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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19

        

       그 가면은 참(Cham)에서 비롯된 것이요.

       이 가면이 표현하는 존재는 정령이며 길상의 신이니.

         

       옛적 티베트에 악귀가 있어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때 파드마삼바바가 나타나 눈을 녹여 호수를 만들고, 호숫물을 끓여 형상을 해골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악귀는 그 끔찍한 고통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으며, 그는 천장대의 보호신이며 귀신의 혼령을 인도하여 길을 알려주는 정령이며 길상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티베트에서는 천장대에서 망자의 육신을 토막 내어서 독수리에게 주는 장례 의식을 행하는데, 이는 시신을 신성한 독수리에게 보시함으로써 영혼을 하늘로 올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천장대의 보호신은 망자의 영혼과 육신이 사악한 것들에게 해를 입는 것을 막아주며, 영혼이 문제없이 승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독수리가 헤매고 있다면 망자의 육신까지 데려가기도 한다고 하니, 기괴한 외형과는 다르게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신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끓는 호숫물에 얼굴이 흉하게 변하여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머리 위의 5개의 작은 해골은 신위와 길상을 상징하되 해골 형상의 얼굴과 어우러져 기괴함을 더하였으니….

       어린아이들은 종교가면극에서 이 가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할 정도였다.

         

       진성이 뒤집어쓴 얼굴은 바로 이 존재의 가면.

       시타림주(尸陀林主) 가면이라고도 부르는, 티베트 참 가면 중 하나였다.

         

       물론 급조해 만든 것이기에 자세히 본다면 엉성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뭐, 참 공연을 할 것도 아닌데 질이 무어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 가면을 쓴 이유였다.

         

       ‘조상들은 가면을 쓰면 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반드시 가면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가면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얼굴을 숨기고 남의 얼굴로 변한다는 것.

       거울이 자기 모습을 비추어주는 것과는 다르게 가면은 자기 모습을 숨기고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서양에서는 가면의 어원에 초자연적 존재가 되고픈 사람들의 욕망이 깃들어 있음이요, 동양에서는 제 얼굴을 가리고 가짜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으니…. 옛적 조상들은 가면을 쓰면 다른 이들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품고 극을 펼치기도 하고, 행동하기도 하고, 복을 구하거나 남을 저주하기도 하고, 희화화하여 비웃거나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진성은 박진성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나니.

       그 역사가, 그 설화가, 그 이야기가 몸에 깃들며 그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하였음이라.

         

       화아아악.

         

       파드마삼바바가 눈을 녹였듯 주위를 녹인다.

       수증기가 퍼져나가며 얼어붙은 땅이 녹고, 곳곳이 촉촉하게 변해간다. 물방울이 맺히고 땅이 질퍽하게 변한다. 그리고 온도는 올라가 물이 증발하며 건조해지기 시작하고, 촉촉했던 땅은 진흙탕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진흙탕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물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며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는 곧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수증기를 뿜어댄다.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진성은 그 어떠한 피해도 보지 않았나니.

       이미 끓여지고 삶아져 더 이상 벗겨질 살가죽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도자기처럼 하얀 해골의 형상을 뒤집어썼으니 피부가 없음이요, 보드랍지 않고 딱딱하였으니 살점이 남지 않았음이요, 다만 푹 파인 눈두덩이의 안이 불그스름한 것은 끓는 물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니 몸이 산채로 익어가는 뜨거움을 품기는 하였으되 이미 항복하였으니 고통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음이라.

         

       그렇게 끓어오르는 물 위에서 진성은 서 있었다.

         

       가면의 퀭한 눈을 케네스가 사라진 곳으로 향하고, 가면 안의 눈은 꼬옥 감은 채 주위의 기척을 느끼기 위하여 노력한다.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 끓는 소리와 수증기가 내는 소음의 사이,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짐승과 벌레의 울음소리, 비탈길을 따라 흐르는 용암이 내는 소리, 주술의 효과 때문에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내는 진동, 가빠진 숨이 가면 안에서 맴돌다가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나는 그 거슬리는 감각….

         

       그리고.

         

       느껴졌다.

         

       ‘죽었군.’

         

         

         

        * * *

         

         

         

       썰매가 가라앉는다.

       불이 붙은 채로 아래로 질주하던 썰매는 어느새 나무를 묶던 덩굴이 잿더미로 변하였고, 불이 붙은 나무는 부서지고 뒤틀어지며 썰매의 형상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못 하게 된 썰매는 용암에 삼켜졌고, 그 위에 묶여있던 케네스 역시 용암의 안에 빠뜨려버렸다.

         

       치이이익.

         

       그렇게 케네스는 용암에 가라앉는다.

       살을 삶는…아니, 살을 태워버리는 그 끔찍한 용암에 삼켜져 간다.

       그 고통은 정말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가 힘든 것이라, 이 고통의 십분의 일조차 제대로 묘사하기가 힘들 수준이었다.

         

       신경계가 미쳐 날뛰고, 생명을 쥐어짜서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온갖 물질을 분비한다.

       그런데도 산채로 용암에서 타들어 간다는 끔찍한 감각을 잊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 케네스는 몸이 산채로 익고 타오르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유황불에서 타오르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자그마한 자비는 있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니.

       배에 꽂힌 흑요석 단검이 그의 정신을 맑게 만들고 그가 기절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고통을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느끼게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끔찍한 저주일 것이나, 용암의 안에서도 상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케네스의 배에 꽂혀있는 흑요석 단검은 자신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상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용암의 끔찍한 열기를 받아들이고, 그 열기를 배 안에 박혀있는 자신의 날에 전달한다. 그리고 열에 녹지 않도록 그 열기를 그대로 케네스의 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내장을 익히고 재로 만든다.

         

       아마 지금 케네스의 배를 열어본다면 끔찍할 것이다.

       잘못 구워서 다 타버린 고기보다도 끔찍한…숯이나 다름없는 것들만 가득 들어차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숯덩이가 되었음에도 숨이 바로 끊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기기묘묘한 일이라….

         

       알겠다.

         

       ‘정신과 육체와 영혼은 한 덩어리라…. 다만 하나가 망가졌어도 둘이 끌어올린다면 이러한 기적도 가능한 것이로구나.’

         

       케네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진작 죽었어야 하는 이 몸뚱이로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 빚어낸 기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기에, 계속해서 이어질 수가 없는 기적이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

       잠들 듯 죽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 깰지 모르는 기나긴 잠이 죽음이라면 그 시작은 나른함 속에서 눈을 감는 것일 테니 그것은 분명히 축복일 테지.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깨어 있는 것이 그 반대가 될 수 있을까?

       고통에 힘겨워할지라도 죽기 직전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저주일 것인가?

         

       Cogito, ergo sum.

         

       지금, 이 순간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과거보다도 더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궁리할 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과연 살아있었는가?

       마음속에 세운 목적의 형상조차 왜곡하고, 목표로 향하는 길을 헤매며 그저 숨만 붙어있었던 과거에는 살아있었는가?

       애초에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적을,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이 삶이라면 그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그저 숨만 쉬고 있다고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의 삶에는 가치가 있었는가?

         

       ‘있었다. 내 삶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었다.’

         

       평가는 남이 내려주는 것이라.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지금 단언할 수 있었다.

       자기 삶이 가치가 있었음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님을.

         

       ‘논문으로 세상에 발자국을 남겼다.’

         

       배우는 것에 재미가 붙어 대학교에 가고, 대학원에 갔다.

       교수의 아래에서 배우고, 학위를 땄다.

       연구를 거듭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논문 몇 편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재앙을 보고 큰 뜻을 세웠다.’

         

       그냥 학자로서 끝날 수 있는 인생에 변화가 일었다.

       망가져 가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고치고자,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노력하였다.

       재앙을 보고 두려워하였고, 재앙에 신음하는 이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재앙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뜻을 세웠다.

         

       ‘주술을 배웠고 재앙을 막았다.’

         

       하지만 학자의 움직임과 영향은 속도가 느린 것이 흠인지라.

       그래서 눈앞의 불행한 이들을 구하고자 그는 주술을 배웠다.

       몸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앙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아니.

       구원이 아니다.

         

       그는 단지 눈에 보이는 이웃을 도왔을 뿐이다.

         

       이웃집 아이가 배가 고파 굶주리고 있을 때 빵 한 쪽을 나눠주는 것.

       물에 빠진 이에게 튜브를 던져주는 것.

       다친 이를 보고 911에 전화를 하는 것.

       소매치기를 당해 집에 갈 수 없게 되어 울고 있는 여행객에게 차비를 건네주는 것….

         

       그의 행동은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측은함을 느꼈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기에 도와줬을 뿐이다.

       그것을 구원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으며, 다만 가엾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고자 하였을 뿐이다….

         

       ‘대접받고 싶은 이는 먼저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황금의 법칙이다….’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어찌 시작되었는가?

       손님에게 대접하면 복이 있으리란 인식은 어떻게 이어졌는가?

         

       손님으로 대접받은 이는 마찬가지로 손님이 찾아왔을 때 대접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접받은 이는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손님이 찾아왔을 때 대접해주며-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며 그것은 모두의 이득이 되었다.

         

       아.

       이것이 어떻게 무의미하다 할 수 있을까?

         

       가엾은 이에게 베푼 선행은 이어질 것이다.

       재앙에서 구원받은 이는 어려운 이를 도울 것이다.

       그것이 크건 작건 그들은 자신이 도움을 받았을 때처럼, 다른 이들을 돕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어지며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것이다.

         

       물론 악인이 있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도움받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안다.

       그는 믿을 수 있었다.

         

       그 선례가 있지 않은가.

         

       과거 조상들도 같았을 것이다.

       손님으로 맞이하였더니 강도가 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대접받고는 남에게 대접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손님에게 박하게 대접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손님을 대접하고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음식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여유가 없어도 그들에게 차 한 잔, 물 한 잔을 베풀고 그들에게 덕담을 남긴다.

       그것조차 불가능하여도 그들에게 미소나마 베풀기도 한다.

         

       그렇게 이어져가리라.

       재앙에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였던 그의 선의는 그렇게 이어져가리라.

       그것은 대주술 의식으로 재앙을 막아내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지라도, 논문처럼 글자로 남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은 채 마음으로 이어지며 세상을 좋게 만들 것이다.

         

       ‘나의 삶은 가치가 있었다….’

         

       그 자신이 평하기에 그러하였으며.

       자신이 도왔던 사람들이 그러하게 될 것이며.

       이어지는 마음속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내 마지막 목표가 있구나.’

         

       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살이 타는 끔찍한 냄새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흐려졌던 시야도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마음으로 오감을 느낄 수가 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마지막 숨 하나가 남아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마음으로 바란다.

         

       ‘이 화산을 막아주소서. 사람들이 재앙에 신음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이 가득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뻗을 수 있게 하소서. 그렇게 사람들의 손과 손이 이어지게 하소서….’

         

       마지막 숨을 뱉으며….

         

       ‘세상에 사랑이 넘치게 하소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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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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