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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2

       승강기에서 내린 이후 키르린은 계속 디안을 따라다녔다.

       

       어차피 이곳은 안전이 보장된 관광지이며 여러 교수와 조교들이 아이들을 통제하고 있기에 교장이 딱히 나서서 뭔가를 할 일은 없었다.

       

       해설은 성 관광관리과의 가이드가 하고 기타 부연설명은 이스메라 교수가 주도중.

       

       그래서 키르린은 마음 놓고 디안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학생도 아니고 앞에 계셔야지 왜 자꾸 여기로 오세요?”

       

       “으응. 낙오하는 애들 없는지 뒤에서 보고 있어.”

       

       디안의 의문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키르린은 배시시 웃었다.

       

       디안이 더 묻기를 포기하자 키르린은 쫄래쫄래 디안의 뒤를 쫓았다.

       

       “마왕군이 성을 점령하며 당시 여기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요.”

       

       성 안뜰에서 가이드가 잠시 멈춰서서 늙은 관리인들을 소개했다.

       

       여기 이브로니크 성의 마왕군 포로로 잡혀 있다 구사일생한 참전용사라고.

       

       혹시나 다크엘프인 자신을 보고 화를 내거나 할 수도 있어서 키르린은 디안의 등뒤에 바짝 숨었다.

       

       “자, 이제 본성으로 들어갈게요!”

       

       대열이 모두 본성으로 들어가고 대열 후미의 디안과 키르린도 막 참전용사의 앞을 지나치는데.

       

       그때 갑자기 참전용사들이 흥분하며 디안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으윽! 큰일났다!”

       

       손에 날카로운 전정가위를 들고 오는 참전용사들의 기세에 키르린은 겁을 더럭 집어 먹었다.

       

       “어으윽…. 으윽….”

       

       그러나 전정가위가 키르린의 배를 찌르거나 하는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참전용사들이 전정가위를 떨어뜨리며 디안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키르린은 그 모습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디안과 참전용사들은 외모만 봐도 거의 할아버지와 장성한 손자 정도의 나이차.

       

       한 명은 특임아카데미의 전투수석이고 다른 이들은 보훈 대상자로 고용된 노인이다.

       

       둘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교집합도 없는데….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런 참전용사들을 디안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며 어깨를 감싸주고 있었다.

       

       “저는 아카데미의 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전적지 답사로 온 거예요. 그때랑은 너무도 달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디안은 계속 무언가를 얘기했고 참전용사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학과 교수들에게 듣기로 디안이 여기 탈환전 참전용사라고 들었는데, 아마 그때 인연이 있었나 보다.

       

       서럽게 우는 늙은 참전용사들을 다독이는 디안의 모습에 순간 성스러움마저 느낀 키르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디안은 늘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하며 마냥 쾌활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 저런 면이 있었다니….

       

       “아….”

       

       그때 막 대열에 합류한 펠레미아는 디안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흘렸다.

       

       

       # # # # #

       

       

       키르린이 훌쩍이며 눈물을 닦는 동안 펠레미아는 넋을 잃고 홀린 듯이 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펠레미아는 막 마야 사제에게 신성치료를 받고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 터였다.

       

       가이드가 라이너스 경의 침투로를 설명할 때 갑자기 또 ‘그 기억’이 떠올라 극심한 현기증과 욕지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란 바로 며칠 전 술집에서 봤던 디안의 내면.

       

       디안의 내면을 보고 까무라치게 놀란 펠레미아는 술집 밖으로 뛰쳐나가 담벼락에 요란하게 구토를 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펼쳐진 참상에 펠레미아는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제아무리 심리전의 대가로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절대 동요하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방금 내가 본 건 대체 뭐지? 누구의 기억이지? 설마 디안 교수의…?

       

       하지만 말도 안 돼…. 그건 디안 교수의 기억이 아니야….

       

       “입 닦아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펠레미아는 깜짝 놀라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 힘을 지닌 손이 그런 펠레미아의 팔을 붙잡아 지지해 주었다.

       

       “자, 입 닦아.”

       

       어느새 따라나온 디안이 펠레미아에게 휴지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펠레미아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두려운 눈으로 디안을 쳐다봤다.

       

       “교수님은… 누구신가요….”

       

       “아까 다 봤을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교수님의 기억이 아니에요. 라이너스 경의 기억이지요.”

       

       마왕군에게 점령당한 이브로니크 성의 절벽을 기어오른 이는 대륙의 영웅 라이너스 경이 유일하다.

       

       분명 그건 라이너스 경의….

       

       펠레미아는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10년 전 마족들을 심문하며 접하게 된 미상의 인간 두 명에 대한 진술들.

       

       늘 같이 붙어 다니던 노랑머리와 갈색 더벅머리.

       

       노랑머리는 라이너스 경이 확실하고 그렇다면 그 갈색 더벅머리는 정말로….

       

       “교수님은… 라이너스 경의 동료였군요….”

       

       “맞아. 하전사 시절부터 라이너스랑 같이 움직였어.”

       

       의외로 순순하게 디안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방금 네가 봤던 건 이브로니크 성 탈환전 때 라이너스와 함께 절벽을 기어올랐던 때의 기억이다.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지?”

       

       “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도 그때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물며 후방에서 심리전을 전담하던 네가 감당하기에는 굉장히 벅찬 광경이었을 거다.”

       

       펠레미아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는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나는 8군단 하전사로 입대해 아보카 왕국에 상륙해서 라이너스와 처음 만나 이후 둘이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어. 물론 대부분은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당사자라고는 해도 제국의 기밀을 함부로 떠벌릴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교수님께서는 마왕사살특임대까지도….”

       

       “황성에서는 내가 부임할 때 아카데미에 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지.”

       

       펠레미아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디안은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아직 물어본 적 없거든. 정치적 목적인지 아니면 단순히 아카데미 위계질서 유지 차원인지. 그렇지만 황성에서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그렇습니다….”

       

       “나도 황성과 같은 생각이야. 나는 쓸데없는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 펠레미아 네가 내게 보이는 그런 관심 말이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펠레미아는 그것을 ‘귀찮게 하지 마라’라는 경고로 제대로 이해했다.

       

       “그러니 네가 오늘 본 기억과 내가 한 말은 오직 너만 알고 있도록 해라.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거야. 너처럼 직접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은.”

       

       디안의 말은 사실이다.

       

       지금 당장 펠레미아가 술집으로 뛰어 들어가 다른 교수들을 붙잡아 놓고 내가 방금 봤는데 디안 교수가 라이너스 경과 함께 이브로니크 성 절벽을 기어 올랐다더라, 알고 보니 하전사 시절부터 계속 함께 활동했다더라, 사실 디안 교수는 라이너스 경과 더불어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었던 거다, 라고 떠들었을 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진실이라도 너무 터무니없으면 거짓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제 다 됐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언제든 내 기억을 펼쳐줄 테니까.”

       

       “사, 사양하겠습니다….”

       

       겁에 질린 펠레미아가 더듬거리자 디안은 크게 웃으며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후로 펠레미아는 디안의 과거를 의심하는 발언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꺼낼 마음도 없었고.

       

       디안의 경고도 그랬지만 자신이 들여다 본 그 장면이 너무도 충격적이라서.

       

       행여나 괜한 말을 했다가 연쇄작용으로 그 기억들이 딸려 올라오는 게 펠레미아는 너무도 무서웠다.

       

       그래서 여기 전적지 답사도 오지 않으려 했지만 아카데미 창립 이래 첫 답사에 빠질 수는 없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대열의 뒤를 좇아 안뜰로 들어온 펠레미아는 거기서 참전용사를 위로하는 디안을 보게 되었다.

       

       제국 곳곳에는 대륙의 영웅 라이너스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나 조각상이 넘쳐난다.

       

       대혼란에 빠진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후광을 비추며 인간연합을 이끈다거나 마왕의 잘린 목을 들고 있다거나 하는 뭐 그런 것들.

       

       펠레미아는 그러한 것들을 많이 봐왔지만 감히 단언컨대 지금 디안을 볼 때만큼의 감동을 느낀 적은 없었다.

       

       좁은 협곡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빛을 맞으며 참전용사들을 안아주는 디안의 모습은 라이너스 경을 찬양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만큼이나 아름답고 신성했다.

       

       그제서야 펠레미아는 깨달았다.

       

       전투수석교수 디안은 라이너스 경과 함께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자신이 달성한 모든 업적을 등뒤에 남겨둔 채 조용히 살아가는 무명의 영웅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을 기리는 사소한 기념비 하나조차 없다는 것을.

       

       그때 본 그 끔찍한 참상에만 매몰되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펠레미아는 안경을 벗고 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생각했다.

       

       디안 교수의 뜻대로 그의 비밀은 나 혼자 조용히 간직하도록 하자.

       

       나중에 디안 교수가 혹은 황성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고작 나 따위가 저분에 대해 떠벌리는 건 천박한 모욕이며 지독한 무례나 다름없으니까.

       

       펠레미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자신이 행한 위업의 보상도 인정도 찬사도 바라지 않으며 보통의 삶을 사는 구원자.

       

       이것은 자의로 타의로 숨겨지고 잊혀진 영웅에게 펠레미아가 보내는 아주 작은 경의였다.

       

       그러나 디안을 존중해 진실을 함구하려는 펠레미아의 의도와 달리 이미 다른 몇몇 사람들도 그 모습을 목격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찌어찌 전개속도를 조절해서 6.25에 참전용사 관련 내용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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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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