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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28

    <628 – 오크노디의 테마파크(3)>

     

    세계의 변두리, 변경지대의 모 은신처.

    혹여나 벌어질지 모를 마나제어실패에 따른 암흑마나 폭주 및 마력재해사태에 대비해 인간들의 세력권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디스트로이어.

    그는 살아 숨 쉬는 매 순간, 모든 호흡에서 삶의 소중함을 느꼈다.

     

    ‘호흡이란, 시간이란 이렇게나 귀중한 것이었나.’

     

    살아남기 급급한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복수만을 꿈꾸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모든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이, 인생의 아름다움이 다시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는 과분한 평화로군.’

     

    그는 많은 것을 상실했다.

    이 평화를 곁에서 함께 누려야 할 소중한 소꿉친구는 이미 죽었다.

    손 많이 가는 제자에게 남길 유언도 보낸 뒤.

    이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준비뿐이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마지막 순간.

    이 죄 많은 육신에 축적된 암흑마나를 끌어안고, 세상에 가급적 적게 피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디스트로이어가 자신의 생의 끝을 매듭짓기로 결정한 방식이었다.

     

    ‘쓸데없이 예쁜 장소를 골라줬군, 명호.’

     

    하얀 튤립이 가득한 들판.

    뽈뽈거리며 삐뚤삐뚤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형편없이 날아다니는 작고 연약한 나비.

    이 모든 광경은 그의 저승길 동무로 삼거나 지워버리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메마른 황야.

    까마득한 절벽.

    지옥구덩이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험지.

     

    자신의 최후는 그런 곳이 어울리건만.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최후에 바치는 명호스님 나름의 예우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기는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못다 이룬 아카데미를 향한 복수, 처분하지 못한 암흑물질, 구심점을 잃고 방황할 도적길드, 기어이 용사의 씨를 훔쳐간 브론즈 교수의 아이.

     

    이 모든 것을 오크노디에게 전달해줄 전령이다.

    항의한다고 들어주지도 않았겠지.

    덕분에 그의 마지막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공기는 산뜻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소리는 청아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며 눈을 감은 디스트로이어.

    그의 귓가에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세계의 변경 지대에 서식하는 차원괴수라도 나타난 건가?’

     

    어디선가 차원과 차원 사이의 공간을 성급하게 연결하고 강제로 길을 잡아당기며 날아오는 차원문 생성주문의 간이전개의 여파가 느껴진다.

    대기가 비명을 지르듯이 진동하고, 자연마나가 급박하게 요동치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거, 변경에도 참 대단한 괴물이 숨어살고 있었군.’

     

    저런 것이 세상에 풀려나거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가늠하기도 어렵겠지.

    니알라토텝이 서부삼국의 도이치 왕국 평원에 남긴 골칫거리 드레이크보다 더한 후환이 생길 거다.

     

    그래, 어디 용사가 무슨 팔자 좋은 죽음이냐.

    나 같은 사람은 싸우다 죽는 게 맞다.

     

    ‘마지막으로 용사다운 일이나 해볼까?’

     

    너무 많은 암흑마나를 짓누르고 있어 몸을 가누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체마나보다 여유분을 확보하지 못한 육신.

    움직이지 않는 발을 대신하여 왼손으로 목발을 짚고 일어서며 말을 듣지 않는 목을 오른손으로 비틀어 창가로 고정한다.

     

    <암흑살광>

     

    마지막 생명을 불사르며 전개하는 힘은 적과 동시에 자신의 신체장기도 파괴한다.

    암흑마나에 골수까지 오염되더라도 신체를 재생할 수 없도록 적과 자신을 동시에 멸하는 자멸기.

    가장 용사다운 숭고한 기술이 발현되기 직전, 마침내 열린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손을 보자마자 디스트로이어가 급히 암흑마나를 흩뜨렸다.

     

    쿨럭.

     

    순간의 무리로 인해 울혈이 일었지만 그는 이 힘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결코 찾아와서는 안 되는 아이.

    오크노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명호. 약속을 어긴 건가…!”

    “약속을 어긴 건 교수님이죠! 정양하고 나서 다시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멋대로 죽으면 어떡해요! 이런 유산은 필요 없다구요!”

    “오크노디. 이 몸의 수명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다고 한들 서로 힘들어질 뿐임을 어찌 모르…”

    “흥이다.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세요!”

    “…계약서?”

     

    오크노디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종이들.

    배낭배낭에서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쏟아져나오는 종이들은 소유권 습득 계약서였다.

    띠링.

    띠링.

    그가 소지하던 마나보드는 계약서에 담긴 술식을 자동으로 해석하여 그에게 제시된 계약서들의 목록을 알려주었다.

     

    ━━━

    [계약서 목록]

    기초종합무기세트 소유권

    기초종합방어구세트 소유권

    기초종합악세서리세트 소유권

    기초종합남성복사계절세트 소유권

    기초종합여성복사계절세트 소유권

    기초종합어린이남성복세트 소유권

    기초종합어린이여성복세트 소유권

    그 외 기초종합세트 소유권 1985장

    ━━━

     

    참 많기도 하다.

    뭐 하러 이런 걸 가지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크노디는 장난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거 사인 안 하면 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디스트로이어의 오른손 주먹이 오크노디의 머리를 쿵 내리쳤다.

     

    “응악!”

    “이래도?”

    “씨잉. 폭력반대!”

     

    폭력적인 계약서의 물량을 들이민 당사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어디 오크노디가 별난 것이 하루이틀 일이던가.

    디스트로이어는 마지못해 팬을 쥐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다.

    제자의 마지막 미련을 들어준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몸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지만 그만큼 내가 이 아이를 제자로서 소중히 생각했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저승으로 가는 길.

    무엇을 더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죽고 나면 전부 주인 없는 물건이 되어 다시 오크노디에게 돌아갈 것을.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몸도 가벼워졌다.

     

    ‘어깨 하나는 무겁군.’

     

    하도 사인을 해서 지친 탓에 목발도 내리고 목도 가볍게 풀며 어깨를 스트레칭하듯이 가볍게 회전했다.

     

    “음?”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비대화한 암흑마나가 영압만으로 인체 장기를 짓누르며 신경이 마비되고 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좀 전까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며 목발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다리가 멀쩡하게 땅을 밟고 있었다.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저리는 느낌도 없었다.

    좌로 한 바퀴, 우로 한 바퀴.

    고개도 아주 잘만 돌아갔다.

     

    “이게 대체 무슨…?”

    “흥. 아직 한참 더 멀었거든요? 허접교수님은 얼른 이거나 더 사인하세요!”

     

    ━━━

    초급종합세트 소유권 355장

    ━━━

     

    초급종합세트에 사인을 하는 순간, 디스트로이어는 먼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 니알라토텝과 함께 어설픈 용사행이 나섰던 시절, 다양한 장비를 습득하고 새로운 장비를 다룰 때마다 느꼈던 기술이 향상되고 몸이 능숙해지는 기이한 ‘상승감’.

    그 풋풋한 감각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

    중급종합세트 소유권 27장

    ━━━

     

    중급종합세트에 사인을 하는 순간, 디스트로이어는 강적들을 쓰러뜨리고 취한 보상들이 떠올랐다.

    어떤 보상들은 보상 그 자체의 힘과는 별개로 습득한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넘치고 인간으로서 더욱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의 고양감이 그와 같았다.

     

    ━━━

    고급종합세트 소유권 2장

    ━━━

     

    두 장의 고급종합세트 소유권에 사인하는 순간, 디스트로이어는 강력한 마도구를 취할 때의 잊을 수 없는 감회를 다시금 느꼈다.

    오래도록 정체되었던 벽을 깨고 급이 다른 경지에 발을 들이는 승급의 해방감이 몰아닥쳤다.

     

    쏴아아아아!

     

    그것은 비단 감각의 착각만이 아니었다.

    전선의 밑바닥, 인체주요장기의 말단까지 내몰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생체마나가 어디선가 나타난 원군에 힘입어 암흑마나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어떤 암흑마나에도 오염되지 않은, 극도로 청량한 자연마나의 등장!

     

    ‘천운이 따른 것인가?’

     

    디스트로이어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즉시 자연마나를 축으로 삼아 마나연공법에 돌입했다.

    암흑마나에 장악당한 주요장기를 탈환하고 점차 군세를 불려나간다.

    지나치게 오염된 생체마나를 순수한 자연마나와 합일하여 고속으로 회전시켜 마치 원심분리기로 무게에 따라 성분을 나누듯이 암흑마나를 분리시켰다.

     

    <부여>

     

    디스트로이어는 내부의 탁기를 손에 집히는 모든 물건에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오크노디가 냉큼 검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암흑마나야 얼마든지 넘쳐난다.

    이 사악한 힘을 통제 가능한 양만큼 조절해서 체외로 배출한다.

    어지간한 물건은 그 힘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대지가 오염되고 공기가 썩어 문드러지며 자연 그 자체가 적대적으로 변모하고도 남을 위력이다.

    그러나 오크노디가 넘긴 물건은 어지간한 물건이 아니었다.

    축성받은 성검.

    신성이 깃든 신물.

    신의 강력한 힘은 하등한 암흑마나를 실시간으로 정화해나갔다.

    자신감을 얻은 디스트로이어가 더 많은 암흑마나를 배출하고, 이에 체내 마나벨런스가 수복되어 한번에 배출하는 양은 더욱 늘어났다.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신체의 수복과 암흑마나 체내비율의 감소로 비롯되는 선순환.

     

    치이이이이!

     

    성검에 깃든 신의 힘조차도 위태로워질 정도로 더럽혀질 즈음, 디스트로이어가 눈을 떴다.

    이미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칠색의 광채, 일곱 속성의 자연마나가 그의 눈에 별처럼 떠오르며 회전하더니 암흑마나가 빠져나간 주요장기에 포진했다.

    지나치게 많은 마나를 수용하며 늘어난 신체장기는 전보다도 더 많은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는 마나수용량의 증대로 이어졌다.

     

    기프트 아카데미에 발을 들인 첫 순간보다도 암흑마나와의 오랜 사투로 더욱 향상된 마나제어술.

    니알라토텝과의 용사행을 끝마친 순결한 육체를 지녔던 과거보다도 많은 마나량.

     

    두 가지 변인이 합쳐지며 디스트로이어는 마나의 격동이라 부를 정도로 대량의 자연마나를 신체에 받아들이고 압축하기 시작했다.

    세간에서 소위 말하는 무인들의 꿈의 경지.

    정순지력으로 속세의 탁한 몸을 정화하는 탈아지경.

    환골탈태의 기연이 그에게 찾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크노디 테마파크 계약서 수집보상 : 환골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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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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