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5

       ─ SYSTEM : 현재 <흑사병>의 시련 진행도는 95%입니다.

         

       “후우….”

         

       겨우 이 사태를 진정시켰다.

         

       ─ SYSTEM : 현재 배드엔딩을 맞이할 확률은 81%입니다.

         

       클리어 확률은 여전히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한때 이 확률이 93%까지 올라갔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기한다면 지금은 훨씬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시련, 통칭 ‘흑사병’을 별 탈 없이 통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세피아 선생님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치료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 너무 오래 걸려.’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버티기만 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첫 번째 루트는 정공법으로 통했지만 동시에 플레이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지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방역망은 이미 뚫렸다.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던 의료진조차도 병에 걸리기 시작했고, 이 질병의 잠복기는 제멋대로라서 밀접접촉자의 격리 기간을 설정하기도 까다로웠다.

         

       최대한 초동 대응을 했지만, 수비해낸 건 아카데미뿐.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간 해피엔딩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버멜은 두 번째 공략 루트를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흑사병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히든 루트. 그 루트의 중심에는 어느 인물이 존재한다.

         

       ‘에테르.’

         

       본래라면 이번 시련과는 별 관련이 없는 캐릭터.

         

       그러나 흑사병 시련 이후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플레이어는 이번 전염병을 퍼뜨린 장본인이 에테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위계’만을 놓고 따진다면 에테르가 그 역병의사보다 몇 수는 위. 에테르야 기억 못 하고 있겠지만, 그 역병의사는 에테르가 어떤 존재인지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루트를 실행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흑주(黑晝)의 에테르’와 ‘병마(病魔)의 엔테로’를 접촉하도록 유인한다.]

         

       그것 하나만 해 줘도 역병의사는 제멋대로 착각하고 수도에서 물러난다. 만약 초회차 플레이어들이 이 루트를 우연히 뚫었다면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채 개발자에게 개연성을 지적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문제는, 명분이 없었다는 건데.’

         

       엔테로가 출몰하는 672번지 지하수로에 에테르를 데리고 갈 만한 이유가 부족했다. 흑사병의 매개가 모기이니만큼 날벌레가 잔뜩 서식하고 있는 지하수로에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 내가 왜? 뭐하러 그런 곳에 가야 하는데?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말 것이다. 실제로 로테나 프레이를 비롯한 주역들에게 제안을 하면 비슷한 대답을 한다.

         

       그러나 여유가 없다. 버멜은 그간 머리를 굴리며 에테르를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몇 개씩 마련하려고 안간힘을 짜냈다.

         

       본래라면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에테르가 자신의 제안을 수용할 확률은 1% 미만.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리셋 마라톤을 시킨 그 극악의 확률을 단 한 번에 뚫어야 한다. 버멜은 적당한 이유를 들어가며 에테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 돈만 주면 고.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이 너무나도 쉽게 뚫렸다.

         

       분명 설득하는 과정이 장난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어이없게 빗나가고 말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애가 맞나?’

         

       버멜은 급기야 그런 생각을 다시 꺼내기에 이르렀다.

         

       에테르가 빙의자일 가능성도 고려하긴 했다. 만약 그렇다면 최선의 상황이겠고, 해피 엔딩을 보기도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에테르가 플레이어라면 플레어 개발을 최대한 뒤로 미루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흑사병 시련이 플레어를 매개로 시작되는 건 2일차 뉴비도 알 정도로 널리 퍼진 사실이었으니까.

         

       반대로 게임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빙의했다?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수업시간에서 소녀가 보여준 마법 이해도는 정령왕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플레어를 원작보다 최소 3개월 이상 빨리 완성해낸 걸 보면 본체의 영혼이 확실하다.

         

       ‘혹시 몰라. 노벨상 수상자 정도 되는 인물이 들어가 있을 수도…. 아니, 그건 확률이 말도 안 되나.’

         

       아무리 계산해봐도 가늠이 안 되는 존재였다.

         

       자신과 지하수로로 동행해달라는 말에 에테르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 대가로 금화 한 장을 요구했다.

         

       버멜에게는 카우렐리아에서 가져온 목돈이 있었기에 금화 한두 장 정도는 쉬이 지출할 수 있었다. 오히려 금화 한 장으로 흑사병을 몰아낼 수 있다면 그만한 것이 없었다.

         

       ─ SYSTEM : 현재 <흑사병>의 시련 진행도는 98%입니다.

         

       “됐다.”

         

       버멜은 흐뭇한 미소를 띠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앞으로 2주. 세피아 선생님이 치료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그 기간 동안만 버티면 아카데미에선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제 1황자에게 집중할 수 있겠어.”

         

       <흑사병> 다음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련, <단두대>. 그 시련을 스킵하려면 황성 지하감옥에 유폐되어 있는 제1황자를 구출해야 한다.

         

       버멜이 책상에 앉아 구체적인 대비책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 우우웅.

         

       기숙사 내부에 연결되어 있던 핫라인이 울리기 시작했다.

         

         

       **

         

         

       “케흑, 켁.”

         

       로테가 쓰러졌다.

         

       붉은 꽃잎처럼 생긴 시뻘건 선혈이 입술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로테는 가까스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했다. 소녀는 침대 난간을 붙잡으며 힘없이 무너졌다.

         

       여태까지 로테는 감기 한 번 걸린 모습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한 아이였다. 새하얗게 변한 그녀의 안색에 내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너, 너 왜 그래…?”

       “마, 마리…….”

       “말이?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로테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로테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 주위를 만져보니 딱딱한 멍울 같은 게 잡힌다. 그 다음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한껏 달아오른 가마솥 뚜껑을 만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 나아…….”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분명,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생각처럼 바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난 후였다.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나는 재빨리 방역 마스크를 쓴 뒤 기숙사 안에 있었던 수화기를 잡아챘다. 긴급상황 발생 시 핫라인으로 연결하라는 지침에 따라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핫라인을 연결하는 곳은 의료진이 많이 있는 종합병원도, 방역 전문가들이 한아름 모여계신 황실 재난대책본부도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최적의 답안을 내려줄 단 한 명.

         

       [여보세요?]

         

       버멜 호르데.

         

       아니, 내가 빙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동향 사람. 그만이 해답을 알 것이다.

         

       나는 최대한 심호흡한 뒤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르데, 로테가 흑사병에 걸린 것 같아.”

         

       […거기 기다리고 있어.]

         

       그게 대화의 끝이었다. 누군가가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수화기가 끊겼다.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다. 분 단위로 악화되고 있는 룸메이트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버멜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착했다.

         

       완전무장된 방역복을 입은 사람 두어 명을 이끌고서.

         

       핫라인을 건 직후부터 도착할 때까지 불과 10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초동 대응이 미친 듯이 빨랐다. 이러니까 아카데미에 여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던 거였구나.

         

       버멜이 데려온 사람 중 한 명은 세피아 글리스턴 선생님이었다. 시트러스 계열 향수를 쓰는 투톤 칼라 헤어를 한 느긋느긋한 보건체육 선생님. 그녀가 로테의 병세를 진찰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초기네. 조치만 잘 하면 ‘철화’까진 막을 수 있겠어.”

         

       철화(鐵化), 이세계판 흑사병이 흑사병이라고 불리게 된 원인이 되는 증상이다.

         

       병세가 말기에 이르면 피부 조직이 쇠나 연탄재처럼 변한다. 전공자가 아닌 나로선 그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현대 의학으로 한 번 발생하면 고칠 수 없는 증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환자 전용 경구수액 만드는 법을 알려줄 테니까 잘 보고 배우렴.”

         

       세피아 선생님이 알려준 경구수액요법은 지구에서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소금이나 설탕 말고도 유자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용액을 섞어야 한다고 배웠다.

         

       “혹시 마스크 안 쓰고 있었니?”

       “…네.”

         

       이세계판 흑사병의 1차 발병 원인은 모기와 같은 날벌레지만, 지구에서의 폐렴형 페스트처럼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직접 옮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평균적인 잠복기는 나흘이고, 기침과 흉통과 같은 추가 증상을 동반한다.

         

       로테와 나는 못해도 3개월을 붙어 지냈다. 로테의 병세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면, 못해도 일주일 내에 나 또한 같은 증상을 앓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흐.”

         

       잠시간의 침묵. 방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스크만 쓰고 있던 나. 전신을 감싸는 두꺼운 방역복을 입고 서 있는 눈앞의 세 사람.

         

       지금까지 잘 버텨왔는데, 인제 와서 죽어버리는 걸까. 잘 모르겠다. 목이 칼칼하거나 전신이 뻣뻣해지는 감각 따위는 없다. 다만 매일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던 게 마음에 걸린다.

         

       “…….”

         

       모기에 물려 발병하는 1차 흑사병과는 달리, 비말을 통해 전염되는 2차 흑사병은 예후가 더 좋지 않다.

         

       로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저 눈빛을 보면 안다. 당장 고통받고 있는 건 자신인데, 걸리지 않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나부터 걱정하고 있는 모양새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보.

         

       살리에르 영애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역시 그 단어밖에 없으리라.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