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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39

   루시의 신성을 마주한 라샤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신앙심이라고는 일말도 존재하지 않는 그녀지만 그래도 악신의 사도다.

   

   파괴라는 개념을 관장하는 신의 대변인인 그녀는 저 신성이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저건 진정 주신의 신성이다. 이 세상에 만들어졌을 때 가장 먼저 생겨났다는 생명의 빛이다.

   

   “곤란하네.”

   “왜애?♡ 처발릴 상상을 하니까 무서워?♡”

   “적당히 해야 하는데, 못 할 것 같거든.”

   

   피가 끓어오른다.

   

   눈 앞에 있는 것은 강자다.

   

   베네딕 알른이란 위대한 기사의 딸이며 주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다.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건 용사의 곁을 따르는 영웅들이다. 신이 친히 선택한 맹자란 말이다.

   

   죽이고 싶다.

   

   부수고 싶다.

   

   저들이 지닌 빛이 부서질 때 얼마나 격한 폭발이 일어날지 확인하고 싶다.

   

   이 충동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나의 것이다.

   

   저들이 파멸하면서 보여 줄 폭발이 너무도 기대되기에 파괴충동을 억누르기가 버겁다.

   

   “그래도 해야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저희들이 하지요.”

   

   그런 그녀의 앞을 한 성기사가 가로막는다.

   

   “할 수 있겠어? 저 꼬맹이가 지닌 신성이 무슨 뜻인지 알 거 아냐.”

   “지옥에 떨어질 각오는 이미 했습니다.”

   “미친놈 옆엔 미친놈들 뿐이라니까.”

   “너도 그래♡ 땀내 나는 미친년아♡”

   

   루시의 도발에 응한 라샤가 주먹을 휘두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충격이 분산됐다.

   

   힘이 내리꽂히는 그 순간을 노려서 방패를 내밀었어.

   

   우연이 아냐. 의도적으로 한 거야.

   

   겨우 몇 달 만에 이 정도까지 성장한 건가.

   

   라샤는 이걸 벌써 부숴야 한단 사실에 진한 아쉬움을 느끼며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엔 방금 전과 달리 묵직한 소리와 함께 루시가 뒤로 밀려났다.

   

   “겨우 그것 밖에 못 하면 죽을 거야.”

   “뇌가 근육에 잡아먹혀서 사라진 년이 지껄이니까 설득력이 있네♡”

   

   루시에게 신경이 끌린 와중에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잡아챈 라샤는 아서의 얼굴과 그 어깨를 올라타고 검을 휘두르는 프레이의 모습을 보고 다급히 두 팔을 끌어 모았다.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자그마한 상처에서 피가 떨어진다.

   

   “이번엔 무슨 핑계 댈 거야?”

   “…하하! 애석하게도 댈 핑계가 없네!”

   

   라샤의 돌진을 시작으로 교황 직속의 성기사들과 루시 알른의 파티가 격돌했다.

   

   주신을 모독하는 말로 루시가 시선을 끌고 그 틈을 노린 일행의 공격에 성기사들에게 상처가 새겨진다.

   

   라샤가 일으킨 거대한 충격 위에서 성기사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서로가 펼치는 마법이 발목을 붙잡고 동료를 치유하고 변수를 만들어 내려 한다.

   

   이처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두 집단의 격돌은 놀랍게도 대등해보였다.

   

   아니, 교황이 판단 내리기엔 루시 일행이 더 우세해보였다.

   

   악신 아그라의 사도와의 전투로 인해 지쳤을 터인데도 저들의 기세는 맹렬했고 라샤를 제외한 성기사들에게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망설임이 느껴졌으니까.

   

   객관적인 전력만 따진다면 저들은 밀려선 안 된다.

   

   대등해서도 안 된다.

   

   라샤는 대륙 최강의 일각에 드는 괴물이다.

   

   그리고 교황 직속의 성기사들은 대륙 전체를 기준으로 놓아도 강자라 불리는 이들이지.

   

   그에 반해 루시 알른의 일행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다.

   

   경이로운 재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채 성인이 되지 못한 이들이란 말이다.

   

   육신의 성장도 다 끝나지 않은 이들은 원래 교황이 이끌고 온 전력에 짓눌려야했다.

   

   설령 저들이 누구도 죽여선 안 된다는 제약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양심의 가책이 발목을 잡고 있다 하더라도.

   

   저들은 어렵잖게 승리해야만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한 걸음 뒤에서 모든 걸 바라보던 교황은 전투 속에서 기적을 느꼈다.

   

   최초의 신이며 최고의 신이며 최선의 신인 주신 아르마디께서 저 뒤에 서 있기에 이 대치가 이루어지는 것이겠지.

   

   주신께선 자신의 사도를 지키고자 하시며, 그와 동시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 거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은 끝에 이 사실을 인정한 교황은 주변의 소란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교황의 어깨가 떨린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하나 둘 물방울이 떨어져내린다.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가 소란에 파묻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금 얼굴을 든 교황의 입가에는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너무도 진해서 영원토록 입가에 박제되어 버릴 것 같은 웃음이.

   

   “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교황은 자신이 거부당했단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이것이 그가 긴 세월 동안 신앙해 온 신이었다.

   

   가만 내버려 둔다면 자신에게 커다란 이익을 선사할 걸 알면서도 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이 존재야말로 교황이 믿는 위대한 신이었다.

   

   “제 신앙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를 올린 교황은 기쁜 마음으로 전장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균열이 생겼다.

   

   상대의 공세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루시가 입술을 꾹 깨문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계속 살피던 아서가 여유를 잃는다.

   

   프레이의 속도가 서서히 따라잡히고 페이비는 치유에 전념하느라 다른 보조를 하지 못한다.

   

   조이는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 자신의 앞에 도달한 기사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치지만 친구들을 도울 순 없다.

   

   한 번 무너진 균형은 추가 기울면 기울수록 빠르게 내려간다.

   

   그리고 낙하에 가속이 더해진단 걸 눈치챈 순간엔 이미 끝이다.

   

   균형은 무너져내렸다.

   

   “자. 여러분들.”

   

   루시 일행이 한계에 가까웠단 걸 확신한 교황은 기사들을 물리고서 루시의 앞에 섰다.

   

   “이제 제가 주신의 사도를 추대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 나이 먹고도 혼자 결정을 못 내리는 거야?♡ 지능이 많이 떨어지긴 하나봐♡”

   

   교황은 웃으며 물음을 던진 순간 루시가 방패를 내리고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니까 허접페도주신을 믿는 거겠지♡ 여자애한테 바니걸을 입히고 싶어서 발악하는 변태새끼를 신앙하려면 뇌가 이상해야 하잖아?♡”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떨쳐내며 앞으로 나선 루시는 아무런 말도 않는 교황의 배를 쿡 찔렀다.

   

   “어쩌면 페도주신에게 공감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발정났구나?♡ 날 데려가서 네 뱃살로 질식사 시키려고 그러지?♡”

   

   루시의 도발은 불리한 상황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납치를 계획하고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해선 안 될 말이기도 하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강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하긴 누가 너같은 역겨운 새낄 좋아하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계속 상대를 자극하는 까닭은.

   

   “네 자그마한 걸 볼 수 있긴 해?♡ 살에 파묻혀서 찾기도 힘들 것 같은데♡”

   “친우가 아닌 당신을 공격하게 만들려 하시는군요.”

   

   그게 그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친우분들 대신 당신을 고문해 굴복시키길 바라시는 거겠죠. 그 편이 당신에게 덜 고통스러우니까.”

   

   교황의 눈가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흐른다.

   

   주신께서 선택한 자신의 사도는 이토록 고결하다.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하더라도 좋으니 자신의 친구들을 구제하려 할 만큼. 자신을 지옥으로 내몰았던 세상을 위해 일어설 만큼 선하다.

   

   그녀에게 사도의 자격이 없다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을까.

   

   “사도시여. 전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 마지막을 당신이 바라봐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돼지 멱 따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어♡”

   “하하. 죄송하지만 목이 날아가는 것 정도로는 죽을 수 없어서요.”

   “흐응♡ 겁 먹었구나?♡”

   

   가늠하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서 교황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로 잡혀버렸다.

   

   위대한 신께서 구속을 한 것처럼 교황의 시선은 루시에게 붙박혔다.

   

   “허~접♡”

   

   그랬기에 교황은 자신의 목 앞까지 날아든 대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성하.”

   

   베네딕 알른.

   

   현 대륙에서 가장 위협적인 전력 중 하나.

   

   분노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서도 교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상황은 파악해야죠.”

   

   제압된 것은 교황뿐만이 아니었다.

   

   검성이. 예술 교단의 사도가. 켄트의 당주가. 2왕비가. 바깥에 남았던 두 왕자가. 한 숲의 주인이. 요정들의 여왕이. 그리고 어둠의 신이 이 자리를 둘러 싸고 있었다.

   

   일순에 던전이 무너져내렸고 그 순간을 노려 기습했군. 그 때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았던 건 우연이 아니겠지.

   

   “바보 파파. 느려터졌어.”

   “사과는 나중에 하마. 루시.”

   

   사도께서 이 상황을 노리고 만든 거다.

   

   어느 순간부터 유도되고 있었던 걸까.

   

   모르겠군. 짐작도 하기 어려워.

   

   저 분께선 경이로울 정도로 고결하시며 이토록 유능하기까지 하신 건가.

   

   또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군.

   

   “주신 교회의 교황이여. 악신의 조각을 내놓은 후 모든 걸 잊고 물러나게.”

   

   에르기누스가 딱딱한 어투로 경고하자 교황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 측에서 보관하겠습니다.”

   “자네의 지위가 아니었다면 이미 목이 날아갔을 것임을 굳이 말해야 하나?”

   “압니다. 그치만 당신께 드릴 순 없습니다. 감당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내가?”

   “대마법사시여. 어둠에 잡아먹힐 뻔한 걸 기억하십시오. 이에 대한 건 제가 당신보다도 잘 압니다.”

   “내게 부족함이 있을 순 있다만 그렇다고 자네가 지녀도 되는 건 아니지.”

   

   교황의 고집에 여러 강자들이 손에 힘을 더한다.

   

   아무리 교황이 있고, 라샤가 있고, 여러 대단한 성기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 곤경을 헤쳐나가긴 힘들다.

   

   에르기누스의 관대한 제안처럼 물러서는 게 최선이겠지.

   

   보통이라면.

   

   “아뇨. 전 괜찮습니다. 대마법사시여.”

   “호오. 그래? 왜지?”

   “대답하기 전에 여쭈어 볼 게 있습니다. 당신께선 절 기억하십니까?”

   “내가 왜 그댈 기억해야 하지?”

   “당신의 기억은 거기까지군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에 에르기누스가 교황의 머리를 터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머리가 그대로 돌아왔다.

   

   그가 겪은 끝이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인사 드리죠. 전 악신 아그라의 사도이며 주신을 신앙한 끝에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고 신화시대의 생존자입니다.”

   “…뭐?”

   “그리고 당신을 만들어낸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지인이기도 합니다. 에르기누스의 인형이시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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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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