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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4

     

    “고트베르크 선생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우렁찬 목소리였다.

     

    땀을 뻘뻘 흘리는 휴고는 꽤나 긴박해 보였는데, 이유는 대충 상상이 갔다.

     

    ‘안고 있는 아이가 딸이구나.’

     

    휴고의 진료기록을 살폈더니 내의원에서 치유 받은 기록은 전부 딸의 것이었다.

     

    가족의 병원비 때문에 집안이 흔들리는 일이야 흔하게 봤지만, 이 세상에도 있을 줄이야.

     

    휴고는 얼마 전까지 내의원 치유사로 일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루한 행색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급한 마음은 이해 가는데 환자가 이만큼이나 있어. 줄을 서겠어?”

     

    “주, 줄 말입니까.”

     

    휴고는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흑마술사가 되기 전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얌전하다.

     

    “기사.”

     

    “부르셨습니까, 선생님.”

     

    나는 타냐 옆에 서 있던 월광궁 기사에게 부탁했다.

     

    “방금 간 남자가 안고 있던 소아 환자, 물이랑 담요 갖다 줘.”

     

    “예.”

     

     

    [No. 025 검은 손의 저주 21%]

     

     

    휴고의 증오심은 딸이 죽은 데서 비롯한다.

     

    이 세상의 소아 생존률이야 원래 높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나뿐인 자식이다.

     

    단순히 확률이 어떻다고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귀여운 어린아이가 병사하는 건 나도 보고 싶지 않고.

     

    휴고의 딸은 성심성의껏 진찰해야겠다.

     

    “다음 환자, 진단. 감기, 아스피린이랑 마스크 받아가고, 평소에 손 잘 씻고 다니쇼.”

     

    나는 진찰을 이어나갔다.

     

     

     

    ***

     

     

     

    휴고는 순서를 기다리며 에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던 도중 한 호위기사가 그에게 와서 담요와 깨끗한 물병을 건넸다.

     

    “선생님께서 가져다드리랍니다.”

     

    “제게요?”

     

    “따님이 많이 힘들어 보이신다고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호위기사가 무뚝뚝하게 용건만 전하고 돌아갔다.

     

    에리를 푹신한 담요로 감싸고 물을 천천히 먹이니 조금 편해 보인다.

     

    ‘잠깐 사이에 제대로 지켜봤던 건가.’

     

    휴고는 신기하다 생각했다. 황실 주치의나 되면 일반 환자를 직접 보지도 않을뿐더러 일일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휴고는 고트베르크가 진찰하는 모습을 슬쩍 살펴봤다.

     

    “아이고,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 사흘 전에 왔었지. 어디, 추가 감염은 없고. 이제 항생제 안 먹어도 되니까 손만 잘 씻고 다니쇼.”

     

    “선생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치료비는 어떻게 해야….”

     

    “뭐? 치료비? 내가 벼룩의 간을 빼먹지. 됐수다, 마음만 받을게. 이거 사탕 가져가서 애기 주고.”

     

    환자들을 계속 상대하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치료하며 즐거운 눈치다.

     

    휴고는 신기한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기술을 쓰는 것부터,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까지.

     

    ‘내의원은 실적 올려서 승진하려는 치유사밖에 없었는데.’

     

    다른 치유사들과 다르게 고트베르크의 줄은 순식간에 줄어든다. 손이 빠른 덕이다.

    그럼에도 불만을 표하는 재진 환자가 한 명도 없다.

     

    ‘이 분이라면.’

     

    휴고는 동앗줄을 잡는 심정이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어 고트베르크와 대면할 수 있었다.

     

    “다음. 아, 목소리 큰 친구. 어디, 양손이 오염됐고.”

     

    “저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딸을 봐주십시오.”

     

    “그럴 줄 알았지. 타냐 단장, 부탁해.”

     

    호위기사들이 간이침대를 가져왔다. 휴고가 에리를 눕히자 라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기도 잠시, 표정을 풀고는 가벼운 말투로 에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 공주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니?”

     

    “콜록, 에리에요.”

     

    “에리. 지금부터 선생님이 에리가 어디가 아픈지 확인할 거야. 다 끝나면 이거 줄게.”

     

    라스가 품에서 사탕을 하나 꺼냈다. 에리가 눈망울을 크게 뜨고는 방긋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도 잠깐, 금방 기침을 콜록댄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심한 기침이었다.

     

    라스가 진단, 이라고 짧게 말하고는 에리의 입 안쪽을 살폈다.

     

    발광 아티팩트로 구석구석 확인한 후 그가 휴고에게 말했다.

     

    “만성편도염.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경우가 있어. 소아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때가 고비지. 자네도 어릴 때 증상이 있었어?”

     

    “아뇨, 저는 없었습니다. 애기엄마가 몸이 약하긴 했습니다만 에리도 태어날 때부터 이러진 않았는데….”

     

    “면역력이 약해져서 다른 질병에 잔뜩 감염된 상태야. 고열과 기침. 전신 쇠약. 인후통도 심하겠지. 장하게도 잘 버티고 있어.”

     

    “시, 심각한 상태입니까?”

     

    “우선 기침부터 줄이자고. 이걸 먹으면 한결 나아질 거야.”

     

    라스가 에리에게 기침약을 먹였다.

    치료 효과와 함께 이어지던 에리의 기침이 잦아들었다.

     

    “오오….”

     

    치유술로는 간신히 예약을 잡아 주문을 써도 증상이 낫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반면 라스의 치료법은 빠르고 정확하다. 휴고는 그의 기술에 관심이 갔다.

     

    “소아니까 아스피린은 쓰기 꺼려지는데. 일단 기력을 되돌리려면 이게 낫겠어.”

     

    라스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후우욱.

     

    천천히 라스의 손끝에서 퍼져나오는 새하얀 기운.

     

    아지랑이가 흐르며 은은한 파동이 되어 조금씩 에리의 작은 몸을 감싼다.

     

    ‘치유주문…!’

     

    휴고는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라스가 시전하는 치유주문은 그가 봤던 어떤 치유사의 주문보다도 깨끗하고 강렬했다. 그가 치유사로서도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 수 있었다.

     

    “후우.”

     

    시전을 마치니 에리의 피부색이 확 달라졌다. 생기가 돌아온 것이 체력이 회복됐다는 표가 난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어. 그럼, 그럼.”

     

    라스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쳐 보이진 않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치유주문에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신가.’

     

    휴고는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점점 해주주문을 쓰기 힘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다. 해주를 할 때마다 더욱 치유술을 못 쓰게 되고 에리를 고쳐줄 길과는 멀어진다. 자연스레 거부감이 올라오는 것이다.

     

    ‘선생님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지도 모르겠군.’

     

    그럼에도 에리를 위해 주저 없이 치유술을 써준 그에게 감사가 피어올랐다.

     

    “증상만 호전시켰을 뿐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됐어. 빠르면 몇 주 안에 재발하겠지. 몇 년 동안 계속 이런 상태였어?”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내의원에서 치유 받았습니다.”

     

    “사진 한 장 찍어보자.”

     

    “사진이요?”

     

    라스는 휴고와 함께 에리를 근처에 설치한 천막 안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라스가 에리를 데리고 무언가 작업을 하더니 금방 휴고를 앉히고 수정구로 공중에 띄운 사진을 보여줬다.

     

    “잠깐 여기 좀 볼래. 이게 지금 에리의 목 안쪽이거든.”

     

    “안쪽 사진이요?”

     

    “그래. 뭔지 이해하겠어?”

     

    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자주 상대하던 그는 사람의 뼈를 볼 기회도 많았다. 사진이 에리의 두개골이라고 금방 이해했다.

     

    “여기가 턱, 안쪽이 목이군요.”

     

    “기대 이상인데. 그럼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

     

    라스가 지시봉으로 한군데를 가리켰다.

     

    에리의 목 안쪽에 하얗게 표시된 길쭉한 무언가가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주변 구조에 비해 이질적인 모양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 이물질이야. 가시, 바늘, 대충 그런 종류. 찍힌 걸 보면 철 재질이야.”

     

    “이물질! 이게 지금 에리의 목 안쪽에 박혀있다는 뜻입니까?”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편도 안쪽. 소아 환자라 잘 살펴야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각도야. 상시적인 자극 때문에 편도염 주기가 잦아지고 현재는 편도주위 농양으로 발전했어.”

     

    “농양이라 하면…?”

     

    “혹이 있어. 제거해야 해. 치유술은 이물질이 있는 채로 재생시키니 이 상황에서는 도움이 안 돼.”

     

    “그럴 수가.”

     

    휴고가 머리를 감싸며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후우… 여태 에리가 고통스러워하던 원인이 그거였군요. 저 조그만 게 얼마나 아팠을지.”

     

    “자네 잘못은 아냐. 보통 모를 수밖에 없거든. 치유술은 파편 따위가 박힌 채로 신체를 재생해버리지. 이물질은 내부에서 계속 발병인자가 되고. 해부가 불법이니 알려지지 않았어.”

     

    그의 말대로 산 사람에 몸에 칼을 대는 자는 악인, 주로 흑마술사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시체도 제물로 쓰기에 해부는 철저하게 불법이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스가 톡톡, 검지로 관자놀이를 몇 번 두드리다가 대답했다.

     

    “휴고, 자네 마인드는 얼마나 열려 있어?”

     

    “엇, 제 이름을 아십니까?”

     

    “왜 몰라. 내의원에서 봤잖아.”

     

    “어엇…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휴고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지금의 자신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마인드라 하시면 어떤 의미십니까?”

     

    “내가 에리의 몸에 칼을 대서 고칠 수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냐는 소리야.”

     

    “칼을… 댄다고요?”

     

    휴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이 사람에게 칼을 들이미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위협하고, 공격하고, 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고트베르크의 말이다.

     

    이미 혁신적인 방법으로 많은 이들을 치료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가 환자들을 대하는 자세는 가벼울지언정 결코 장난스럽지 않았다.

     

    “…선생님을 믿겠습니다.”

     

    휴고가 결심하고 눈을 부릅떴다.

     

    “부탁드립니다. 에리를,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고쳐만 주십시오…!”

     

    홱, 고개를 숙이는 휴고.

     

    라스가 그를 보고 슬쩍 미소를 띄웠다.

     

    “좋아. 딸은 내게 맡겨. 반드시 고치겠어.”

     

    “저, 정말입니까!”

     

    “그럼 대금 이야기인데.”

     

    턱, 희망이 가득 찼던 휴고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면 황실 주치의가 직접 일반인 환자 한 명을 위해 이만큼이나 시간을 쓰는 것이니 합당한 비용을 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한 푼도 없다.

     

    포기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을 때 라스가 그의 어깨를 턱 잡았다.

     

    “자네, 해주 좀 친다며.”

     

    “예? 아, 예… 해주 말고는 못 합니다.”

     

    “내가 풀어야 하는 상급 저주가 하나 있거든. 최상급일라나? 그것도 자네가 판단해줘 봐. 아, 그 전에 우선 사룡 해주부터 하고.”

     

    이어지는 라스의 제안을 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

     

     

     

    “아직도 사룡 사체의 해주가 안 됐다고? 대체 뭣들 하는겐가!”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한 알베리치가 지하로 내려와서는 해주사들을 나무랐다.

     

    “이런 월급 도둑놈들 같으니. 이만한 드래곤 시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나? 헤이케 황녀님이 닦달하고 계시단…”

     

    쿵.

     

    지하재단의 문이 열리고 역광과 함께 한 무리가 걸어들어왔다.

     

    알베리치는 휘날리는 흰 가운을 보고 눈매를 찌푸렸다.

     

    “자네, 고트베르크! 감히 우리 치유사들을 맘대로 외부 활동에 데려갔더군. 언제까지 내의원을 멋대로 휘저을 셈인가!”

     

    “자자, 됐고 자리 좀 비켜주십쇼. 사룡 사체 가져가러 왔거든요.”

     

    여유로운 라스의 태도에 알베리치가 그를 비웃었다.

     

    “하! 기본적인 상식도 없군. 사체는 해주하지 않으면 재단에서 한 발짝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행여나 저주가 새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 알지요. 물론 해주해서 가져갈 겁니다.”

     

    라스가 슬쩍 몸을 비켰다.

     

    그의 뒤에서 덩치가 큰 검은 손의 치유사가 한 명, 라스와 같은 가운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꾸끼몬스터님 1000코인 후원 감사해요!! 어우 엄청 큰 후원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배레드부터 잊지않고 찾아와 주셔서 감동이에요! 축하도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그때만큼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어요..!

    Ayanami님 109코인 후원 감사해요..!! 첫작 완결때 후원해주셔서 굉장히 뿌듯했는데 꾸준히 읽어주셔서 항상 기쁩니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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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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