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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5

    시엔은 오랜만에 얻어낸 휴식을 이용했다.

     

    간만에 거친 숨소리와 비명 소리에서 멀어져 햇살을 느낀다.

     

     

    그녀는 풀이 자라나는 작은 공터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그녀를 수호하는 성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신경을 끈다.

     

     

    이런 풀밭에 앉아있으면 과거로 돌아온것만 같아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시엔은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전쟁과 폭력에 무지해 끝없이 밝은 그들을 보면, 시엔의 마음도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어찌보면 그녀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저런 순수함을 지키고자 진흙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를 위해서 이토록 고생하는 게 먼저였지만…저런 웃음 또한 그녀가 지키고 싶은 것들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도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아본 시절이 있었기에 그러고 싶었다.

     

     

    부모님을 잃고 더 험한 현실에서 굴러야하는 순간에도, 베르그 때문에 그 모든 지저분한것에서 멀어질수가 있었다.

     

     

    비슷하게 어렸던 베르그는 그녀를 위해 스스로의 손을 더럽혔다.

     

    슬럼가로 오지 않을 수 있도록 막아주고, 고아원에 정착하도록 조언을 해줬다.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나타나면 대신 싸워주었다.

     

    그 거친 슬럼의 베르그가 자신에게만큼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

     

    모르는 남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본다면 불행했다 여길지도 모른다.

     

     

    어렸을때부터 몸이 아파 고생하고.

     

    조금 나았을때는 슬럼에서 창녀로 팔려나갈뻔하고.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되고…

     

     

    하지만 시엔에게 어렸던 시절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보물과도 같았다.

     

    특히나 베르그가 함께한 이후부터는 무엇하나 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와 함께한 7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 의지한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끊어져버린 베르그와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자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교단이 듣는다면 분명 뒤집어질만한 속마음이었다.

     

    순결의 성녀가 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어한다는게.

     

     

    하지만 시엔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마음은 베르그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있어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그를 위해 모든걸 바칠 수 있었다.

     

    그가 죽지 않을 미래를 위해 지금도 노력중이었다.

     

     

     

    어린시절을 함께한만큼, 베르그를 향한 마음이 가슴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성녀가 된 자신을 사랑해준게 아니었다.

     

    시엔이라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를 사랑해주었다.

     

    그의 대가없는 사랑이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느낀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시엔은 손등에 내려앉은 헤아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

     

    수백번도 더 했던 생각.

     

     

    이 문양이 없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

     

    …분명 베르그와 함께하고 있었을 거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부둥켜 안고 하루를 느긋하게 보냈을 거다.

     

    서로를 만지고,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귀여운 아이들도 몇 낳았을지도 모른다.

     

     

    -투둑…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시엔의 얼굴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

     

    휴식의 부작용이 바로 이것이었다.

     

    전장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으니 그나마 나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면 가슴이 또 찢어질 듯 아파온다.

     

     

    모든 행복한 상상 끝에는 지금의 현실과, 이별의 순간 눈물을 흘리던 베르그의 모습만 떠올랐다.

     

    ‘…가지마, 시엔….제발…’

     

    맞아서 피가 터져도, 슬럼출신이라 무시 당해도, 친구들과 이별을 하더라도 끄떡없던 베르그가, 자신의 잔인한 말에 힘없이 눈물을 흘렸다.

     

    ‘제발…제발 부탁이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자존심도 놓고 애원했던 베르그였다.

     

    자신을 위해 모든걸 들어주었던 그였지만, 시엔은 그 한번의 애원조차 들어주지 못했다.

     

     

    그게 너무나도 아팠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성녀님, 기도 시간입니다.”

     

    그 순간, 한 성기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시엔은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베르그의 과거가 생각나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어낸다.

     

     

    그리고는 어렵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쿵.

     

    시엔은 기도실에 홀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오늘도 돌아온 기도 시간.

     

    헤아를 형상화한 석상이 시엔을 굳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몸에 익은 움직임으로 헤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기도를 외웠다.

     

    ‘…네가 행복하기를. 네가 안전하기를.’

     

    이건 헤아를 존경하기에 올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오로지 베르그를 위한 기도였다.

     

    ‘…네가…나만큼 나를 그리워하기를.’

     

     

    그러다 문득, 한 불경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

     

    그 생각에 기도를 더는 이어갈수가 없었다.

     

    순간적인 화가 머리에 차오른다.

     

     

    “…”

     

    오늘 또 다시 베르그를 생각하다 눈물을 흘려서 그럴까.

     

    수백번 물어도 대답받지 못했던 질문을 질리지도 않고 헤아에게 묻는다.

     

    “….왜…”

     

    석상은 미동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저에요? 대답 좀 해보세요…”

     

    문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무거운 업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더라면 얼마나 편했을까.

     

    손짓 한번에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의 힘을 지녔지만, 원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왜 저였어요?”

     

     

    시엔은 대답이 없는 헤아에게 말했다.

     

     

    “…..왜…우리였어요?”

     

     

    모든게 다 깊은 뜻이 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아프다.

     

     

    이내 시엔은 손을 덜덜 떨어가며 빌었다.

     

    “…헤아님…제발…”

     

    온 마음을 간절히 담아본다. 이번에는 헤아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며.

     

    “…제발 저 좀 놓아주시면 안돼요?”

     

    텅 빈 방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저는 놓아주시고…다른 성녀를 선택해주실 순 없나요? 충분히 노력했잖아요…저… 충분히 희생했잖아요…”

     

     

    시엔은 때론 제 약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베르그처럼 강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데, 자꾸만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도망치면 교단은 어떻게 반응할지.

     

    몇 명의 무고한 사람과 아이들이 그 선택으로 죽게 될지.

     

    동료들은 어떻게 될지.

     

    …베르그는 어떻게 될지.

     

     

    그 생각들에 도무지 도망을 칠수가 없다.

     

    문양이 남아있는 동안은 이대로 있어야만 했다.

     

    문양이 죄수 낙인처럼 느껴져본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피해가 자신에게만 온다면 다 버틸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시엔은 이토록 고통받는 수 밖에 없었다.

     

     

    “….”

     

     

    오늘도 대답이 없는 헤아를 보며 시엔은 울음을 그쳤다.

     

    “…”

     

    자연스레 그녀의 손이 품으로 향한다.

     

    품에서 헤아의 문양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나왔다.

     

    -짤랑…

     

    꽃과 닮은 그 문양.

     

     

    죽은 눈으로 시엔은 목걸이를 벗은 뒤, 왼손에 쥐며…헤아의 문양이 그려진 오른 손등을 바라보았다.

     

     

     

    -…콱!

     

     

    ****

     

     

     

    시엔은 용사일행의 오후 모임에 참석했다.

     

    다들 간만의 휴식에 혈색이 돌고 있다.

     

     

    시엔만이 그러지 못했다.

     

    부은 눈으로 나타난 그녀를 보며 실프리엔이 입을 연다.

     

    “…성녀님…”

     

    이내 붕대가 둘러진 오른손을 보며 헛숨을 들이쉬었다.

     

     

    “서, 성녀님…또…”

     

    시엔은 그들에게 걱정을 끼친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솟았다.

     

    “…죄송해요.”

     

    “…”

     

    그리고 그런 그녀가 사과를 하니, 실프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시엔이 내적으로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봐온 실프리엔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화의 신에게 선택받은 그녀라 조율을 잘해주는걸지도 모른다고 시엔은 생각했다.

     

     

    그리고 실프리엔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용사 펠릭스와 켄타우로스 아크란도 입을 다물었다.

     

    다들 모르는척 해주는게 낫다 생각한 듯 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우리.”

     

    그럼에도 펠릭스는 일행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건 변함 없는 진실이었다.

     

     

    시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제 마음을 감춘다.

     

    표면적으로라도 기운을 낸다.

     

     

    이내 긴 한숨을 내쉰 펠릭스가 말한다.

     

    “다음 행선지는 마왕이나 그의 오른팔을 잡으러 가는게 아니야. 전선의 보급로에 위치한 도시가 위험하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말이야. 그곳부터 해방하러 가야할 것 같아.”

     

    “어디지?”

     

    아크란이 묻는다.

     

    “남부의 잭슨 가문.”

     

    펠릭스가 답했다.

     

    “인족 가문이네요?”

     

    시엔이 물었다.

     

    “맞아요. 실프리엔?”

     

     

    실프리엔이 펠릭스의 말을 이어받는다.

     

    언제나 그랬듯 목표지에 대한 정보를 나열한다.

     

    “네. 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지의 상황이 최근들어 급격히 나빠졌나 봐요. 전쟁이 길어진것도 하나지만…또 하나는 가주였던 잭슨 공이 돌아가신 게 가장 큰 문제였을거에요.”

     

    아크란이 턱을 쓸었다.

     

    “…잭슨 공이 지도력이 좋았나보지? 가주가 죽었다고 영지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질 정도면.”

     

     

    실프리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대에요.”

     

    “응?”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 않고 돌아가셔서…아들들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고…”

     

    “장남이 이어받는게 일반적이지 않나?”

     

    “그게 일반적이겠지만…잭슨 공은 아내가 여럿이었어요. 아내마다 아들도 두었고요. 복잡해진거겠죠.”

     

    “아. 일부다처제.”

     

    아크란은 콧방귀를 뀌었다.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가 됐든, 가보자고. 언제나 그렇듯 가는길에 도울 곳이 있으면 도우면서 말이야.”

     

    “그러자.”

     

    “네.”

     

    “…네.”

     

     

    이야기가 끝나자, 펠릭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성녀님, 힘드시다면 며칠 더 쉬었다가-”

     

    “-아니에요.”

     

    시엔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척 연기한다.

     

    힘든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아크란도 말한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실 생각을 하시면 안돼요. 저희는 부축을 해주던, 일으켜 세워주던 서로를 도와가는만큼 체력이 남습니다. 홀로 일어서야 하는 성녀님과는 사뭇 달라요. 저희가 성녀님에게 맞추는게 옳습니다.”

     

    “충분히 쉬어서 그래요, 아크란. 잠시 어제의 그 이름을 듣고 흔들린 것 뿐이에요.”

     

     

    펠릭스와 아크란, 그리고 실프리엔은 이내 시선을 교환했다.

     

     

    시엔은 지지않고 제 의견을 피력했다.

     

    하루 이틀차이가 클지 않을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을 완수하고 싶다.

     

    베르그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지만 마침내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다가올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자. 출발해요, 여러분.”

     

    그러니 그녀가 말했다.

     

    오늘도 거짓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배려 고마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ntityPlayer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후원 감사드려요! 재밌게 봐주시고 계신다고 믿겠습니다!ㅎㅎ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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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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