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Home EP.63 EP.63

EP.63

       “미쳤니?”

       

       리디아와 카렌을 데리고 쪼르르 달려가 엘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내 정신상태에 대한 의심이었다.

       

       너무해라.

       

       “엘리.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어. 안 돼. 애초에 이런 일에 요나 네가 끼어들 이유가 없잖아. 높으신 분들한테 맡겨두라고.” 

       

       “그 높으신 분이 우리 편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것도 모른 척 조용히 살아가. 요나 특기 중 하나잖아? 적당히 상황에 맞춰 살면서 이득만 쏙쏙 빼먹는 거. 이번에도 그러면 돼.”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까지는 그래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

       

       1층의 계층 수호자 최초 토벌은 내가 먹거나, 불가능하다면 주인공이 먹어야 한다.

       

       아니, 엘리나 리디아도 좋다. 차라리 생판 남이라도 건실한 성격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배가 아프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지만 참을 수 있다.

       

       황혼을 삼키는 자의 손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스윽 엘리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예 거리를 없앴다.

       

       엘리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는 소리다.

       

       바로 앞에서 끌어안은 터라 리디아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큼직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자세.

       

       부드럽다기보다는 탄력 있는 감촉이 얼굴을 감싸온다.

       

       하지만 이 판 그레이브에서 내가 엘리 가슴에 코박죽 한 건 그리 엄청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좀 진한 스킨십에 불과할 뿐이지.

       

       중요한 것은 내 배가 엘리의 고간에 닿았다는 것, 그리고 내 고간은 엘리의 허벅지 위를 비비고 있다는 것이었다.

       

       “……!”

       

       스턴이라도 걸린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버린 엘리. 그런 엘리의 품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자 특유의 살냄새와 늑대 수인의 털 냄새가 섞인 기묘한 체향.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둘 다 좋은 냄새라 두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향기였거든.

       

       내 숨소리를…정확히는 내가 자신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빳빳하게 솟아오른 귀. 경직된 꼬리. 맹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정처 없이 흔들렸으며 코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 가호로 받은 향기로운 체취도 열일하는 모양이다.

       

       뱀 앞에 선 쥐처럼 빳빳한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엘리. 

       

       반면 이쪽에서는 먹잇감을 조이는 뱀처럼 엘리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채, 귓가를 간질이듯 작게 속삭였다.

       

       “엘리. 정말 어떻게 안 될까요? 제가 엘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그, 그건 그런데….”

       

       말은 안 하지만 침은 꼴깍꼴깍 삼키는지 울렁이는 목울대. 은근슬쩍 전신을 비비적대며 말을 이었다.

       

       “만약 엘리가 도와준다면. 그래 준다면…제가 엘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드릴게요.”

       

       “뭐…든?”

       

       “네에. 뭐든. 엘리가 최근에 푹 빠진 구속 플레이도 괜찮고, 호기심에 몇 번 찾아본 역간 플레이도 괜찮겠죠. 꼭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어요. 전부 다 해보면 되죠.”

       

       “전부….”

       

       “우리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볼까요? 일단 같이 목욕부터 하는 거죠. 엘리는 거품을 잔뜩 낸 가슴으로 저를 씻겨주는 거예요. …마치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말이에요.”

       

       “구석구석….”

       

       “엘리가 씻겨줬으니 다음은 제 차례겠죠? 굳이 브러시로 씻겨줄 필요는 없으니 저도 손으로 해드릴게요. 다른 부분이라도 상관없구요. 예를 들면…배로 문질러준다거나? 아니지, 이건 좀 불편하겠네요. 딱 좋은 다른 부분이 있잖아요?”

       

       그리 말하며 엘리의 탄탄한 허벅지에 대고 허리를 꼼질대자 순간 격해지는 엘리의 호흡.

       

       침만 꼴깍거리며 삼키던 입에서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옅은 그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이쯤이면 된 것 같아 미련없이 몸을 떨어뜨렸다.

       

       “어때요? 엘리가 도와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

       

       입을 꾸욱 다문 엘리.

       

       뒤에서 웅성이는 기척이 느껴서 살짝 돌아보자 이마를 감싸고 한숨만 내쉬는 리디아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정작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볼 건 다 보며 헛숨을 들이키는 카렌의 모습이 있었다.

       

       쁘이.

       

       조용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주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둘.

       

       리디아는 현타라도 온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지었으며, 카렌은 어째서인지 내가 준 여신상을 손에 꼭 쥔 채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진쟈 너무 한 거 아니냐.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기다리는 것도 잠시. 생각을 마친 엘리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안 돼.”

       

       “…네?”

       

       “백 보 양보해서 내가 리디아랑 카렌 씨를 도와주는 건 괜찮아. 하지만 요나 네가 따라가는 건 안 돼.”

       

       “하지만 이번 일은 꼭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도움을 받을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둘 수는 없어요.”

       

       “협상하자는 소리가 아니야. 뭐든 하겠다고 했지? 이게 내 조건이야.”

        

       “쓰으읍….”

       

       이래도 안 된다고? 곤란한데.

       

       물론 최악의 경우인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세계수의 권능이 넘어간다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다. 피할 수 있지만…나도 꼽사리 끼고 싶단 말이지.

       

       이렇게 된 이상 이브라도 부를까? 세계관 최강자 라인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 만큼 어지간한 모험가들보다는 강하다는 설정이 있으니까.

       

       세계수의 권능과 관련된 일이니까 흔쾌히 도와줄지도 모른다.

       

       …근데 이브까지 끼면 1층 수호자를 잡아도 충분한 기여도를 확보 못 하는 거 아냐?

       

       그러면 첫 토벌 보너스는 물론, 1층에서 권능을 얻을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거다.

       

       혼자 낑낑대며 고민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충격에서 회복한 리디아가 그 잠깐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엘리 선배. 이리 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뭔데. 설마 리디아 너까지 요나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동의하는 건 아니겠지?”

       

       “됐으니까 일단 와 봐.”

       

       엘리를 반강제로 끌고 1층의 창고 쪽으로 사라진 둘. 항상 나를 위험에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리디아지만, 오늘만큼은 내 편인가 보다.

       

       역시 신전에서 성자(아님)무브를 보여줘서 그런 거려나?

       

       꼭 성직자가 되는 게 아니더라도, 판 그레이브의 모든 사람은 사랑의 여신을 공경한다.

       

       이는 어려서부터 사랑의 여신의 업적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 것도 있고, 신전의 영향력이 강한 이유도 있으며, 신격의 특성상 사랑받기 쉽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부정하는 데 힘썼다면, 이제부터는 조금씩 써먹어 보는 것도 괜찮겠네.

       

       내가 정말 성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판 그레이브로 불러와 가챠 능력을 쥐여준 건 사랑의 여신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내가 사칭 좀 한다고 해서 뭐라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까지 속 좁은 여신은 아닐 테니까.

       

       …아니지?

       

       내가 조각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외신의 조각상과, 지금은 카렌의 손에 있는 예쁘게 잘 빠진 3성 조각상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 는 것도 잠시.

       

       내가 엘리에게 ‘부탁’을 한 이후로 어색하게 굴던 카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나 님.”

       

       “넹?”

       

       “일전에 엘리 씨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만…지금 보니 그것보다 훨씬 친밀한 것 같은데. 제가 바로 본 게 맞습니까?”

       

       “뭐어. 그렇죠? 엘리가 오갈 데 없는 저를 주워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나중에 크면 이런저런 일도 하는…그런 키잡을 연상시키도록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거든요.”

       

       “반대라 하심은?”

       

       “제가 엘리에게 달라붙어서 밥 줘, 놀아줘, 집 줘, 가슴 만져봐도 돼? 같은 걸 물어보며 언젠가 어른이 될 날만을 벼르고 있는 역키잡이거든요.”

       

       “허업…!”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카렌. 그러고 보니 카렌도 유니콘 단검이 인증한 처녀였지.

       

       “흐응. 대충 보이네요. 카렌 심문관님. 어려서는 훈련을, 커서는 임무만 나가느라 이성에 면역이 없으신 거죠?”

       

       “그, 그걸 어떻게!”

       

       “뭐. 저 정도면 대충 보인답니다.”

       

       “역시 요나 님에게도 여신님의 시야가….”

       

       “엩.”

       

       반 장난식으로 으쓱였을 뿐인데, 진지하게 여신으로부터 가호를 받은 것이라 착각하는 카렌.

       

       이걸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카렌이 엘리와 리디아가 들어간 창고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요나 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무례해 봐야 얼마나 무례하겠어요. 아, 일단 말해두는데 저 아직 성장기라 더 커질 거거든요?”

       

       “키를 물어보려는 게 아닙니다.”

       

       “네? 아랫도리 길이를 물어보려는 게 아니었다고요?”

       

       “?”

       

       “?”

       

       서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말뜻을 이해한 카렌이 식겁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찌 그리 불경한! 그 정도로 무례한 질문을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니면 괜찮으니까 편히 말씀하시라는 뜻이었답니다.”

       

       “예? 예….”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일단 그리 말하니 맞는 걸로 치자.

       

       라는 생각의 흐름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낸 카렌이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크흠. 일전에 요나 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그것이 적이라 할지라도요.”

       

       “넹. 그게 왜요?”

       

       “헌데, 오늘 보여주신 모습은 엘리 씨를 특별히 여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이 조금 궁금해서 말입니다. 박애와 연애는 공존할 수 있는 겁니까? 신전 안에서도 항상 말이 많은 주제라 요나 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아하?”

       

       뭔 소린지 알겠구만.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엄청 대단하고, 숭고해 보이지만…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반면 연애의 사랑이란 다른 몇몇을 세상 누구보다도 더 중요히 여긴다는 뜻이고.

       

       그러니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는 박애와, 누군가를 특별히 여기는 연애가 공존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가. 뭐 그런 이야기라도 하려는 거겠지. 신전 측에서는 진지하게 사랑을 공부하고 있을 테니 학파 같은 게 나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보기엔 별 쓸데없는 대립이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는 세상 모든 이를 좋아해도, 그중 몇몇은 특별하게 여길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박애는 이래야 한다 연애는 이래야 한다 같은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애초에 마음에는 형태가 없답니다.”

       

       “……!”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는 카렌. 깨달음 머신이야 뭐야. 무슨 말만 하면 뭘 자꾸 깨닫네.

       

       왜 이렇게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건지…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불현듯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건 당장 해봐야지.

       

       “카렌 심문관님. 저도 좀 무례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뭐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럼 사양않고….”

       

       한차례 말을 고르며 방긋 웃어주었다.

       

       “카렌 심문관님은 신앙이 중요하세요 돈이 중요하세요?”

       

       “그야 당연히 신앙입니다만.”

       

       “그럼 저한테 얼마나 기부하실 수 있나요?”

       

       “전 재산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 하여 이쪽도 활짝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전 재산. 저한테 맡기실래요? 제가 좋은데 쓸게요.”

       

       “요나 님이 필요하시다면야.”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꺼낸 카렌.

       

       그녀가 내 손 위에 지갑을 통째로 올려두던 순간이었다.

       

       끼익-

       

       “후우. 요나야. 방금 리디아한테 이것저것 사정을 들었어.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번 한 번…….”

       

       뒤통수를 긁적이며 동참 소식을 알리던 엘리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내 손에 들린 묵직한 지갑에 고정되었다.

       

       “너 설마 리디아 때처럼…!”

       

       “아니에요! 이번에는 슬쩍한 게 아니라 부탁해서 받아낸 거예요!”

       

       “그럼 나한테 10실버를 받아 갔을 때처럼…!”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니까요?! 그냥 달라고 부탁하니까 주신 거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긴. 제가 생각해도 말 한마디에 전 재산을 턱턱 내놓는 사람은 말도 안 되긴 해요. …그런데 짜잔! 제가 그 힘든 일을 해냈답니다!”

       

       “…….”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엘리.

       

       신뢰가 부족하구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붕스 2트럭, 아케론 1돌+전광 그리고 아케론 나올때 덤으로 같이 뽑힌 연경

    키야아아!!

    다음화 보기


           


EP.63

EP.63





       “미쳤니?”


       


       리디아와 카렌을 데리고 쪼르르 달려가 엘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내 정신상태에 대한 의심이었다.


       


       너무해라.


       


       “엘리.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어. 안 돼. 애초에 이런 일에 요나 네가 끼어들 이유가 없잖아. 높으신 분들한테 맡겨두라고.” 


       


       “그 높으신 분이 우리 편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것도 모른 척 조용히 살아가. 요나 특기 중 하나잖아? 적당히 상황에 맞춰 살면서 이득만 쏙쏙 빼먹는 거. 이번에도 그러면 돼.”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까지는 그래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


       


       1층의 계층 수호자 최초 토벌은 내가 먹거나, 불가능하다면 주인공이 먹어야 한다.


       


       아니, 엘리나 리디아도 좋다. 차라리 생판 남이라도 건실한 성격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배가 아프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지만 참을 수 있다.


       


       황혼을 삼키는 자의 손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스윽 엘리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예 거리를 없앴다.


       


       엘리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는 소리다.


       


       바로 앞에서 끌어안은 터라 리디아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큼직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자세.


       


       부드럽다기보다는 탄력 있는 감촉이 얼굴을 감싸온다.


       


       하지만 이 판 그레이브에서 내가 엘리 가슴에 코박죽 한 건 그리 엄청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좀 진한 스킨십에 불과할 뿐이지.


       


       중요한 것은 내 배가 엘리의 고간에 닿았다는 것, 그리고 내 고간은 엘리의 허벅지 위를 비비고 있다는 것이었다.


       


       “……!”


       


       스턴이라도 걸린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버린 엘리. 그런 엘리의 품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자 특유의 살냄새와 늑대 수인의 털 냄새가 섞인 기묘한 체향.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둘 다 좋은 냄새라 두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향기였거든.


       


       내 숨소리를…정확히는 내가 자신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빳빳하게 솟아오른 귀. 경직된 꼬리. 맹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정처 없이 흔들렸으며 코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 가호로 받은 향기로운 체취도 열일하는 모양이다.


       


       뱀 앞에 선 쥐처럼 빳빳한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엘리. 


       


       반면 이쪽에서는 먹잇감을 조이는 뱀처럼 엘리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채, 귓가를 간질이듯 작게 속삭였다.


       


       “엘리. 정말 어떻게 안 될까요? 제가 엘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그, 그건 그런데….”


       


       말은 안 하지만 침은 꼴깍꼴깍 삼키는지 울렁이는 목울대. 은근슬쩍 전신을 비비적대며 말을 이었다.


       


       “만약 엘리가 도와준다면. 그래 준다면…제가 엘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드릴게요.”


       


       “뭐…든?”


       


       “네에. 뭐든. 엘리가 최근에 푹 빠진 구속 플레이도 괜찮고, 호기심에 몇 번 찾아본 역간 플레이도 괜찮겠죠. 꼭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어요. 전부 다 해보면 되죠.”


       


       “전부….”


       


       “우리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볼까요? 일단 같이 목욕부터 하는 거죠. 엘리는 거품을 잔뜩 낸 가슴으로 저를 씻겨주는 거예요. …마치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말이에요.”


       


       “구석구석….”


       


       “엘리가 씻겨줬으니 다음은 제 차례겠죠? 굳이 브러시로 씻겨줄 필요는 없으니 저도 손으로 해드릴게요. 다른 부분이라도 상관없구요. 예를 들면…배로 문질러준다거나? 아니지, 이건 좀 불편하겠네요. 딱 좋은 다른 부분이 있잖아요?”


       


       그리 말하며 엘리의 탄탄한 허벅지에 대고 허리를 꼼질대자 순간 격해지는 엘리의 호흡.


       


       침만 꼴깍거리며 삼키던 입에서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옅은 그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이쯤이면 된 것 같아 미련없이 몸을 떨어뜨렸다.


       


       “어때요? 엘리가 도와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


       


       입을 꾸욱 다문 엘리.


       


       뒤에서 웅성이는 기척이 느껴서 살짝 돌아보자 이마를 감싸고 한숨만 내쉬는 리디아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정작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볼 건 다 보며 헛숨을 들이키는 카렌의 모습이 있었다.


       


       쁘이.


       


       조용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주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둘.


       


       리디아는 현타라도 온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지었으며, 카렌은 어째서인지 내가 준 여신상을 손에 꼭 쥔 채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진쟈 너무 한 거 아니냐.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기다리는 것도 잠시. 생각을 마친 엘리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안 돼.”


       


       “…네?”


       


       “백 보 양보해서 내가 리디아랑 카렌 씨를 도와주는 건 괜찮아. 하지만 요나 네가 따라가는 건 안 돼.”


       


       “하지만 이번 일은 꼭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도움을 받을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둘 수는 없어요.”


       


       “협상하자는 소리가 아니야. 뭐든 하겠다고 했지? 이게 내 조건이야.”


        


       “쓰으읍….”


       


       이래도 안 된다고? 곤란한데.


       


       물론 최악의 경우인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세계수의 권능이 넘어간다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다. 피할 수 있지만…나도 꼽사리 끼고 싶단 말이지.


       


       이렇게 된 이상 이브라도 부를까? 세계관 최강자 라인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 만큼 어지간한 모험가들보다는 강하다는 설정이 있으니까.


       


       세계수의 권능과 관련된 일이니까 흔쾌히 도와줄지도 모른다.


       


       …근데 이브까지 끼면 1층 수호자를 잡아도 충분한 기여도를 확보 못 하는 거 아냐?


       


       그러면 첫 토벌 보너스는 물론, 1층에서 권능을 얻을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거다.


       


       혼자 낑낑대며 고민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충격에서 회복한 리디아가 그 잠깐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엘리 선배. 이리 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뭔데. 설마 리디아 너까지 요나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동의하는 건 아니겠지?”


       


       “됐으니까 일단 와 봐.”


       


       엘리를 반강제로 끌고 1층의 창고 쪽으로 사라진 둘. 항상 나를 위험에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리디아지만, 오늘만큼은 내 편인가 보다.


       


       역시 신전에서 성자(아님)무브를 보여줘서 그런 거려나?


       


       꼭 성직자가 되는 게 아니더라도, 판 그레이브의 모든 사람은 사랑의 여신을 공경한다.


       


       이는 어려서부터 사랑의 여신의 업적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 것도 있고, 신전의 영향력이 강한 이유도 있으며, 신격의 특성상 사랑받기 쉽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부정하는 데 힘썼다면, 이제부터는 조금씩 써먹어 보는 것도 괜찮겠네.


       


       내가 정말 성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판 그레이브로 불러와 가챠 능력을 쥐여준 건 사랑의 여신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내가 사칭 좀 한다고 해서 뭐라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까지 속 좁은 여신은 아닐 테니까.


       


       …아니지?


       


       내가 조각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외신의 조각상과, 지금은 카렌의 손에 있는 예쁘게 잘 빠진 3성 조각상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 는 것도 잠시.


       


       내가 엘리에게 ‘부탁’을 한 이후로 어색하게 굴던 카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나 님.”


       


       “넹?”


       


       “일전에 엘리 씨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만…지금 보니 그것보다 훨씬 친밀한 것 같은데. 제가 바로 본 게 맞습니까?”


       


       “뭐어. 그렇죠? 엘리가 오갈 데 없는 저를 주워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나중에 크면 이런저런 일도 하는…그런 키잡을 연상시키도록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거든요.”


       


       “반대라 하심은?”


       


       “제가 엘리에게 달라붙어서 밥 줘, 놀아줘, 집 줘, 가슴 만져봐도 돼? 같은 걸 물어보며 언젠가 어른이 될 날만을 벼르고 있는 역키잡이거든요.”


       


       “허업…!”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카렌. 그러고 보니 카렌도 유니콘 단검이 인증한 처녀였지.


       


       “흐응. 대충 보이네요. 카렌 심문관님. 어려서는 훈련을, 커서는 임무만 나가느라 이성에 면역이 없으신 거죠?”


       


       “그, 그걸 어떻게!”


       


       “뭐. 저 정도면 대충 보인답니다.”


       


       “역시 요나 님에게도 여신님의 시야가….”


       


       “엩.”


       


       반 장난식으로 으쓱였을 뿐인데, 진지하게 여신으로부터 가호를 받은 것이라 착각하는 카렌.


       


       이걸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카렌이 엘리와 리디아가 들어간 창고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요나 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무례해 봐야 얼마나 무례하겠어요. 아, 일단 말해두는데 저 아직 성장기라 더 커질 거거든요?”


       


       “키를 물어보려는 게 아닙니다.”


       


       “네? 아랫도리 길이를 물어보려는 게 아니었다고요?”


       


       “?”


       


       “?”


       


       서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말뜻을 이해한 카렌이 식겁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찌 그리 불경한! 그 정도로 무례한 질문을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니면 괜찮으니까 편히 말씀하시라는 뜻이었답니다.”


       


       “예? 예….”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일단 그리 말하니 맞는 걸로 치자.


       


       라는 생각의 흐름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낸 카렌이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크흠. 일전에 요나 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그것이 적이라 할지라도요.”


       


       “넹. 그게 왜요?”


       


       “헌데, 오늘 보여주신 모습은 엘리 씨를 특별히 여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이 조금 궁금해서 말입니다. 박애와 연애는 공존할 수 있는 겁니까? 신전 안에서도 항상 말이 많은 주제라 요나 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아하?”


       


       뭔 소린지 알겠구만.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엄청 대단하고, 숭고해 보이지만…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반면 연애의 사랑이란 다른 몇몇을 세상 누구보다도 더 중요히 여긴다는 뜻이고.


       


       그러니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는 박애와, 누군가를 특별히 여기는 연애가 공존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가. 뭐 그런 이야기라도 하려는 거겠지. 신전 측에서는 진지하게 사랑을 공부하고 있을 테니 학파 같은 게 나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보기엔 별 쓸데없는 대립이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는 세상 모든 이를 좋아해도, 그중 몇몇은 특별하게 여길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박애는 이래야 한다 연애는 이래야 한다 같은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애초에 마음에는 형태가 없답니다.”


       


       “……!”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는 카렌. 깨달음 머신이야 뭐야. 무슨 말만 하면 뭘 자꾸 깨닫네.


       


       왜 이렇게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건지…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불현듯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건 당장 해봐야지.


       


       “카렌 심문관님. 저도 좀 무례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뭐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럼 사양않고….”


       


       한차례 말을 고르며 방긋 웃어주었다.


       


       “카렌 심문관님은 신앙이 중요하세요 돈이 중요하세요?”


       


       “그야 당연히 신앙입니다만.”


       


       “그럼 저한테 얼마나 기부하실 수 있나요?”


       


       “전 재산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 하여 이쪽도 활짝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전 재산. 저한테 맡기실래요? 제가 좋은데 쓸게요.”


       


       “요나 님이 필요하시다면야.”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꺼낸 카렌.


       


       그녀가 내 손 위에 지갑을 통째로 올려두던 순간이었다.


       


       끼익-


       


       “후우. 요나야. 방금 리디아한테 이것저것 사정을 들었어.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번 한 번…….”


       


       뒤통수를 긁적이며 동참 소식을 알리던 엘리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내 손에 들린 묵직한 지갑에 고정되었다.


       


       “너 설마 리디아 때처럼…!”


       


       “아니에요! 이번에는 슬쩍한 게 아니라 부탁해서 받아낸 거예요!”


       


       “그럼 나한테 10실버를 받아 갔을 때처럼…!”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니까요?! 그냥 달라고 부탁하니까 주신 거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긴. 제가 생각해도 말 한마디에 전 재산을 턱턱 내놓는 사람은 말도 안 되긴 해요. …그런데 짜잔! 제가 그 힘든 일을 해냈답니다!”


       


       “…….”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엘리.


       


       신뢰가 부족하구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붕스 2트럭, 아케론 1돌+전광 그리고 아케론 나올때 덤으로 같이 뽑힌 연경

    키야아아!!
    다음화 보기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