이야, 네르. 네 말대로 대화를 하면 이해해주네.”

     

    “말해드렸잖아요. 베르그는…그렇다고.”

     

    네르는 베르그에 대해서는 다 안다는 듯 가볍게 답해왔다.

     

     

    아르윈은 네르의 존재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베르그를 향한 묘한 반응들이 일어나던 참이었다.

     

    구경할 것들이 사라지면 눈은 항상 베르그를 쫓았다. 그렇다고 눈을 마주할 수 있는건 또 아니었다. 시선이 교차하면 언제나 눈을 피하게만 된다.

     

    상처들은 괜찮은지 보게 된다. 그의 맹세들도 떠올리게 된다. 하나 같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걸, 네르의 존재에 접어두기로 한다.

     

    네르를 보면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네르 또한 베르그를 좋아하는건 아니지만…자신보다는 네르와 베르그의 관계가 보다 자연스럽다.

     

    단명종은 단명종과 엮여야만 한다.

     

    아르윈은 베르그와 깊은 관계는 맺지 않을 생각이었다.

     

    베르그가 혹시나 숨기고 있는 폭력적인 모습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약을 써서라도 도망칠 생각이었고.

     

    “…”

     

    당연히 아침의 베르그를 보았던 이 상황에서는…독을 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르윈은 곧 있으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네르?”

     

    “네?”

     

    “잠자리는…어떻게 되는걸까?”

     

    “…”

     

    “네가 계속 베르그와 자는 거야?”

     

    “…”

     

     

    네르는 잠시 침묵했다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 묻는다.

     

    “…아르윈님이 같이 주무실래요?”

     

    아르윈도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응? …….아니. 말했잖아, 난. 단명종이랑 친해져봤자라니까.”

     

    “…저도 아시다시피 베르그를 사랑하지는 않아서.”

     

    “…그런거 치고는 사이가 좋아보이던데? 상처도 직접 치료해주고.”

     

    “우, 우정과 사랑은 별개의 이야기죠. 그러는 아르윈님이야 말로 오늘 하루 종일 베르그를 바라보던데…”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눈이 계속 가지.”

     

    “…”

     

    “…”

     

     

    둘은 잠시 침묵한다.

     

    아르윈은 제 감정을 투명하게 밝히지 못했다는 찝찝함이 남는다.

     

    네르도 마찬가지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전에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을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하지만 아르윈은 이보다 투명하게 마음을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도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는 상태다.

     

    밝히고자 해봤자 밝힐수가 없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베르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지금, 그를 향한 악담을 하기가 어려워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들 그를 사랑하게 되는건 또 별개였으니 이토록 복잡한거다.

     

     

    네르도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요. 베르그가 알아서 정리를 해줄거에요.”

     

     

    그 말에 아르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난을 던지듯 말했다.

     

    “…꼴이 우습게 됐네. 인족 평민에게 동침 순번이 메겨지는 상황이라니.”

     

    내뱉고 나니 조소처럼 되어버린 말이었다.

     

     

    네르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인족의 문화라지만, 일부다처제는…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기는 해요. 저도 아르윈님을 위해 받아들였지만요.”

     

    “…고마워, 네르. 그건 도움이 됐어.”

     

     

    그때 멀리서부터 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네르! 아르윈!’

     

    그 목소리에 둘의 눈이 맞는다.

     

    “…베르그가 우리를 찾고 있나봐요.”

     

    “그래. 돌아가야겠네.”

     

     

    ****

     

     

    먼저 단원들에게 요청해 놨던만큼, 오늘은 우리 모두 침상이 뜯어져 있었다.

     

     

    아르윈과 네르를 임시천막에 들이며 말한다.

     

    “오늘은 다 따로 자도록 하자.”

     

    아르윈은 짧은 한숨을 내쉰다.

     

    얼핏 안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셋이서 함께 자는 상황을 상상이라도 한걸까.

     

    아직 동침에 대한 거부감은 남아있는 듯 했다.

     

     

    네르를 바라보니 그녀 또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다.

     

    “…왜?”

     

    “…아니야.”

     

    그러며 구석에 있는 한 침상을 먼저 차지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몸을 긁적였다.

     

    상처들에 딱지가 내려앉는지 점차 간지러워진다.

     

    “…베르그, 손.”

     

    이런 내 행동을 네르가 지적했다.

     

    나는 손을 들어보이며 상처들 내버려두었다.

     

    아담 형에 이어 네르에게까지 혼난다.

     

     

    아르윈까지 침상을 정하자, 나는 남은 자리에 앉았다.

     

    둘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가장 큰 자리가 양보된다.

     

     

    문득 생각하니 웃기긴 했다.

     

    평민을 위해 불편한 자리를 차지하는 귀족 영애들이라니.

     

    가까이 붙어 있어 잊기 쉬운 것이었지만, 정말 신분차이가 상당히 나는 우리였다.

     

     

    나는 그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아마 모레 쯤에는 마을에 도착할거야. 이후에 장례도 치르고, 잔치를 열면 한동안은 쉬어도 될거고.”

     

    “…”

     

    “…”

     

    네르와 아르윈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이어 말한다.

     

    “너희도 이미 생각했겠지만, 우리들만의 규칙을 정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같이 침실에 드는 날이라던지, 너희의 방이라던지.”

     

    나는 또 팔을 긁적이려다, 네르의 시선에 손을 내려두었다.

     

    “…생각해봤는데, 하루 단위로 번갈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 하루는 네르, 하루는 아르윈…이런식으로. 너희도 그 편이 낫잖아?”

     

    형평성을 맞추려는 의도였다.

     

    네르와 아르윈 모두 아직은 나와의 동침을 그리 반기지 않을거다.

     

    둘 다 거부감이 있는 상황에서 누구하나만 부담을 지어줄순 없었다.

     

    나중되면 이런 감정들이 바뀌길 희망할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네르와 아르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충동에 내가 한번 물었다.

     

     

    “아니면 누구 하나 나랑 계속 잘래?”

     

    “…”

     

    “…”

     

     

    하지만 네르와 아르윈은 그 말에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기나긴 침묵이 천막에 맴돈다.

     

     

    대답을 기다리다 나는 말을 돌렸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도 반쯤은 빈말이었다.

     

    그런식으로 한명만 편애했다가는 나머지 한 명이 소외될테니.

     

    나도 내가 왜 질문했는지 알수가 없다.

     

    그들의 반응도 이미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까지 놀라지도 않았다.

     

     

    네르는 사랑에 빠지려면 오랜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아르윈은 나를 사랑할 생각이 없다 했으니까.

     

    이것이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

     

     

    “아니면 누구 하나 나랑 계속 잘래?”

     

    네르는 베르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했다.

     

    “…”

     

    사실 근래 베르그와 함께 나누는 침대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긴 삶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잠들어본건 베르그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형제들은 각자 영혼결속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모여서 잠을 청했다.

     

    네르만이 언제나 혼자였다.

     

     

    그런 와중에 베르그와 함께 잠을 자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넘치던 그 행동도 점차 그녀에게 잦아들었다.

     

     

    숙면을 취하다 문득 떠진 눈 앞에 베르그가 있으면 어쩐지 안심이 됐고, 가끔가다 나누게 되는 서로의 온기가 따뜻했다.

     

    본능처럼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그 어떠한 순간보다 실감했던게 바로 베르그가 아르윈과 혼인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홀로 차지한 침대는 너무나도 넓어 어색할 지경이었다.

     

    베르그와 함께 잠드는게 그렇게도 익숙해졌었나 싶었다. 오랜시간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이 임시 천막에 들어서서 나뉜 침상을 보고 느낀 미약한 실망감도 그 감정에 대한 일환이었을 것이다.

     

     

    전날에는 아르윈과 잤으니, 오늘은 자신이 아닐까 몰래 생각해보았다.

     

     

    그러한 면에서는 사실, 베르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다.

     

    내가 계속 같이 자도 괜찮다고.

     

     

    하지만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먼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계속해서 붙어자다보면 생겨날법한 감정들이 두려웠다.

     

    이토록 애정을 쏟아주는 베르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불안감도 있다.

     

    그때에는 홍염단의 근거지, 스탁핀에 대한 정보를 흘리며 그를 배신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네르는 그 전에 대비를 해두고픈 마음이었다.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는 베르그가 아르윈을 더 사랑해야지만 편하다.

     

    어쩐지 불편해지는 사실이었지만, 그래야지만 블랙우드가 적절한 보상을 제시했을 때 베르그도 자신을 놓아줄 것이다.

     

     

    이성과 감정이 계속해서 씨름했다.

     

     

    이성은, 베르그가 아르윈을 사랑하는 편이 나으니 침묵하라 했고.

     

    감정은, 베르그와 함께 잠자고 싶으니 대답하라 한다.

     

    근래에 자꾸만 벌어지는 싸움이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지만 베르그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가볍게 주제를 돌리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르는 작은 아쉬움과 함께 조용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스탁핀에 돌아가면, 다시 그와 잠들 수 있을 것이었다.

     

    “…”

     

    이번에 돌아가면 몰래 그의 품에 더 깊숙이 들어가 잠을 청해볼까 싶어진다.

     

    꼬리가 예쁘다는 칭찬도 다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듯 했다.

     

     

    뭐가 됐던 시간은 많았다.

     

    혼인은 올린 상태였다.

     

    약지에 낀 반지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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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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