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62

       그녀가 그녀를 만났던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검고 윤기 흐르는, 마치 끈으로 묶어도 그대로 흘러내려 풀려버릴 것만 같은 아름다운 머릿결에, 장인이 정성스레 세공해 만들어낸 루비를 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

        

       햇살을 본 적이나 있을까 싶은 하얀 피부와, 조금 말랐어도 아름다운 선을 보여주는 나긋나긋한 몸매.

        

       남들과 똑같은 환자복, 똑같은 침상에 누워있는데도 그대로 느껴지는 기품. 물론 그녀가 입원한 곳은 VIP 병실이었고, 누워있는 침상만큼은 ‘남들과 같다’라고 하긴 조금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누구와도 부딪힐 수 없을 것 같은 모나지 않은 성품.

        

       그녀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저 사랑만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녀는 몸이 너무 약해서, 잊을만하면 병원에 왔으니까.

        

       그저 사랑만을 받은 것도 아닐 터였다. 그녀가 병원에 방문할 때 그녀를 간호한 것은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병실을 찾아온 그녀에게 언제나 빙긋 웃음을 지어주곤 했다.

        

       한 밤 중에도 몇 번이나 링거를 갈아야 했다. 필요하다면 진통제를 투여해야 했고, 그녀가 발작하는 것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언제나 밤새 간호사가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를 위해 밤을 새워야 할 때는 그다지 힘이 든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볼 때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상하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때문에 많이 피곤하시죠?”

        

       간혹, 잠이 들지 않고 누워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간호사는 그런 그녀에게 상투적인 어투로 대답했으리라.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인 걸요. 물론 병실을 나오는 순간 간호사는 다시 피곤함에 찌든 표정이 되어 카운터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그녀가 그런 말을 걸어주는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사실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듣고 싶었다.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는 환자와 간호사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서로를 알고 지내는 사람 간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걸요.”

        

       아차 싶었다.

        

       그 말을 환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해야 할 일은 의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돈을 받아서 일하기 때문이건,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건,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는 일과, 본인이 하고 싶어서, 다른 이들이 꺼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픈 환자는 예민한 법이다. 단어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고, 화를 내고, 어떻게든 자신이 아픈 이유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에 한순간 궁금증이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아, 그래, 그랬다. 그녀는 이곳에 그저 누워있을 뿐이었다.

        

       낮에는 사용인이 온다. 하지만 사용인과 그녀가 하는 대화는 그다지 살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용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곤 했지만, 사용인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대답을 건성으로 받아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녀에게 더 이상의 말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함은 그 궁금함을 느낀 것으로 끝이었다. 더 파고들면 상대가 불편해하겠지. 귀찮아하겠지. 아마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

        

       뭐라고 말을 더해야 할까, 아니, 그러지 말자. 더 말을 걸었다간 또 무슨 말실수를 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날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그녀를 뒤로했다.

        

       *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 말을 다시 한번 들었다.

        

       그녀는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병원으로 왔다. 어쩌면 돌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이 병동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녀는 오랫동안 병원에 머물렀으니까.

        

       원인은 불명이었다. 적어도 신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 병명도 모르는데, 그녀는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발작이 찾아왔고, 편안히 누워있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떠는 일이 잦았다.

        

       그녀를 돌보는 일은 갈수록 버거워졌다. 아마 병실이 일류 호텔 하루 입원비에 버금가는 비용의 VIP 병실이 아니었다면 병원에서는 진작에 그녀의 치료를 포기했을 것이다. 더 이상 저희가 손 쓸 방도가 없습니다, 그게 돈 없는 사람에게 병원이 내놓는 대답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집은 돈이 많은 듯했다. 적어도 결혼도 하지 못한 첩의 딸에게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의 돈과 그 후에 생긴 건강 문제를 신경 써줄 만큼의 돈은 있었다. 그녀를 세심하게 돌보아줄 사랑은 없었지만.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녀는, 이번에도 그렇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몇 번 정도, 그녀에게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걸 때마다, 묘한 궁금증을 품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으니까.

        

       둘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선생님.”

        

       어느 날,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걸고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겨우 말을 내놓았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몹시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그녀는 기뻤다.

        

       “제 나이는—”

        

       우연히도, 둘은 동갑이었다.

        

       다소 어색하게 시작한 대화는 의외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약을 교체하고도, 그녀와 그녀는 한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도, 사용인과의 대화보다는 그녀와의 대화를 더 즐겁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둘은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 대화에서 기쁨을 느꼈다.

        

       일이 힘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하던 동료가 그만두어서 갑자기 당직을 덤터기쓰더라도, 동기가 멋대로 약속이 있다며 퇴근해버려도, 그녀는 오히려 기뻤다. 그녀와 대화할 시간이 점점 늘었으니까.

        

       둘은 서로를 점점 더 알아갔다.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그 집에서 살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다가 갑자기 찾아온 친부에게 이끌려 들어가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도.

        

       물론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싫어질 뿐이리라. 자신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그저 밝은 이야기만을 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몇 주 뒤에, 그녀는 다시 병원을 나갔다.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곧 다시 볼 테니까.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일까.

        

       그녀는 그 사람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국내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아니, 전 세계에서도 그 사람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로 돈이 많은 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매매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외모는 모든 사람이 탐낼만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저 단순히 만나야 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일생을 살면서 그 둘이 겹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와 그는 그 둘이 꼭 맞았던 모양이다.

        

       둘은 곧 결혼했다. 그녀가 행복해할수록, 그녀의 병은 나아갔다. 의사는 사실 그것이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래도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올 일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했던 모양이다.

        

       “결혼식, 와 줄래?”

        

       “그래. 당연히 가야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다.

        

       큰 장식 없이, 간소하게 디자인되었지만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땅에 질질 끌리는 것 없이, 그녀는 그저 자기 외모만으로도 우아함을 나타내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를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그녀와 그녀의 인연은, 다행히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그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는 너무나 바빴다. 한 달에도 몇 번이나 해외에 나가 있어야 했고,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곧 다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가 없을 때면, 그녀는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면 열심히 면회를 왔지만, 그것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녀를 돌보는 사용인은 그녀의 친가가 보낸 사용인보다는 살가웠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마음의 병을 고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부탁이 있어.”

        

       “말만 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그 말에, 그녀는 미소 지었다.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구나.”

        

       그녀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혹시, 내 딸의 곁에도, 함께 있어 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면.”

        

       그녀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

        

       일생에서,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검고 아름다운 머릿결과,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붉은 눈동자.

        

       백자처럼 하얀 피부.

        

       아직 어려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분명 자라면 자신의 엄마와 똑 닮을지 모르는 몸.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그녀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그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린아이는 배꼽에 손을 얹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직 너무나 앳되었다.

        

       하지만, 그 행동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그 아이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내의 유언이라서요.”

        

       “괜찮아요.”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의 말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걸요.”

        

       그녀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리오셀님, 후원 감사합니다!

    소중한 첫 후원을 저에게 해 주신 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즐거움의 원천은 언제나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에게서 나옵니다. 글을 쓰더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글은 그저 노트에 쓰인 별 의미 없는 활자일 뿐,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해주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성립할 수 있는 것이죠. 언제나 저의 소설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덕분에 이 글은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때는 책은 반드시 종이책으로 나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웹소설같은 것은 생각도 안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책은 빌려서 읽거나 사서 읽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라이트노벨이나 판타지 소설을 사다 읽거나 친구들과 교환하고, 빌려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책들의 시대가 다 저물어갈때까지 저는 글을 완성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시작만 하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아마, 그것은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반응을 보여주고,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꾸준히 쓰지 못했던 거겠죠. 성격 급한 저는 조금만 써도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웹소설 플랫폼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제가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까요.

    다시 한 번 후원 감사합니다. 소중한 후원은 후에 표지를 뽑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