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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3

       최나경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다시 떴다.

        

       긴 회상이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었다.

        

       남몰래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가슴 아린 일이다. 사실, 그녀와 최나경이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아주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집안이 최나경이 접근하기에는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집안이었고, 그 집안에서 딸이 자신들과 원하는 집안과 결혼하기를 바랐던 것도 원인 중 하나이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원치 않던 맞선에서 그녀는 자신의 맞선 상대에게 반해버렸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원치 않았을 만남이었는데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아니, 그런 것들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최나경이 그녀에게 있어 제일 우선인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그저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 것.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렸던 것.

        

       그녀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해보지 못했던 것.

        

       그녀와 거리가 멀어질 것이 너무 무서워, 한 걸음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

        

       어쩌면 그녀의 손을 잡고, 멀리멀리 떠나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서, 그녀가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그 모진 일들을 대신 막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나경은 결국 그 모든 일 중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남은 짧은 시간마저 그렇게 속절없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회장님이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은 이미 자신의 품에서 사라가 떠나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하.”

        

       고작 그 한마디에 과거를 떠올리고 우월감을 가졌던 것이 우스웠다.

        

       사라 주변의 안전망을 그토록 촘촘하게 짜올렸는데.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조건을 쌓아 올리고, 넘보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두었는데.

        

       그 모든 장벽을 헐어버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이어야 했을 텐데—

        

       “…….”

        

       최나경은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가늘게 뜬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크게 뜨면 서글서글하고 순해 보이는 그 눈은, 누군가를 노려볼 때만큼은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수년 전, 세간에서는 최나경과 전 회장의 결혼을 두고 사실 둘이 불륜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 그녀의 그 날카로운 눈과 사라의 치켜 올라간 눈을 두고 사실은 사라가 최나경의 딸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최나경은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으니까.

        

       결혼해서도, 둘의 관계는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일 뿐이었다. 회장은 사라의 어머니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최나경은 그저 자신이 한평생 사랑한 한 여자의 흔적 곁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둘은 한 번도 몸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회장도, 최나경도 사랑하는 이는 한 명뿐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하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최나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들이 앉아있는 곳은 고급 세단의 뒷자리였다. 기사는 아직 차에 타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차 안에는 그녀와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만 들어갔다. 비싼 차인 만큼, 작게 이야기하면 바깥에서 어떻게 들을 방법은 없었다.

        

       최나경의 그 말을 듣고 흠칫 어깨를 떤 양혜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그것을 바라셨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한다고.”

        

       “……예.”

        

       양혜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이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보았던 최나경보다도, 지금 옆에 있는 최나경이 더 무서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 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 시체를 치우는 데는? 경찰이 수사를 조기 종결하고, 사건을 미제로 버려두게 만드는 데는? 얼마나 들지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유진 그룹의 회장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당신이 할 일이었을 텐데.”

        

       “…….”

        

       양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

        

       최나경은 한동안 양혜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차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양혜인은 갈수록 숨을 쉬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마침내 최나경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해고되었습니다. 그 옷은 벗어두고, 짐을 챙겨서 저택을 나가도록 하세요. 더 이상 사라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퇴직금은 유진 그룹에서 제대로 챙겨드릴 겁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관심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양혜인은 숨을 길게 내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차 문을 열었다.

        

       “아, 그래.”

        

       갑작스러운 최나경의 목소리에, 양혜인은 차 밖으로 몸을 반쯤 뺀 채 굳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저택 부지 안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발설 금지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죠? 혹시 돈이 더 필요한가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최나경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양혜인은 어째서인지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저를 고용해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최나경은 대답이 없었다.

        

       양혜인은 차 바깥으로 나왔다. 옆에 서서 대기하던 기사가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곧장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차는 출발했다.

        

       양혜인은 그곳에 못 박힌 듯, 잠시 서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약 3년 동안 지냈던 이 저택에, 더 이상 그녀가 있을 곳은 없었다.

        

       “…….”

        

       그녀는 한동안 멀어지는 차의 뒤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손은 모으고, 허리는 꼿꼿했다. 해고당하긴 했지만, 이 저택을 나가기 전까지 그녀는 사라의 전속 메이드였으니까.

        

       *

        

       최나경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나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최나경이 옆을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니라 ‘예사라’가 올려다본 것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 들었던 감정은, 조바심이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일으켜야 해. 지금 보지 못하면 앞으로 다시 얼마나 지나야 오실지 몰라.

        

       ‘어머님’을 향해, 예사라가 움직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바로 옆에 하늘이가 있었다.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나를 보고 있는 하늘이가 있었다.

        

       우리 둘이 갈망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예사라는 이제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자신의 가족이자,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던 최나경을 원했다.

        

       나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옆에 하늘이가 앉아있었다. 내가 예사라의 생각대로 하면, 하늘이가 크게 상심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이뿐만이 아니다. 신소희와 이수아도 이 자리에 있었다.

        

       학교에서 나를 무시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친구들.

        

       문이 조용히 닫히고 나서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쉴 수 있었다.

        

       “사라야!”

        

       옆으로 쓰러지려는 내 몸을, 하늘이가 받아주었다. 어깨가 그대로 노출되는 의상을 입고 있어 그랬는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몸으로 느껴졌다.

        

       “사라야!”

        

       신소희와 이수아가 있던 소파 쪽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모두 나를 향해서 달려왔다. 얼른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어깨를 잡았다.

        

       “예사라, 잠깐만. 나 좀 봐.”

        

       내 어깨를 잡은 신소희가 말했다.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격하게 요동치던 시야가 서서히 잡혀간다. 하얗게 물들었던 머릿속이 조금씩 다시 원래의 색을 물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평소에 저 인간이 어떤 짓을 했길래……”

        

       “나, 나는…….”

        

       나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그렇다. 모른다.

        

       나는 예사라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다.

        

       처음에는 회장을 쳐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냥 바깥으로 도망가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인연을 만들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사라가 정말로 그것을 바랄까?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과— ‘어머님’과 헤어지는 것을 바랄까?

        

       그래, 분명, 증오하는 감정은 있었다.

        

       하지만 예사라는 결국 어느 한쪽의 감정을 쳐내지 못했다. 증오한다는 마음과, 사랑한다는 마음이 계속 부딪히다가, 결국 그 둘을 모두 취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

        

       그것은 단순히 도망가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악의로, 상대를 상처 주고자 한 행위.

        

       ……어쩌다가 나는 그 행위를 방해해버린 훼방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계속해서 그 행동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그 인생에 계속해서 간섭할 권리가 있을까?

        

       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구 뛰면서 자신의 감정을 직접 부딪치던 심장은, 지금은 아주 평온하게 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사라가 정말로 아직 이 몸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은 없다.

        

       “이런 집, 나와버려.”

        

       하늘이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그 사람, 정상이 아니야. 차라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는 편이 나을 거야.”

        

       마치 자신이 함께 가 주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

        

       나는 잠깐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도망가야 할까? 그게 더 좋은 방법일까.

        

       “……아니.”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까지,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2달이 훌쩍 지나는 동안에도 사라의 인격은 한 번도 표출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진짜로 죽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방금 심장이 마구 뛰고, 최나경에게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느꼈던 것은 그저 몸에 각인된 본능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사라가 이 몸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했다.

        

       이 몸은, 어쨌거나 나의 몸이 아니다.

        

       설령 그 주인이 이 몸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날 그 유서를 읽으면서.

        

       “앞으로도, 포기하면 안 돼.”

        

       “사라야…….”

        

       내 말에, 하늘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래. 포기하면 안 된다. 혹시라도 이 몸 안에 아직 사라가 남아있다면, 어쩌면 본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가 정말로 있는지, 아닌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한 인연이었던 최나경과 만나는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나는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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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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