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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4

       아카데미로 복귀 후 나는 평상시와 같이 생활했다.

       

       아침회의 후 교내를 순찰하고 각 과목별로 참견을 하고 디저트 카페에서 간식을 사먹고 오후에는 교수들이랑 운동도 하고.

       

       정말 운이 좋게도 여기 아카데미에는 잘 정비된 테니스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교수들과 테니스장에 모여 돈을 걸고 팀전을 한다.

       

       오늘은 애나와 내가 한팀을 먹고 상대편은 린더스 아니, 리나와 웨이버.

       

       처음 애나가 테니스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상당한 의구심을 품었다.

       

       애나는 평소에 굉장히 느릿느릿 굼뜨고 체형도 격한 스포츠에 어울리는 편이 아니라.

       

       하지만 막상 경기에 임하자 그런 의문을 싹 해소되었다.

       

       퍼어억-!!

       

       애나가 체중을 실어 휘두르는 라켓은 굉장히 파괴적이었고 총알처럼 날아가는 공을 받아내기 위해 웨이버와 리나는 정신없이 코트를 뛰어다녀야만 했다.

       

       거기에 나도 현생에서부터 테니스를 제법 해왔기에 결국 우리팀이 압도적인 점수차로 이기게 되었다.

       

       “와, 이건 뭐… 상대가 안 되네.”

       

       허리에 손을 얹은 웨이버는 혀를 내둘렀고 리나는 가슴팍을 펄럭이며 땀을 식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잘했다, 애나.”

       

       “감사합니다….”

       

       라켓을 늘어뜨린 애나가 고개를 떨구며 웅얼거렸다.

       

       “그럼 너희가 오늘 간식 쏘는 거지? 얼른 가자. 목마르다!”

       

       우리는 모두 디저트 카페로 몰려가 주스 등의 음료를 시켰다.

       

       “맛있어요….”

       

       주스를 쪼오옥… 쪼오옥… 세상 느릿느릿 빨아 먹으며 애나가 음침하게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내 맞은편에 앉은 리나가 물었다.

       

       “저번에 전적지 답사에서 참전용사들이 교수님 보고 막 울었잖아요? 탈환전 때에 만났던 분들인가요?”

       

       “어, 맞아. 10년이나 지나서 잊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그런 곳에서 만난 사람을. 그러면 같은 군단에 계셨던 거예요?”

       

       “그건 아니야. 나는 공격 쪽이었고 그 사람들은 성 안에 갇힌 쪽이었고.”

       

       “아하, 그렇구나. 그럼 라이너스의 경의 성 탈환 이후에 구출하면서 만났던 모양이네요. 세상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요.”

       

       리나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종종 느끼는데 리나는 꼭 리트리버 같다. 누구든 꼬리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그런 친절하고 긍정적인.

       

       “수석교수님. 저쪽 좀 보시죠.”

       

       그때 웨이버가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은 교수실들이 모여 있는 본청 후면.

       

       웨이버가 가리킨 곳의 창가에 누군가 서있다가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이론수석 이스메라였다.

       

       “아까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적지 답사 이후로 종종 저러네요.”

       

       그때 이스메라는 나랑 키르린이 애들은 놔두고 한가롭게 산책이나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성격이 더러워서라기 보다는 이론수석 겸 교감대리로 강한 책임감을 느낀 탓이겠지.

       

       그렇다고 나랑 키르린이 띵가띵가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일까 그후로 나를 보는 이스메라의 눈빛이 전보다 더 살벌해졌다.

       

       그나마 예전에는 엘프 특유의 태도로 늘 웃는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아예 대놓고 자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혈엘프라서 그런 모습조차 예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번 저렇게 등뒤에서 노려보는 건 좀 그렇긴 해.

       

       뭐, 그 동안은 키르린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나 때문에 속이 새카맣게 탔을 테니 이해해 줘야지.

       

       나중에 황성에 들르면 황녀님한테 이스메라를 교장으로 올리는 방안에 대해서 말을 좀 해봐야겠다.

       

       이제 아카데미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내가 굳이 교장으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될 것 같거든.

       

       나는 그냥 전투수석으로 있고 키르린도 암살교수로 내리고 이스메라가 교장이 되는 모습이 최선일 것 같단 말이야.

       

       다만 황제가 개발작한다는 게 문제지만.

       

       그놈의 약속이 대체 뭐라고 변절 다크엘프의 딸을 교장으로 앉혀놓고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하냐.

       

       만약 황녀님이 이스메라를 교장으로 올리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나오면 그 네마라라는 놈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볼까.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나중에 생각을 해보자.

       

       

       # # # # #

       

       

       웨이버와 상점가 목욕탕에서 씻고 느긋하게 퇴근했다.

       

       몇 번의 봄비 이후 이제 슬슬 여름에 접어드는 시기.

       

       하늘은 이미 자색으로 물들어 동쪽 하늘에 별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저기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훈풍은 막 목욕탕에서 나온 내 몸의 열기를 식혔다.

       

       참 좋단 말이지.

       

       라이너스를 프롤로그 시점까지 살리기 위해 뭣 빠지게 뛰어다녔고 이후 스토리에 맞춰 마왕을 죽이고 엔딩을 맞이했다.

       

       엔딩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하니 조용히 숨어서 여생을 즐기려 했지만 의도치 않게 끌려온 아카데미.

       

       그리고 여기서의 생활도 대만족중.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은 낙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쳤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나처럼 좋은 곳으로만 도망쳤으면 됐잖아.

       

       “아, 맞다!”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마야 사제의 그 환자일지를 확인을 못했잖아?

       

       지금이라도 가볼까.

       

       아니지. 집에서 올리시아가 밥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출근하면 잠깐 들러보자.

       

       그런데 도대체 뭐라고 해야 환자일지를 볼 수 있으려나….

       

       그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문득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담벼락에 키르린이 기대고 서있다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몸을 세운다.

       

       “디, 디안…. 퇴근하고 있어?”

       

       “여기서 뭐하세요?”

       

       “으응, 나도 퇴근중이었지….”

       

       뭐라는 거야, 저 다크엘프는. 자기 사는 기숙사는 여기서 반대편인데.

       

       “뭐 용무라도 있으세요?”

       

       “그게… 이렇게 우연히 만났는데 시간도 애매하고….”

       

       키르린이 꾸물거리면서 자꾸 말을 빙빙 돌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이라도 같이 먹지 않을래…?”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 그래! 그럼 얼른 가자!”

       

       신이 난 키르린이 쪼로록 달려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디안…. 시내 식당에 가자는 거였는데… 여기는 반대쪽이잖아….”

       

       계속 우리집 쪽으로 가자 키르린이 다소 긴장해서 두리번거렸다.

       

       “밥을 먹자고 했지 다른 것을 하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 뭔소리해요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건데.”

       

       “하지만 여기는 외져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 것만 같은 곳이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다 왔어요.”

       

       우리집 앞에 멈춰서자 키르린의 눈이 커졌다.

       

       “여, 여기는…?!”

       

       “야아, 올리시아! 나 왔다! 손님도 왔어!”

       

       “히익?!”

       

       올리시아의 발소리가 들리자 키르린이 기겁하면서 뒷걸음질쳤다.

       

       “내일 보자, 디안!”

       

       그 말을 끝으로 키르린이 다크엘프 특유의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저편으로 도망쳤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손님은요? 왜 혼자 계세요?”

       

       “있었는데 없어졌어.”

       

       “네? 장난 치신 거예요? 들어오세요. 밥 다 해놨어요.”

       

       올리시아와 함께 앉아 밥을 먹으며 키르린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올리시아가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낯이 있으면 집에 못 들어오시겠죠.”

       

       “무슨 일 있었냐?”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죠? 교장 선생님이 디안 님을 찾으러 왔다고요. 라이너스 경의 집에 다녀온 날이요.”

       

       “아아아! 그래그래. 기억났어.”

       

       그때 키르린이 막 빨래를 마친 내 셔츠에 코를 바고 있다가 올리시아에게 걸렸었지.

       

       깜빡하고 있었네. 그러니 내가 우리집으로 데려오니 당황하는 수밖에.

       

       “디안 님. 도대체 교장 선생님이랑은 무슨 관계세요?”

       

       “아무 관계도 아니야.”

       

       “교장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나도 모르지, 이 녀석아. 밥 더줘.”

       

       주방 냄비에서 음식을 가져오며 올리시아가 말했다.

       

       “제 생각에 교장 선생님은 디안 님을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옷 냄새를 맡고 있었겠어요? 안 좋아하면서 그러면 미친 여자죠.”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것뿐이야. 아직 다른 건 없다.”

       

       “흐음, 그렇군요.”

       

       올리시아는 밥도 안 먹고 혼자 볼을 부풀리며 생각에 잠겼다.

       

       키르린이 나 좋아하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병신 고자도 아니고.

       

       그런데 진짜로 딱 거기까지. 나는 키르린에게 지금은 동정심 말고는 딱히 다른 마음이 없어서.

       

       좋아한다고 무조건 나도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지.

       

       하지만 올리시아는 그게 아닌가 보다.

       

       “디안 님.”

       

       올리시아가 세상 진중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과 잘 해보세요.”

       

       “뭘 잘하라고.”

       

       “좋은 방향으로 관계를 발전시켜 보라는 거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디안 님은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잖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생각이세요?”

       

       “그럴 건데. 독신이 편해.”

       

       “말도 안 돼요. 사람은 짝이 있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 괜찮은 여자잖아요.”

       

       저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가만히 있어 봤다.

       

       “예쁘고 몸매 좋고 착하고 황립 아카데미의 교장을 하고 계시죠. 비록 다크엘프라는 점이 좀 걸리긴 하지만 뭐 어때요. 지금이 전쟁도 아니고.”

       

       “그래서, 나더러 키르린이랑 결혼하라 이거냐?”

       

       “만약 그러면 저는 좋아요.”

       

       “내가 결혼하는데 네가 왜 좋아? 아. 알겠다.”

       

       이 자식이.

       

       내가 교장인 키르린이랑 결혼하면 절대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여기 수도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아무리 똘똘하다지만 그래도 애는 애네.

       

       “언제 한번 교장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세요. 제가 아주 거하게 차려놓고 대접을 할 테니까요. 안방 침대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요.”

       

       “어린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딱밤을 때리려고 손을 뻗자 올리시아가 재빨리 피하더니 뭔가 생각나서 손가락을 튕겼다.

       

       “아참, 그리고 우편이 왔어요. 초대장 같은 거요.”

       

       “초대장?”

       

       올리시아가 거실 협탁에 올려진 편지봉투를 가져왔다.

       

       <타타노크 마을 재건의 날 행사> 초대장이었다.

       

       이거 라이너스 놈이 보낸 거로군.

       

       저번에 우리가 마왕군에게서 구해준 마을 행사에 같이 가자더니, 그게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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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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