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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1

       아나이스가 일으킨 폭풍은 홀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정말 자작님이 저 남자에게 푹 빠져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그렇다고 해도 무슨 생각이야. 상대는 무적자에 살인 용의자라고.

       -완전히 제정신을 잃었어, 쯧쯧. 베르그송 상회도 이제 끝장이군.

         

       시간이 지나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가라앉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변호인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보다 못한 판사가 나무망치로 받침대를 내리쳤다.

         

       땅땅.

       흑단 나무의 청명한 울림이 날카롭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숙! 정숙하시오!”

         

       그렇게 그가 몇 번 더 소리치고 나서야 간신히 소동이 가라앉았다.

       재판장도 베르그송 자작이 변호인으로 나온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오랜 경력을 가진 판사답게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기소인, 피고인, 변호인.

       이걸로 재판의 요소는 다 갖춰졌다.

         

       그가 막 법정의 개회를 선언하려는데 도스빌 남작이 손을 들고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은 승리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이거 의외군요. 자작님께서 직접 변호인으로 나오시다니. 애가 많이 타셨나 봅니다. 사랑하는 분의 목이라도 달아날까 봐 걱정하셨나요?”

         

       재판의 승패 따위는 이제 상관없었다.

       이번 일은 범인을 잡는 게 아니라, 상대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게 목적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어떻게 대꾸하느냐에 따라 승부는 단숨에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아나이스에게 집중됐다.

       심지어 판사조차 자신이 하려던 말을 까먹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아나이스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리곤 좌중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훗, 세간에 그런 말이 떠돌긴 하더군요. 제가 단장님에게 빠져있다는 소문 말이지요.”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개막식이 끝나고 발표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밝혀야겠네요.”

         

       그녀는 감정이 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은 전부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 저와 단장님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여기서 아나이스는 피고인석을 아주 잠깐 흘겨봤다.

       원더스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스빌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면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을 위해서 법정에 오르신 겁니까? 그것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떠돌이를 위해? 대단하군요! 그런 판단력으로 어떻게 상회를…….”

         

       아나이스는 그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제가 앓고 있던 불치병에 대해서는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녀의 병 이야기가 나오자 많은 방청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옆 사람이 속닥거리며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프랑크 원더스타인 단장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의학 박사들도 고치기 불가능하다고 말한 그 병을요. 후원은 그 감사의 뜻에서 하게 된 겁니다.”

         

       그녀의 선언에 홀 안은 다시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웅웅 울렸다.

         

       -불치병을 고쳤다고?

       -일개 마술사가?

       -무명 서커스단에 후원한 이유가 그거였어?

         

       아까와 비슷할 정도로 어수선해진 법정.

       그러나 이번에는 재판장이 망치를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아나이스가 다시 입을 열자, 다들 떠들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변호인이 된 겁니다. 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습니까? 귀족의 명예를 위해서 나선 것이죠.”

         

       그녀의 말에 무스탕 후작이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변호인으로 나선 것은 원래라면 귀족의 명예를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귀족다운 일로 변했다.

         

       사람들도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명의 은인이 위험에 처했는데.

       -체면 운운하며 점잔빼는 게 더 불명예스러운 행동이지.

         

       만약 도스빌 남작이 그녀를 흔들기 위해 ‘즉결 처형’ 조항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그녀가 나서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강한 위협이 오히려 그녀가 나서는 게 당연한 명분을 주고 만 것이다.

         

       자신이 던진 수가 자충수였다는 걸 깨닫자 도스빌 남작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공격해 들어올 줄이야.

         

       그러나 그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나름대로 그녀의 말에서 허점을 잡으려 애썼다.

         

       “한 달 동안 여행을 같이 다니신 것도 그 은혜 갚기 중 하나인가요?”

         

       임기응변치고 나름 괜찮은 공격이었지만, 이건 이미 사전에 반론을 준비해둔 것이었다.

       아나이스는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후속 치료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병이 하루아침에 다 나을 리가 있나요.”

       “크윽.”

         

       도스빌 남작이 분한 신음을 삼켰다.

       분하지만 ‘소문’을 가지고 더는 그녀를 공격할 거리가 없었다.

         

       방청객들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재판의 전초전에서 승리자가 누구인지.

         

       -과연 다 사정이 있는 거였군.

       -그러고 보니 후원자 선언과 자작님의 병이 갑자기 호전됐다고 했을 때와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네.

       -난 자작님의 기계를 본 적이 있어. 그런 걸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니. 그런 병을 치료해준 은인이라면 확실히…….

       -저 마술사도 대단한걸. 무슨 재주를 지녔길래 의사들도 두 손 든 병을 치료한 걸까?

       -집시나 떠돌이들이 이상한 지식이 많잖아.

         

         

       [서커스단의 명성이 10 올랐습니다.]

         

         

       원더스타인은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끝장이다 싶었는데, 아나이스가 멋진 언변으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이걸로 소문은 이제 무력화되었다. 사건 그 자체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준비한 노림수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그녀는 기소인 진영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쳤다.

         

       “당신들이 준비한 다른 야비한 함정들도 오늘 여기서 깨끗이 일소하도록 하죠.”

         

       도스빌 남작은 신음을 삼켰다.

         

       ‘다른 야비한 함정들’이라는 단어 선택이 참 교묘했다.

       원래 ‘소문’과 ‘재판’은 별개의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소문과 재판을 상대방이 준비한 함정으로 묶어버렸다.

         

       즉, 소문을 헛소리로 일축한 것처럼 재판 역시 그 꼴이 될 거라는 분위기를 은근히 내비친 것이다.

       이 역시 기소인 측의 수를 역이용한 것이다.

       그들이 애초에 재판과 소문을 엮어서 공격하려 들었기에 이런 반격을 당한 것이다.

         

       그녀는 그 한마디로 이번 ‘재판’을 상대의 ‘정치적 음모’로 격하시켰다.

         

       아까부터 주눅이 들어있던 피고인 측 방청객들이 와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사기와 명분.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서커스단의 명성이 3 올랐습니다.]

         

         

       강한 욕설도 극적인 반전도 없는 담백한 논리의 연속으로 그녀는 멋지게 상황을 뒤집었다.

         

       원더스타인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가 했던 게임 중에 이보다 고단수의 수 싸움이나 눈치 싸움이 필요한 게임은 많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모든 단서를 쌓아두고 모니터 너머에서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사람 대 사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말실수나 재도전이 허용되지 않는 현장에서, 설득력 있게 말을 조리 있게 풀어나가는 것은 그에게 없는 능력이었다.

         

       그런 쾌거를 달성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둘이 눈을 마주쳤다.

       둘 다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마냥 좋아하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가 그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그때, 엄청난 고함이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우오오! 힘내라! 원더스타인!”

         

       익숙한 목소리였다.

       홀 안의 모든 사람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개막식 축하연 내내 메인 보컬의 노래에 화음을 넣었던 사람이니까.

         

       등 뒤에 수탉의 꼬리 깃털 장식을 달고 닭 볏 형태의 수염과 모히칸 머리를 한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원더스타인을 향해 응원의 함성을 외치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는 순간부터 원더스타인에 대해 나쁘지 않은 여론을 가진 집단이 있었다.

       아니, 그들은 원더스타인이 무적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오히려 그에게 더 동정적인 시선을 던졌다. 방청석에서 그에게 조롱이 쏟아질 때는 함께 분개하기도 했다.

         

       바로 다른 서커스단의 사람들이었다.

         

       요즘은 명문 서커스단이다 뭐다 해서 돈도 많이 벌고 명성을 쌓기도 쉬우니, 평민에 하급 귀족들까지 서커스 업계에 기웃거리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광대나 곡예사는 천시받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곡예사 중에는 고아나 천민 출신이 많았고, 무적자 역시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애초에 서커스라는 것 자체가 유랑 민족인 집시의 예술 활동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당장 여기만 해도 단원 중에 무적자 한두 명은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단장 본인이 무적자 출신인 사람도 있었다.

       꼭 무적자가 아니더라도 유랑예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경험은 다들 몇 번씩 있었다.

       특히, 한 서커스단의 단장 정도 되는 사람들은 이 바닥에서 구른 지 15년 이상 된 지라,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은 시절도 경험했었다.

       그렇기에 원더스타인이 당하는 일이 남 같지 않은 것이다.

         

       “원더스타인 힘내라!”

         

       땅땅.

         

       “정숙! 정숙하시오!”

         

       그렇다고 수탉 미노바 같이 눈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또 없었지만.

         

         

       [서커스단의 명성이 1 올랐습니다.]

       [현재 서커스단의 명성: 15]

         

         

       미노바의 함성과 함께 오른 이 명성은 서커스단 사람들이 원더스타인을 지지한다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에게 작용했다. 그게 곧 명성으로 치환된 것이다.

         

       원더스타인은 의외라는 눈으로 씩씩대며 자리에 앉는 남자를 바라봤다.

         

       수탉 미노바는 게임에서 결코 호감을 사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다른 곡예사들과 늘 마찰을 일으켰고, 속도 좁은 데다 불평불만도 많았고, 질투도 심했다.

       그래서 많은 플레이이어가 그를 일부러 반드시 죽는 패턴에 끌고 가 내던져 버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게임에서의 그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하긴 2년 반 뒤의 그는 서커스 그랑프리 예선에 탈락해서 한창 분이 쌓여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서 시기하고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렌과 조의 경우처럼 세월이 사람을 바꿔놓은 경우인 것이다.

         

       아까 인터뷰를 뺏어간 것에 대해 투덜댄 것은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원더스타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를 대견함을 느꼈다.

       못난 친구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는 걸 발견한 친구의 심정 같았다.

         

       단숨에 바뀐 홀의 분위기에 도스빌 남작은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기소인 측 진영의 높으신 분들 몇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누군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그는 변호인석에 서 있는 여인을 노려봤다.

       아나이스 베르그송.

       이 반전은 모두 그녀의 등장으로 시작된 것이다.

       본인이 직접 변호인으로 나온다는 초특급 강수.

       확실히 허를 찔렸다.

         

       판사는 이제야 자신이 무얼하려 했는지 깨닫고 서둘러 법봉을 내리쳤다.

       땅땅.

         

       “그럼 장미 풍차 카바레에서 벌어진 유령 사건에 대한 임시 법정을 개회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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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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