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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4

       목요일부터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목요일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제 하루 동안 우리가 지낼 곳을 천천히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어제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몇십 분 정도 역 근처를 돌아다니고, 다시 집합해 제니퍼와 함께 윈터필드 성까지 이동한 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소개를 받았다. 일단 주민들과 얼굴을 터놓는 쪽이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움을 받기 쉬울 테니까.

        

       귀족 학생 열 다섯 명이 모여서 역시 귀족인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다녔기 때문인지, 우리가 돌아다니는 내내 주민들이 근처에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하긴, 제일 앞에서 걷고 있는 선생은 둘째치고 뒤쪽의 학생들까지 죄다 코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안쪽 교복은 그나마 교복 같은 부분이 있어서 조금 가벼운 복장이라는 느낌이 났지만, 코트만큼은 장교용 코트와 거의 다를 것이 없어서, 군대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없는 주민들 처지에서는 장교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나, 앨리스, 샤를로트는 오후가 되어서 방 안으로 들어와 다음날까지 푹 쉬었지만, 다른 애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미아 크로우필드도 그 돌아다닌 학생 중 하나였다.

        

       “……으으, 역시 새벽에 나오려니 춥네.”

        

       밖으로 나와 앨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중얼거렸다.

        

       5월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추운 것을 보면 북부는 과연 북부다. 이건 제작사가 대륙을 정말 정밀하게 그렸기 때문에 느껴지는 추위일까, 아니면 그냥 판타지 속 대륙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했기에 ‘북부는 춥다’는 이미지가 생겨 그런 것일까.

        

       뭐,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추운 날씨라, 결국 나는 망토처럼 걸치고 다니던 코트를 결국 제대로 입고 있었을 정도다.

        

       참고로 다리에는 이미 진작에 두껍고 검은 스타킹을 신었다. 굳이 제니퍼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그 심상찮은 한기에 멋이고 뭐고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나의 그런 행동은 다른 친구들의 눈에도 절박하게 보였던 건지, 다들 내 옆에서 말없이 방한 도구를 구입했다.

        

       아마 덕분에 우리는 이 시간에 이렇게 바깥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도 의뢰소는 열렸어. 봐.”

        

       클레어가 윈터필드 본성 바로 근처에 있는 의뢰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변 가게나 식당은 전부 다 불이 꺼져 있었다. 가스 가로등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대로의 적막한 분위기를 완전히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그나마 여기는 윈터필드 성의 성벽 안쪽이라서 덜 을씨년스럽지, 아마 역 근처였다면 시야 끝부분에 걸리는 숲이 엄청나게 음침해 보였을 것이다.

        

       제국의 치안 체계는 의외로 현대적이라서, 군경이 서로 나뉘어있다. 군사적인 일은 제국군이, 치안은 제국 경찰이 맡는다.

        

       다만 제국 경찰이 활동하는 범위는 거의 황제의 직할령뿐이다. 아무리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사병이 철폐된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영주들은 최소한의 자치권을 바랐다. 그래서 자체적인 세금만으로 경찰력을 운용할 수 있는 영지는 그 영지만의 경찰력이 있었다.

        

       황제 눈치를 보느라 ‘군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혹시라도 황제가 공격했을 때 어느 정도 몸을 지킬 정도의 병력 정도는 있다.

        

       군대도 ‘일반적인’ 사병은 철폐되었지만, 백작 중에서 특별히 외적을 방어해야 하는 변경백이나 윈터필드 공작가처럼 외부적인 요인으로 치안이 다소 불안정한 곳에서는 ‘제국군의 보조 병력’으로서의 사병을 예외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다만 군대인 이상 최종적인 명령권은 황제에게 있다.

        

       만약 황제가 ‘그 예외 사항’에서 벗어나는 군대라 판단하고 해산을 명령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군이 그대로 달려와 쓸어버릴 거다.

        

       뭐, 윈터필드 공작가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지역은 제국군이라고 해도 지역 사령관인 윈터필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니까.

        

       아무튼 황가의 이런 ‘목조르기’때문에 지방에서 나름대로 이름 있는 영주들은 어떻게 사병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볼까 고민했는데, 그 결과 나온 곳이 이런 ‘영지에서 운영하는 의뢰소’였다.

        

       까놓고 말하자면 영지에서 직접 고용하는 용병단이다.

        

       가도의 짐승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영지 안쪽의 치안, 혹은 다소의 무력이 필요한 영지민들의 탄원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수십 년 전에 세워진 곳이 각지의 의뢰소였다.

        

       그리고 제국은 그 의뢰소들도 견제하기 위해 이렇게 ‘파견’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보내 의뢰소에 등록되는 의뢰를 일정량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뢰소는 아카데미와 연계하게 되어서 황립 아카데미에 의해 어느 정도 감시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대로 있으면 얼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죠.”

        

       샤를로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조금 졸린 표정을 하고 있던 미아 크로우필드나 식사 이후에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제이크마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진짜로 이 날씨, 이 어둠 속에서 의뢰를 수행할 생각인 건가?

        

       눈이 맹금류 수준이라도 되는 걸까?

        

       ……그리고 조금 생각해본 나는 진짜로 얘네들 눈이 맹금류 수준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절망했다.

        

       검기, 명상, 검성 같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세상이니 당연히 있겠지.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을 수십 번은 더 돌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땅 아래에 언제나 뜨거운 증기가 지나가는 증기관이 있어 마차가 달려야 하는 돌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얼른 내 앞을 걷는 주인공 일행을 따랐다.

        

       *

        

       “아앙!?”

        

       쾅!

        

       “힉.”

        

       굉장히 일본 만화에 나올 것 같은 ‘빡친 소리’를 내는 근육질의 여자가 안내 데스크를 쾅 내려치는 바람에 미아 크로우필드가 겁먹은 소리를 냈다.

        

       “지금 이시간에 와서 일을 시키는 거냐!?”

        

       굉장히 빡친 표정의 이 아줌마는 젊을 때는 한가락 하기라도 했는지, 팔에 큼지막하게 베인 상처가 몇 개나 나 있었다. 보란 듯이 꽉 끼는 반소매를 입고, 마치 곰과 혈투를 벌이다가 생긴 것 같은 상처를 대놓고 보여주는 이 사람은, 솔직히 그냥 안내원은 아닌 것 같았다.

        

       움찔.

        

       앨리스의 한쪽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아무래도 지금 앞에 있는 이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 사람과 제니퍼 사이에도 이야기가 오간 뒤일 테니까.

        

       “어, 하지만 문이 열려있길래…… 아직 근무 시작 안 하신 겁니까?”

        

       오.

        

       레오의 저 당당한 대사는 알고 있다. 원작에서 ‘겁먹지 말고 똑바로 대답한다’라는 선택지를 고르면 나오는 대사였다. 추가 포인트 1.

        

       그런데 여기서도 그런 포인트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에서는 그래도 해 뜬 뒤에 움직여서 그냥 꼬장부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좀…… 정당한 항의 같은 느낌이 아주 조금 들었다. 뭐, 만약 지금이 진짜로 근무 시간이라면 화내는 게 정상은 아니긴 했지만.

        

       “으응?”

        

       그리고 안내원의 반응도 내가 봤던 대로였다. 선택지 옮겨 적느라 몇 번 봤던 장면이라서 알고 있다.

        

       게임에서야 표정 데이터가 몇 개 없었으니 원래는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화난 것이 풀리지 않았을 타이밍이지만, 지금 내 눈에 들어온 접수원의 표정은 ‘이놈 보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사는 “…….”이었을 것이다.

        

       “이른 시간부터 죄송합니다. 다만…… 저희는 근무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온 건데요…….”

        

       레오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해.”

        

       접수원은 여전히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뒤 집게손가락으로 오른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잔뜩 있으니까 적당한 걸로 골라와라. 만약에 실패하고 포기하면 머리에 꿀밤 한 대씩 때려줄 테니 각오하고, 신중하게 골라 와. 할 수 있는 걸로.”

        

       나는 안내원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손을 쫙 펴면 내 얼굴이 쏙 들어갈 것 같이 컸다.

        

       과연 그 주먹질이 ‘꿀밤’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종류의 것일까?

        

       뭐, 얘네들이랑 있으면 절대로 실패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걱정은 없지만.

        

       사방으로 마구 뻗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는 안내원의 표정에서는 독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하긴, 나라도 새벽부터 화를 내야 한다면 금세 김이 빠질 거다.

        

       크게 하품하는 안내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코르크 보드 앞으로 갔다.

        

       “……많네.”

        

       “그러게.”

        

       클레어의 중얼거림에 레오가 답했다.

        

       게임에서야 한 번에 뜨는 게 세 개에서 네 개 정도뿐이었지만,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의뢰는 한눈에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긴, 열 다섯 명의 학생이 추가되고도 고용한 용병들이 처리해야 할 의뢰들도 있어야 하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많은 게 당연하겠지.

        

       “으음…….”

        

       “이건 어떤가요?”

        

       클레어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샤를로트가 의뢰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의뢰 – 엘리멘탈 베어 “붉은 발톱” 처리.

        

       생포 필요 없음. 시신은 연락 시 처리하겠음.

        

       의뢰비 5파운드. 사체가 멀쩡할 경우 추가 보수 의향 있음.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접수원에게 전해두었음. ]

        

        

       한 의뢰에 5파운드면 꽤 짭짤하다. 굳이 지구 식으로 환산하자면 50만 원 조금 넘는 돈이니까. 1900년대 파운드화의 가치를 엔화로 환산하되, 플레이어들이 계산하기 쉽도록 1파운드=1만 엔이라는 공식을 세워놨으니, 아마 그쯤 될 것이다. 뭐, 엔화가 떨어지면 50만 원 아래의 금액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섯 명이 합심하여 처리하면 인당 1파운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뭐, 사체를 직접 판매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의뢰를 거는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다. 이런 것을 처리하는 사람끼리는 나름대로 커넥션이 있어서, 사냥꾼이 직접 판매하려고 하면 한참 낮은 금액으로 판매하지 않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게다가 마르마로스의 마법적인 처리나 이것저것 하면 지인이 꽤 많이 필요했으니까.

        

       샤를로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곰이라면 혼자서는 잡는 게 불가능해도, 이렇게 여럿이라면 또 해볼 만하니까.

        

       샤를로트가 고른 것 말고도 몇 가지의 의뢰를 더 골랐다. 엘리멘탈 베어를 잡는 것 외에도 총 네 가지였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전부 내가 알고 있는 서브 퀘스트들이었다.

        

       “응? 엘리멘탈 베어?”

        

       의뢰서를 본 접수원은 우리를 슬쩍 보다가, 이내 레오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클레어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아아.”하는 소리를 냈다.

        

       “너희들이 그레이스 가의 꼬맹이들이냐?”

        

       옆에 황녀를 두고 남작가 애들부터 알아보는 게 참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뭐,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그랬구만. 그렇다면 이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 황녀인 앨리스와 내 쪽으로 시선이 한 번 스치는 것을 보면 못 알아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좋아. 자세한 내용이 적힌 서류를 주마.”

        

       의뢰 내용은 종종 남들한테 빼앗기기 아쉬울 만한 내용이 포함되곤 한다. 그러니 접수원이 보고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세한 사항은 숨겨두고 알려주지 않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굵지는 않은 서류뭉치를 받아들고 클레어가 기쁘게 웃었다.

        

       “금방 처리하고 올게요!”

        

       “그래라, 죽지는 말고.”

        

       클레어의 그런 활기찬 표정을 보고 안내인은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했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지금 엔화 가치를 생각하면 저 식으로는 50만원 미만이 됩니다만, 저 안에서는 코로나같은 것이 없었다는 설정이므로 일단 저렇게 하였습니다!

    =

    가을나무그늘에서 님, 후원 감사합니다!

    요즘 글 쓰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선작해주시고 후원해주시는 게 너무 신기해서요. 선작수가 벌써 9천을 넘어 1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이제 고작 한 달 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러니 그저 벌써 이렇게 저의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 열심히 글을 쓸 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제게 선물해주신 작가라는 명칭에 어울리도록, 제대로 끝까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가르미르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는 내내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독자 여러분의 응원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이렇게 매일 읽어주신다는 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매일 글을 쓰면서, 글의 분량이 쌓여가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며 느끼는 즐거움이, 독자여러분께서 글을 읽는 동안 조금이나마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때는 참 걱정이 많았었는데, 독자 여러분 덕분에 마음이 많이 놓였습니다. 제가 언제 어떤 글을 쓰더라도 좋아해주실 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이라 요즘은 글 쓰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독자 여러분께서 매일 와서 읽어주실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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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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