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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2

     모르가니아 총독, 그러니까 회귀 전의 카르멘은 사람을 지독하리만큼 썼다.

     제국이 왕국을 점령한 뒤.

     그녀는 총독의 자리에 올라, 왕국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평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물론, 말이 좋아 평민이지 사실상 작위 없는 부유층이었다.

     작위를 사지 않거나 사려고 했지만 너무 비싸서 사지 않은, 하지만 경제적 부유함을 바탕으로 지식을 쌓은 계급.

     제국에서는 이들을 두고 ‘부르주아’라고 하기는 하던데, 그냥 제국 입장에서는 적당히 이용해먹기 좋은 땜빵 그 자체였다.

     땜빵.

     속된 표현이지만, 그 쓰임새가 실제로 그러했기에 그 단어가 하등 틀릴 게 없었다.

     그나마 좋게 표현을 해준다면, 그들은 제국의 인재들이 왕국에 침투할 때까지 왕국 행정을 책임질 완충재 역할이었다.

     그래도 그런 이들을 사용할 만큼, 카르멘 왕비는 사람을 씀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고문으로 사람을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그래.

     “13살의 어린 아이를 외무대신 한 명 보내놓고 부모의 품에서 떨어뜨리게 만들다니.”

     나 같은 아이를 무슨 정치 외교의 수 싸움이 펼쳐질 현장에 데리고 가겠다고 할 정도로, 카르멘은 필요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헥스 자작?”

     “네가 어디 평범한 13살이냐?”

     헥스 자작은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나를 피식 비웃었다.

     “자기 아버지를 이용해서 제국의 끄나풀, [그림자]라는 것들을 색출해내고 말이지.”

     “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혹시 저를 따로 부른 겁니까? 그런 거라면 그냥-”

     “아니. 가는 동안 심심해할까봐, 이야기나 하려고. 이번 일이 끝나면 세 명 다 돌려보내 줄 테니까, 알아서 잘 써먹어야지?”

     세 명.

     분명-

     “9번, 18번, 27번.”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몸에 번호가 새겨져 있더구나. 그것도 마법으로.”

     헥스 자작이 한 말이다.

     “제국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만큼이나 첩보 조직을 잘 다루는구나, 하고. 황실의 핏줄이자 사생아를 첩보원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나, 그렇습니까?”

     “알고 있던 게 아니었어?”

     “짐작만 했을 뿐이죠. 백발이라고 다 황실 핏줄이면, 레타르도 제국 황족이게요?”

     “하긴.”

     알고는 있었다.

     “의외네. 나는 네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까지 다 알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어? 황실 핏줄이라서 안 죽이고 우리한테 보낸 거 아니야?”

     “확인하라고 보냈고, 확인이 끝났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흐음…. 뭐,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고.”

     하지만 모르가니아를 상대할 때는 조금도 변수를 줘서는 안 된다.

     “그림자라는 자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더라. 황실 핏줄이 아닌 일반 그림자들까지 있다면, 아마 천 명 정도는 될 것 같아.”

     “모르가니아도 첩보원이 그 정도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고귀한 혈통을 이렇게 카드 한 장 정도로 사용하지는 않거든? 그런 건 왕비님 취향도 아니고.”

     “첩보에 개인 취향이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카르멘 왕비께서 정하신 규칙과 노선으로 첩보 조직이 움직이는 거라고.”

     헥스 자작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네가 걔들을 살려서 보냈으니까, 우리 쪽에서도 살려서 보내는 거야. 잘 정신교육을 시켜서.”

     “…….”

     “혹시 말 안 듣거나 하면 ‘비밀의 방’으로 다시 가고 싶냐고 협박해. 그러면 바로 질질 짜면서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칠걸.”

     “그렇게 울리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공포에 의한 협박과 지배는 황태자의 방식.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보내주신다면, 제가 알아서 잘 쓰도록 하죠. 그러니 다시 마차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집에 도착하면 보육원에 가 있을 건데.”

     “생각해 보니 사랑스러운 동생 레타르와 루비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누아르는 사랑하지 않는구나?”

     “…헥스 자작.”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를 이렇게 납치하듯이 데리고 와야 할 만큼 상황이 급한 겁니까?”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아니지만, 가만히 앉아있는데 발아래에서 물이 계속 차오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헥스 자작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펼쳐놓았던 손가락을 흔든다.

     “한 번, 맞춰볼래?”

     “…주변에 데리고 간 대신들이 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는 않은데.”

     “평상시라면 그렇겠지. 근데 이번 회담의 최고 권력자는 왕비님이 아니라서.”

     “역시, 뛰어내려야겠습니다.”

     나는 마차 문을 가리켰다.

     “무능왕을 모셔야 하는 일이라면,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잠깐! 그만둬. 제발. 나 진짜 너 안 데리고 가면 죽어.”

     “헥스 자작이 죽는 거지 제가 죽는 게 아니잖습니까.”

     “매정한 녀석. 카르멘 왕비가 네 어머니라고 한다면, 나는 정치적 삼촌 정도는 된다고!”

     “제가 어머니는 여럿 있어서 잘 알지만, 삼촌은 한 분도 없어서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요.”

     “하….”

     헥스 자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좌절했다.

     “좀, 살려주라. 13살에게 이렇게 손을 벌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 너도 어느정도 이해했잖아.”

     “말 그대로, 어느 정도는.”

     더 장난을 쳤다가는 헥스 자작이 진짜 위에 구멍이 뻥 뚫릴 것 같아,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농담입니다. 그냥 심술을 좀 부려봤습니다. 원래 오늘 자베스, 엘리 두 사람에게 디저트를 만들어 주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납치를 당해서.”

     “…….”

     “나리아 공주와 제가 전속으로 데리고 있는 화이트 한 명을 말하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디저트는 뭘 먹이려고 한 건데? 연구용 마력초?”

     “말린 솜누스 꽃잎을 올린 파운드케이크?”

     맛있고, 영양적으로도 훌륭하다.

     비록 밀가루와 꿀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솜누스 꽃잎과 반죽 과정에서 함께 들어간 꽃가루가 마나 흡수를 돕는다.

     무엇보다, 아스타시아가 솜누스를 좋아한다.

     내가 즐겨 먹기 때문만은 아니며, 솜누스에 있는 마나를 혀에서 맛있게 받아들이기 때문.

     ‘축복받은 몸이지.’

     나도 솜누스를 씹을 때는 조금 씁쓸한 맛이 나는데, 아스타시아는 그걸 달콤한 설탕처럼 느끼는 편이다.

     마나를 수용하는 체질의 차이인 느낌.

     참고로 나리아는 매운맛이다.

     “그렇군. 나는 지브롤터 도련님의 데이트를 방해한 건가?”

     “예. 아버지였으면 칼부터 나갔을 겁니다.”

     “너는 언어로 아주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말이지.”

     “이 정도로요?”

     “내 입장을 다 알고 있으면서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는 게 악질 그 자체라서 그런다. 됐냐?”

     헥스 자작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한탄했다.

     “외무대신이 왕국과 제국, 두 나라의 화평이라는 역사적인 자리를 위해 일하셔야죠.”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운명입니다. 받아들이세요.”

     “하아아….”

     헥스 자작이 다시금 깊게 한탄했으나.

     “그러면, 네 의견을 좀 물어보마.”

     “예.”

     “지금 이 상황,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지금은 신세 한탄이 아닌, 제대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찾으려는 실무자의 한탄이다.

     “저는 지금 이 마차에 탄 지 30분밖에 안 되었는데요.”

     “다 알고 있잖아.”

     “뭘 다 알고 있습니까. 무슨 제가 미래라도 읽고 있는 줄 아십니까?”

     “아니야?”

     “진짜 진지하게 그렇게 물어보시면, 묻는 제가 더 황당합니다.”

     미래를 읽는 것도 보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어느정도 알고, 미래를 경험했기에 사람들의 성향을 알고, 그게 현재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추론할 뿐.

     “세이레네 백작령의 소식이라면 그냥 소문을 들은 게 전부입니다. 그것도 아마 이틀 전 일들이 최신일 겁니다.”

     “…….”

     “진짜로요. 제 어머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왜 어머니를 걸었다고 하는 말에 신뢰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지…? 분명 신뢰감이 들어야 하는데.”

     “아버지도 걸죠.”

     “후.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천하의 패륜아가 아닌 이상.”

     헥스 자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첫 번째. 카르멘 왕비께서는 네가 옆에서 제국어 통역을 해주기를 바라신다.”

     “자작이 더 잘하시지 않습니까? 제국어.”

     “동시통역은 무리야.”

     부담감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걸까.

     “일단 카르멘 왕비께서 제국의 통역마법기를 믿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네요.”

     “그렇지. 적이 마련한 마도기계같은 거에 의지할 수는 없잖냐.”

     보험의 역할이든 뭐든, 일단 합당한 이유다.

     “하지만 고작 동시통역 하나로 저를 부른 겁니까? 왕도에 제국어 동시통역이 가능한 사람 하나 정도는 있을 텐데.”

     “지브롤터의 대리인으로서 협상에 참가한다는 상징?”

     “…최근에 편지를 좀 자주 쓴다 싶더니, 물밑에서 아주 깜찍한 짓을 벌이셨군요.”

     “이야, 그걸 바로 알아차리네. 역시 대단해.”

     “쓰읍.”

     바로 이해했다.

     아버지가 나를 팔았다.

     “어떻게 아버지라는 작자가 아들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 거지.”

     “복수?”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마 컨테이너를 끌게 만든 것 때문에?

     전신 갑옷으로 화이트들을 속였을 때 가면을 손으로 두드리고 반말로 마부 취급을 한 것 때문에?

     ‘둘 다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그걸로 설마 나를 이렇게 몰래 일하라고 보낸 거라면, 돌아가는 즉시 아버지에게 아주 사소한 복수를 하리라.

     “모든 일이 끝나면, 카르멘 왕비님께 한번 지브롤터에 다녀가시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나리아와 한번 만나라고?”

     “그것도 있지만, 아버지보고 한번 만나라고 하게요. 후후.”

     “…….”

     카르멘 왕비와 단둘이 와인을 마시는 것에 어머니가 다소 답답해하겠지만, 뭐 그건 사소한 문제.

     ‘솔직히 둘이 눈 맞아서 어떻게 된다고 하면 어쩔 거야.’

     카르멘 모르가니아가 지브롤터의 완벽한 편이 된다는 건 어머니에게도 좋은 일이니.

     “그레이. 나리아 공주가 왕에게 노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카르멘 왕비께 한번 지브롤터에 다녀가라고 내가 어떻게든 해보마.”

     “…왠지, 제안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만.”

     “그래도 들어. 마차에서 안 뛰어내리고 있으니까, 듣겠다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도대체 뭐가 자작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겁니까? 당연히,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그래. 근데, 그게.”

     헥스 자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왕국과 제국이 서로 화해하자는 의미로, 파티부터 열자고 하더라. 우리 위대하신 국왕 전하께서.”

     “……가면?”

     “그래. 그것도, 가장무도회로.”

     “허….”

     하얀색, 고풍스러운 연극에서 쓸 법한 눈 쪽만 가리는 반가면.

     “네가 정체를 숨기고 카르멘 왕비의 파트너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국왕 전하께서 멀쩡히 계신데도 불구하고?”

     “괜찮아. 또 술만 죽어라 퍼드시겠지. 제국에서 선물로 새로 만든 리큐르를 잔뜩 가져올 테니.”

     “뭐…그러면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무능왕이 이런 기행을 벌이는 게 답답하고 때때로 죽여버리고 싶기는 해도, 예상 못 한 문제는 아니다.

     “모르가니아에서 이 정도 변수도 제어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더군다나…대공께서도 같이 참가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

     노스트럼의 또 다른 마스터 또한 협상-이었어야 할 연회에 참가할 예정.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든, 딱히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흐음. 대충, 예상이 가네요.”

     당연히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제국 측에서는 노발대발해야 했을 터.

     “제국 입장에서는 왕국과 평화적인 분위기 조성에 신경을 쓰다가 해군 대장을 잃었고, 심지어 추모식까지 열겠다면서 엄숙한 애도의 장을 만들고 있죠.”

     무능왕의 제안은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웃집 장례식장 열리는데, 그 와중에 집으로 초대해서 광란의 음주 파티를 즐기자고 하는 꼴 아닙니까.”

     “맞아. 정확해.”

     세상에 이보다도 미친 인간이 또 없다.

     “그리고 여기가 진짜로 머리 아픈 부분인데….”

     “황태자가 받아들였겠죠.”

     정정.

     “사람 죽은 건 죽은 거고, 오히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왕국과 제국이 서로 화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한 명 있기는 하다.

     “사람 죽었는데 그거랑 관계없이 파티하자는 우리 왕. 그 죽음을 이겨내고 마음에 품으며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황태자. 이야, 이렇게 심각하게 대비가 될 줄이야.”

     우리 쪽과 비교하면 심각할 정도로 유능해서 문제지.

     “장례식을 준비해야 하나 했는데, 축제를 열게 생겼어.”

     “축제 맞죠. 기나긴 왕국과 제국의 전쟁이 이제 끝이 날 거라는 축제.”

     “…….”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제국에 저 같은 인간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분명.

     “사람 하나 죽은 걸로 두 나라가 손을 잡게 되었다면, 비로소 의미 있는 죽음이었다고.”

     “…….”

     “비참하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가치 있는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왕국과 제국의 추모 겸 연회는 ‘가면무도회’로 결정되었다.

     “그보다, 카르멘 왕비께서 저를 콕 집어서 부른 이유가 있다면 역시 그거겠네요.”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황태자 한 명이 참석하는 걸로 되어있으나.

     “에르윈 회장님께서도 오시는 겁니까?”

     당연히, 아래에 따라오는 수행원도 있기 마련.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에르윈 회장까지 온다면, 순순히 카르멘 왕비를 옆에서 보좌하는 수밖에.

     “오랜만에 어머님과 만나는 날이니, 기쁘게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만나서 기쁜 건, 두 어머니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버님도 만날 수 있겠네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짧은 안내)

    하나. 11월 3일 플러스 신청(유료화) 예정입니다.

    둘. 11월 3일 오후 9시에 카르멘 왕비 일러 공개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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