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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4

       *

         

         눈앞까지 치닫는 섬광이나 화려한 폭발 따윈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건 터질 만한 것이 있을 때 뒤따르는 현상이니까.

         

         지하수가 흐르는 이 지반 아래에 무엇이 있어 폭발이 일어난단 말인가.

         

         

        -쿠구구구구…!!

         

         

         그러나 진동은 있다. 대규모 파괴에 잇따르는 충격력은 지금 이 지반 아래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반은 도끼를 쥔 채 뒤를 돌았다.

         

         

         “…!!!!”

         

         

         엘피헤라는 공포와 분노와 당혹이 칵테일된 얼굴로 무어라 소리지르고 있었다.

         

         아, 청각 차단.

         

         하지만 풀 생각은 없었다. 폭발만 없었다 했지 폭음 자체는 지금 이 공동 전체를 울리고 있을 테니까. 임계를 넘긴 소음은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다.

         

         

         “방호 주문을 펼쳐라.”

         

         

         이반은 엘프를 향해 또박또박 말해주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낮게 울리고. 발을 디딘 지반에서 파삭거리는 균열이 보였다.

         

         

         “곧 무너진다.”

         “…!! !!! …!?!”

         

         

         그는 독순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엘프가 지금 필사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은 보는 순간 알았다.

         

         그가 걱정한 것은 방호 주문을 펼칠 줄 모른다는 종류의 정보였으므로, 그게 아닌 이상 신경 쓸 필요 따윈 없다.

         

         그는 팔을 뻗어 엘피헤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강간범!! 이 평범한 인간!

         

         대체 마지막 단어는 무슨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엘프다운 욕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방호 주문.”

         

         

         이반은 짧게 대답해주곤 그대로,

         

         

         “그리고 눈을 감지 마라.”

         

         

         절벽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마력의 흐름이 보이면, 놓치지 말아라. 해야 할 일을 해. 그 외의 일은 모두 내 역할이니.”

         

         

         방호 주문이 보호할 수 있는 충격력이 어느 정도나 될 지는 모르겠다. 베올그린의 것은 칠용장의 일격조차 한 번은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었으니.

         

         설령 그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몸에 부딪치는 작은 자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이반은 어둠이 펼쳐진 낭떠러지 위에서 기묘한 부유감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

         

         

         지진이 한 차례 더 일어나며, 아슬아슬한 균열을 만들고 있던 폭심지가 터졌다.

         

         토사와 거대한 암반이 그들을 뒤따라 낭떠러지 아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눈을 감지 말라고…?

         

         엘피헤라는 이 미치광이 노인-원숭이(둘 다 아니다.)를 흘기며 애써 눈물을 훔쳤다.

         

         바람이 얼굴에 쏟아진다. 그녀의 자랑이던 머리칼은 이미 흙먼지에 잔뜩 더러워진 채로 바람에 따라 얼굴 위로 철썩철썩 들러붙었다.

         

         읍, 으픕!

         

         숨을 쉬기도 힘겨운 상황, 이 동굴 전체를 울리는 폭음과 발 밑 없이 이어지는 낙하, 부유감. 이런 상황 속에서 방호 주문이나마 성공한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이상의 집중력을 짜낼 수 있을 리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아!!”

         

         

         마법의 신비와 지혜에 대해 실낱만큼이라도 알고 있는 인간이라면 감히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이 멍청한 원숭이는 대체 무슨….

         

         

        -네 아비의 절반만큼만 출중하다면, 네 실력은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

         

         

         이 인간은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 서 있었다고 했다. 추레한 행색에서 믿음이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따라온 것 자체는 이스트벨펜 자작가 장남의 보증 때문이었다.

         

         당연히 거짓말이겠지만, 추밀의원의 적장자에게 정치적 올가미를 씌울 수 있을 테니까. 딱 그 정도의 각오로 동의한 일이었단 뜻이다.

         

         하지만, 이 꼴을 보니 거짓이리란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이런 파괴를 맨몸으로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종족 전쟁에서 아버지의 곁에 서 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다는 뜻은.

         

         

         ‘네 아비라면 이런 것쯤은 손쉽게 해냈을 것이다.’

         

         

         그런 의미다. 그녀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건.

         

         그녀가 오스왈드 이스트벨펜의 보증을 믿고 뒤따랐던 것처럼.

         

         이 남자는 ‘베올그린 그리켄코스’의 능력을 믿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해냈겠지만….’

         

         

         엘피헤라는 힘겹게 눈을 떴다. 바람이 휙휙 쏟아지며 그녀의 얼굴을 마구 후려치고 있지만, 눈물 그렁그렁 매달린 눈꼬리를 힘겹게 치켜 올렸다.

         

         그녀는 엘프다.

         

         칼리온 군도의 엘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종족이며, 가장 강력한 종족이다.

         

         그리고 그 엘프 중에서도 신화시대 이래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하나라는 베올그린의 딸이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항상 해주었던 말버릇을 떠올리며.

         

         

        -마법이란 환상을 현상으로 빚어내는 학문.

        -엘피헤라. 마법은 지상을 디딘 필멸자에게 천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세워 준단다.

        -그러니, 심상을 세워라.

         

         

         “천(天)….”

         

         

         엘피헤라는 하늘이 있을 저 공동의 높다란 천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천상으로 향하기 위해 마력을 품고.

         

         

         “지(地)….”

         

         

         지상의 홍진을 밟고 서서, 그러나 마음은 곧게. 그러니.

         

         인(人). 필멸자의 심상을 곧게 세우고 의념의 계단을 하늘 위로 걸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딛는 것.

         

         천지인. 삼재. 의념의 삼위를 일체시키는 과정이 곧 베올그린이 창안한 마법의 기본기.

         

         

         

         “꺄아아아악!!”

         

         

         그렇게 주문을 도해하던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낙석이 내려 꽂히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내며 피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곳은 낭떠러지 한가운데. 그녀는 추락하고 있었다.

         

         부유 마법을 시전할 시간조차 없었다. 방호 주문은 저 크기의 낙석을 막아낼 수 없다!

         

         죽는다.

         

         급격한 공포가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 애써 침착을 되찾아 마력을 조각하던 의념이 흩어진다.

         

         그녀는 겁에 질려 훌쩍거리며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도끼날이 허공을 긋는다. 바위가 고작 그 일격 한 번으로 수많은 자갈이 되어 힘없이 사방에 비산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갈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여전히 몸에 남은 공포 속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낮고 차분한, 그래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의념을 세워라. 마법을 직조하고, 이 공간의 마력을 찾아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하란 거야! 나, 나는. 나는…!”

         “엘피헤라.”

         “흑…?”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한팔에 온전히 담길 정도로 얇고 날렵한 허리에, 온몸이 덜덜 떨리는 이 공포를 쫓아내주겠다는 듯 단단하고 우직하게.

         

         자신도 모르게 엘피헤라는 이 뜨거운 체온 위에 몸을 기대며 훌쩍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이어진다. 낮고 허스키한,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환상을 품고 현상을 이뤄내라.”

         “그… 말은….”

         “베올그린의 딸이란 생각은 버려라. 너는 너 홀로 충분히 완성되어 있다. 엘피헤라. 너 자신을 바라보고, 네 심상을 대지 위에 쌓아라.”

         “당신… 당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네 역할이 아니다. 네 안전, 네 생명, 네 공포. 그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그건 내 역할이니까.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

         

         

         네게 기대한 것은 오직 그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니.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믿듯, 너 또한 나를 믿어라. 베올그린이 그랬듯이. 나는 네 아비 앞에서도 내가 해야 할 일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당, 당신 이름… 이름이라도.”

         

         

         이런 사내라면 아버지가 언급 한 번 없었을 리가 없다. 엘피헤라는 어쩐지, 이런 상황 속에서라도 이 사내의 이름이라도 들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중얼거렸다.

         

         이반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떨어지는 바위 하나를 더 쳐 날리며, 낮게 속삭였다.

         

         

         “이반.”

         “…가명치고 되게 성의 없는 이름인 거 알죠.”

         “안다.”

         “인간이란….”

         

         

         크라실로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 이반이다. 소작농들부터 귀족까지 포함해서, 심지어 이제는 유행도 지난 이름이라 농노 집안 아이들에게도 붙이지 않을 흔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엘피헤라는 후련하게 웃었다.

         

         목숨까지 맡기고, 오직 믿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고작 마력 한 줄기를 찾는 것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조차 어렵다고 해서야 베올그린의 이름이, 아니 엘프라는 이름이 운다.

         

         엘피헤라. 요정들의 꽃. 칼리온에서 가장 위대한 사내에게 그런 이름을 받았다면 그녀는 증명해야만 했다.

         

         마력을 직조한다.

         

         의념을 세워, 천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건설하고.

         

         지상을 내딛은 다리, 솟아난 의념, 위대한 천상까지.

         

         마법이란 신비, 그 비의의 근원은 언제나 하늘이다. 저 하늘 너머에 있을 고대의 지혜를 간구하며.

         

         세상의 이치를 바라보기 위해 마력을 직조하고.

         

         필멸자들의 환상, 막연한 공상, 머릿속 상상을 두 손끝에 맺어내며 현상으로 빚어낸다.

         

         

         “보…여요!!”

         “어디지?”

         “앞, 정면…!”

         “정면 어디.”

         “정면 전체!! 눈 앞 전체예요!!”

         

         

        -후우우우우….

         

         

         떨어지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폭풍. 마력이 드러나며 보이는 거대한 너울과 환상 속 바람이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였다.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자신을 눈치챌 수 있는 이들에게만 몸을 드러내는 종류의 마법이다.

         

         

         “세상에… 이런 규모가… 이런 정교함이…!!”

         

         

         새파란 마법의 장막이 그녀의 정면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낭떠러지와 정반대의 압도적인 풍광에, 엘피헤라는 눈을 감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훌륭하군.”

         

         

         이반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짧게 울렸다.

         

         곧, 이반은 박살 난 바위와 바위를 오가며 몸을 날렸다.

         

         그의 팔에 안겨 있던 엘피헤라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다가오는 마력에 몸을 떨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휴 역시 토요일은 낮 내내 잠을 몰아서 자는 게 최고야..

    평일에 잠을 줄이고 주말을 잠만 자면서 보내면 장점이 뭔지 아세요?

    잠자는 원룸의 겅쥬가 된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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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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