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12

       

       

       이 기억은.

       언젠가 했던 약속에 대함이다.

       

       지금보다 보잘것없던 시절의 이야기.

       

       서로가 어렸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내리던 눈을 보며 증오하지 않던 때의 기억이다.

       

       [공녀가 이번에 서책에서 봤는데 말이다.]

       

       [어 응.]

       

       매일 말을 걸어봐도 귀찮다는 듯 반응만 돌아오지만.

       소녀는 그래도 신이 나서 소년에게 말을 걸고는 했었다.

       

       [중원의 이들이 그렇게 잘났다더구나.]

       

       [갑자기?]

       

       중원의 대한 얘기를 꺼내니, 소년이 못내 반응을 내비친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소년이 귀찮음을 못 이겨 내비친 반응이란 걸 말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식의 대화만으로도, 소녀는 괜찮았다.

       

       [책에 그리 나와 있었다.]

       

       [이번엔 무슨 책을 읽었는데?]

       

       [중원의 제일 미녀, 빙궁의 일공자를 만나다.]

       

       […]

       

       몰래 시녀들이 즐겨 보던 서책의 이름이다.

       소녀가 근래 푹 빠져 살던 서책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말해주니, 소년은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거, 반입 금지 물품 아니야?]

       

       북해는 중원에 관련된 물건은 오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이 또한 그런 게 아니냐 물은 말인데.

       

       [어허!]

       

       소녀는 버럭 화내듯 소년에게 외친다.

       

       [이건, 북해에서 직접 집필한 것이니. 중원의 물건이 아닌 게야!]

       

       [아, 그래.]

       

       그런 갑다 싶어 대충 넘어가려던 찰나. 소년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소녀에게 말한다.

       

       […그래서, 말투는 왜 그런 건데…?]

       

       [음? 이상한가?]

       

       [엄청.]

       

       [서책에선 분명 이렇게 말했는데….]

       

       책에서 나오는 혈족이 하는 말을 따라 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대체 그런 말을 쓴다고 그래.]

       

       [서책에 나오는 일공자가 그리 하더라구.]

       

       차가운 미공자가 중원의 여인을 만나 변화하는 따뜻하고 야시꾸리한 이야기.

       그곳에 나오던 남자 주인공의 성격이 그랬다.

       

       문득 떠오른 말에, 소녀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한다.

       

       [본 공자를 이렇게 대한 여인은 그대가 처음이오.]

       

       그렇게 적힌 대사가 있었다.

       그 뒤엔 분명.

       

       [나와 결혼해주시지 않겠소?]

       

       라는 말이 적혀 있던 것 같다.

       

       […]

       

       말을 들은 소년은 잠시 멈칫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소녀를 쳐다본다.

       그러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달싹거린다.

       

       하지만.

       

       [아! 눈 내린다.]

       

       소년은 끝내 뱉고 싶던 말을 뱉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것에 소녀가 다시금 신이 났기 때문이다.

       

       [봐봐 청아! 눈이야!]

       

       […그래, 눈이네.]

       

       신이 난 듯 내뱉는 말에 소년은 쓰게 웃을 따름이다.

       

       [대답은 듣지도 않네. 그럼 왜 물어봤어.]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웃음으로 무마하자.

       감히 나 같은 놈이 넘볼 존재가 아니다.

       

       소년은 이번에도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눈이 예쁘네?]

       

       [맞아.]

       

       소녀는 눈을 봤고.

       

       [예쁘네.]

       

       소년은 눈을 닮은 소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건, 내리는 눈이 밉지 않을 때의 기억이었다.

       

       

       

       

       

       ******************

       

       

       

       

       눈보라를 뚫고 걸음을 옮긴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으로 치면 한 시진이 좀 지났을 무렵이다.

       

       눈 위를 걸어 계속해서 나아간다.

       당연하게도 눈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우우웅-!

       

       심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따라 시선을 돌린다.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진동을 느끼면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아.’

       

       마음은 조급하나, 조절이 쉽사리 되진 않았다.

       

       이걸 이런식으로 써본 게 처음이었던 탓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남궁비아의 뇌아(雷牙).

       거기서 오는 진동을 계속 느껴야 했다.

       

       미세하면서 선명하다.

       모순적인 감각, 하지만 설명으론 그게 딱이었다.

       

       이는 지난 몇 년, 탈각 이후에 살아가며 깨달은 능력이다

       

       나는 귀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사용했던 귀물들만.’

       

       귀물의 효과를 직접 겪어봤던 것들은 느끼고자 하면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한다면.

       

       ‘…잃어버린 걸 찾으려다 알았지.’

       

       암왕이 준 가면, 그걸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찾을지 진땀을 빼다 우연히 알아낸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암왕에게 물으니 뭐라더라.

       

       ‘용의 특성일 수도 있다고 했던가.’

       

       나로선 잘 모를 일이었다. 용은 대체 뭐하는 놈들일까. 

       이딴 것도 특성이랍시고 달고 살다니 말이다.

       

       그나마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귀물이 애당초 용들에게서 얻어낸 것이라는 점.’

       

       백급 마물들을 모두 용이라 표현했었고. 

       초기의 귀물은 모두 놈들이 뱉어낸 물건이다.

       

       그 탓에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리 짐작할 따름이다.

       

       뭐 다른 용을 만나 봤어야 알지.

       

       ‘아 만나보긴 했지.’

       

       저주를 받아 용이 되어가고 있던 암왕이나.

       

       직전에 마주했던 궁주의 형태도 그와 비슷했다.

       그들이 아니라면.

       

       머릿속에 붉은 눈동자를 지녔던 이가 스쳐 지나간다.

       

       ‘혈마(血魔).’

       

       혈마와 마주한 세 번의 만남.

       

       그 만남 속에서, 놈은 내게 자신이 용임을 짐작하게 하는 말들을 뱉어냈었다.

       

       하물며, 혈기가 뱉었던 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용제(龍帝)의 뭐라 했던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일까.

       단순히 용의 우두머리라는 뜻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까.

       

       그리고, 그게 혈마를 뜻하는 게 맞을까?

       

       ‘혈기가 혈마에게서 얻어낸 것이니, 놈이 맞을 터인데.’

       

       그럼 혈마가 용의 우두머리라도 된다는 건가.

       

       ‘그 의미에 대해서도 확실히 파악해야 해.’

       

       물론, 당장은 그런 걸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기운을 따라 조금씩 걸어가고 있을 즈음. 

       

       “비외군이 그랬을 리 없어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중얼거리던 목소리였다.

       말을 듣고 내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비외군이.”

       

       “그 말만 열 번을 넘게 했어. 입 좀 닫아. 거슬리니까.”

       

       “…”

       

       그제야 좀 조용해진다.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중얼거리니 신경 쓰였다.

       

       고개를 푹 숙이는 느낌이 난다.

       우울한 감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제발 데리고 가달라고 하도 칭얼거리길래, 기껏 데려왔더니. 왜 그 꼴이야.”

       

       업혀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북해의 소공녀, 유리였다.

       

       동굴 입구에서 마주했던 직후.

       우리는 동행 아닌 동행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짐이 되진 않겠다더니, 이게 짐덩이가 아니면 뭔데.”

       

       “하, 하지만…! 공자께서 업히라고…!”

       

       “답보(踏步)도 제대로 못하니까 업히라 한 거잖아. 네가 제대로 했으면 내가 업히라 했을까?”

       

       “…”

       

       답보란 어느 상황에서든 내기를 섬세히 조절해 기동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인데.

       

       물이나 눈 같은 것을 밟으려면 조절도 조절이고 내기량도 상당히 필요했기에.

       일류 수준인 유리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내가 굳이 그녀를 업고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라면 그냥 입구에 두고 갔을 텐데.’

       

       입구에서 들린 대화가 문제였다.

       

       애절하게 비외군은 그러지 않았다며, 자신과 약속한 게 있으니 그럴 리 없다 하는 통에 한 번 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우혁이 놈과 관계가 있어 보여 흥미를 보였고 그 탓에.

       

       ‘살짝 꼬였네.’

       

       일이 조금 귀찮아졌다.

       나는 업혀있는 유리를 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쪽이 말하는 비외군을 찾으러 가는 길이 아니야.”

       

       유리에게 비외군과 무슨 약속을 했냐 물은 말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되레 날 보며 유리는 말했다.

       

       [제발, 데려가 주세요. 부탁드려요….]

       

       대체 어디를 갈 줄 알고 그리 간절하게 말했을까.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데리고 가달라고 한 거지?”

       

       방향을 바꾸며 물었다.

       나는 우혁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냥 나가는 거라 분명히 말을 했건만.

       내가 밖을 나가 어디론가 갈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유리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기까지 했다.

       

       “그러는, 공자께선 어찌 절 데리고 나가셨는지요.”

       

       “음.”

       

       왜 데리고 나왔냐고?

       그 이유를 잠시 생각해봤다.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다.

       

       “네?”

       

       “생각해보면, 굳이 데려올 필요 없었는데.”

       

       말 그대로 쓸데없는 동행이다.

       암행을 하든, 장거리를 이동하든.

       

       유리라는 존재 자체는 이 일에 방해만 될 뿐이건만.

       그걸 다 알면서도 간절히 부탁하는 유리를 데리고 나왔다.

       

       이에 대한 이유를 구태여 떠올리자면.

       

       “그냥, 미칠 듯이 간절해 보이길래.”

       

       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다른 이도 아닌, 우혁을 찾는 목소리가 그리도 간절하기에.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희망을 찾고 있기에.

       

       그래서 데리고 나왔다.

       

       “…고작 그 이유로요?”

       

       “친구를 잘못 둔 죄지 뭘.”

       

       픽 웃으며 말했다.

       

       친구라 해봐야 한 손, 그것도 전부 채우지 못한 불쌍한 삶이건만.

       간신히 친우라 부를 수 있는 놈 때문에 하는 고생이었다.

       

       “그래서, 걔랑 한 약속이 뭔데.”

       

       “…”

       

       “그건 말 안 할 거야?”

       지금을 포함해 세 번쯤 물은 말이다.

       

       무얼 약속했기에 우혁이 그러지 않았으리라 믿었는지.

       

       그게 궁금했으나.

       

       “…”

       

       이번에도 유리는 침묵한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보며 말했다.

       

       “대답 안 하면, 버리고 갈 거야. 그래도 대답 안 할래?”

       

       “…!”

       

       협박을 담아 뱉으니, 유리의 몸이 흠칫 떨린다.

       여기서 던져버리고 가면 어떻게 될까. 아마 썩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걸 유리 또한 알고 있을 터인데.

       

       꾸욱.

       

       유리는 손에 힘만 줄 뿐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걸 말 안 하네.’

       

       안 버리고 갈 줄 알고 그러는 건가?

       

       진짜 대충 던져버리고 가볼까 호기심이 동하지만, 일단은 넘어갔다.

       

       “그럼, 그놈이랑은 무슨 관곈지나 말해.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우혁과 유리는 어떤 관계인가.

       저만큼 울부짖을 정도면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혹, 연….”

       

       “친우입니다. 아주 오래된.”

       

       

       “그렇군.”

       

       친구구나.

       그것도 아주 오래된 친구….

       

       ‘공녀랑 우혁이 친구라.’

       

       오래전이면 대체 언제부터라는 말인가.

       우혁이 북해 출신이란 건 들었는데. 설마 공녀랑 소꿉친구일 줄은 몰랐던 부분이다.

       

       ‘아, 그러고 보니.’

       

       우혁이 했던 말중에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그럼, 그놈 약혼녀도 누군지 알아?”

       

       “…예?”

       

       언젠가 우혁이 했던 말이다.

       자신에겐 약혼녀가 있다고.

       

       ‘그땐 도인이 뭔 약혼인가 싶었는데.’

       

       심지어 있어도 중원에 인물일 거라 생각했건만, 일이 이렇게 됐다고 한다면.

       

       ‘중원이 아니라 북해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물론, 뭐가 됐든.

       

       ‘이제 와서 약혼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이건 그저 들은 말에 대한 궁금증일 뿐이었다.

       

       한데.

       

       “그게…무슨…말이죠?”

       

       “응?”

       

       “약혼녀요?”

       

       말을 들은 유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_ _ )

    다음편도 있습니다.

    다음화 보기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FZ,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Under the Heavens, The Zenith's Childhood Friend, 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 Artist: Released: 2021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struggling meaninglessly, he acknowledged his plac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