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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5

        

         

       그리고 청이 세운 준엄한 법칙은, 승자로서 마땅히 패자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이는 패자의 의지를 이어받고, 남긴 유품을 이어받는 숭고한 행위였다.

       그래서 청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전낭, 없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청이 격분했다.

       이건 심각한 배신이었다.

       아무리 찔러달라고 스스로 등을 내준 악당이라고 해도, 사람이 좋은 일에 힘썼는데 어째서 보상이 없단 말인가.

         

       이런 현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청이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철저하게 몸수색을 실시했다.

       그러던 도중 손에 뭔가 닿았다.

       속저고리 안에 넣어두고 꿰맨 무언가였다.

         

       딱딱하게 둘둘 말린 것이 전낭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숨겨둘 정도면 분명 값이 나가는 물건이 아니겠는가.

         

       그래, 이거야! 믿고 있었다고!

       청이 환한 표정으로 속저고리를 북북 찢었다.

         

       그리고 뭔가가 손에 잡히는 순간-

         

       갑자기 무공창이 열어 달라고 떼를 썼다.

       청의 경험으로는, 온전한 비급이 손에 닿거나 구결을 전해 들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청이 무공창을 열었다.

       새로 추가되어 반짝반짝한 무공이 청의 눈에 들어왔다.

         

       소녀환희공. 테두리는 금색.

       금색이라. 금색이 보라색 다음이다.

       거기에 내공심법이네?

       내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지금 살짝 돌아가서 사부님한테 괜찮은 무공인지 여쭤보고 익혀야겠다.

         

       그렇다.

       청도 성장이란 것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청이 서문수린의 당부를 떠올렸다.

         

       제자가 무공과 연이 자주 닿으니, 당부하건데 비급을 얻게 되어 익히려거든 다 외우고 나서 불태우고, 사악한 것은 그냥 불태우거라.

       비급이란 그저 가지고 있는 만으로도 분란의 싹이 되는 것이란다.

         

        분란이라면 이젠 좀 지긋지긋하다.

       

       청이 화섭자를 꺼내들었다.

       화섭자는 불씨를 담도록 제작된 통을 말한다.

       사실 제법 가격이 나가는 물건이지만, 아직 삼매진화도 못 피우는 가녀린 제자를 위해서 서문수린이 챙겨준 물품이었다.

         

       참고로, 삼매진화란 초절정쯤 되는 무인들이 강환의 원리로 한 점에 온도를 높이는 수법을 말했다.

       진기를 무식하게 때려박아서 하는 일이 고작 불씨나 피우는 정도지만, 일찍이 그 편리함을 인정받은 기예이기도 했다.

         

       물론 청은 아직 절정의 경지였으므로, 그냥 화섭자나 들고 불을 피우는 신세였다.

         

       봄철 마른 낙엽을 몇 줌 모아 화섭자에 갖다붙이니 금세 불이 붙었다.

       소녀환희공의 비급은 기름 먹어 뻑뻑한 죽간이었으나, 결국에는 나무에 불과했다.

       주제에 뭐 얼마나 버티겠는가.

         

       소녀환희공의 비급이 불탄다.

       대대로 궁주만이 익혀 내려온 환희궁의 비전이 활활 타올랐다.

       그 옆에는 궁주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한 문파가 고이 간직해 이어왔던 비전의 맥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청이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에,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악당이 뭘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악업 사백이 넘는 년이었으니까.

       뭐 기껏해야 함정 아니겠어?

       괜히 휘말렸다가 동정호처럼 되지 말아야지.

         

         

       —-

         

         

       “……그러니까.”

         

       지승주가 무표정하게 보고를 정리했다.

         

       “서문청이 환희궁주를 암습해 죽이고, 그리고 나선 비급을 찾아 불태운 후 신녀문 방향으로 향했다?”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마교 외당 비작부 소속의 살수가 대답했다.

       함월이 유인을 맡아서 그 임무를 돕기 위해 함께 보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살수가 보았을 때, 청은 동종업계의 고수나 마찬가지였다.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은 살기, 일 초도 망설이지 않는 깔끔한 한 수.

       초절정 후기에 달한 고수조차 대응을 못하고 절명했으니, 살수였다면 진즉 중원에 그 이름을 날렸으리라.

         

       어지간한 독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급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마인의 비급 따위는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보다 더 독한 년이었군. 과연 서문수린의 제자라 이건가.”

         

       지승주가 혀를 내둘렀다.

         

       서문수린의 색마 증오는 유명했다.

       그 색마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남자 색마는 존재하지 말하야 하는 쓰레기.

       여자 색마는 여인 망신을 다 시키는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는 전부 불태워야 한다며 죽인 시체에 불을 질렀다던가.

         

       물론 아직 열다섯에 불과한 지승주가 전전대 활동하던 노고수를 겪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은 기록으로도 서문수린이 단단히 미친 살귀였다는 사실은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강호에 나오지 않고 신녀문에 틀어박혀 온화해졌다고 생각했더니.

       그 증오를 고스란히 제자에게 물려준 모양.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제자가 중원 먼 구석에 처박힌 노괴의 얼굴을 어찌 알아보고 처리를 했겠는가.

         

       “독심을 가진 정파의 여협이라……. 참으로 골치가 아프게 되었군. 하필이면 복신적이 또 그리로 흘러 들어갔단 말인가.”

         

       주인의 내공이 각인된 복신적이 그 흔적을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최소 사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조차 최소한으로 추정한 것이었다.

         

       하필이면 위대한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그 열쇠가 정파 무인의 손에 흘러들어가다니.

         

       “어떻게 할까요?”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모든 교인을 총동원해 서문청의 확보에 나선다. 서문수린이 눈치채기 전에.”

         

       살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그 아름다운 지휘를 볼 수 있는 것인가!

         

       지승주의 무공은 이제 이류의 턱걸이었다.

       그러나 마뇌의 진가가 무공에 있지 않았다.

       마뇌가 직접 지휘하는 천라지망이란……

         

       “각주님!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때 또 한명의 살수가 들어와 외쳤다.

         

       지승주가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책망하는 기색으로 두 번째 살수를 보며 물었다.

         

       “너까지 여기 와 버리면, 목표는 누가 추적하고 있지?”

         

       두 번째 살수가 대답했다.

         

       “지존께서 직접 사로잡으셨습니다.”

         

         

       —-

         

         

       “이봐. 거기.”

         

       여상한 목소리였다.

       청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허리춤까지 오는 장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다부진 턱이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실실 미소를 지으며 청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청의 표정이 굳었다.

         

       청은 고수다.

       고수의 이목을 속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청이 급히 상대의 업을 확인했다.

       -998.

       청이 바로 후회했다.

       시발. 괜히 확인했네.

       잘못하면 내가 일천을 채워주겠다 싶었다.

         

       청은 기본적으로 악강선약이었다.

       악인에게 강하게 나서고, 선인에게 약했다.

         

       그런데 또 약강강약이기도 했다.

       약한 악인은 좋은 장난감이지만, 강한 악인을 만나면 바짝 쪼그라들었다.

         

       그야 죽으면 억울하잖아.

         

       쓰레기통 뒤져 썩은 음식 먹고 벌레를 반찬 삼아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았는데.

       이제 좀 이쪽 세상에도 정이 드나 싶었는데.

         

       청이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누구세요?”

         

       “본좌?”

         

       에이 씨.

       청의 표정이 썩어들었다.

         

       스스로 본좌라고 칭하는 놈이라니.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놈이 틀림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채권자쯤 될 거다. 네가 본좌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가요?”

         

       “그래. 길이가 이 정도 되는 피리인데. 본 적이 있나?”

         

       사내가 팔을 벌렸다.

       꽤 익숙한 길이였다.

         

       청이 아주 잠깐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시야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흐릿한 것이,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다.

         

       사람이 아니거나, 엄청난 고수이거나.

         

       청이 곧장 마음을 정했다.

         

       “아하하. 길가다 주운 건데. 주인이 있는지는 또 제가 몰랐네요. 돌려드리면 될까요?”

         

       괜히 개기지 말아야겠다.

       청이 바로 복신적을 꺼내 내밀었다.

         

       사내가 방긋 미소지었다.

         

       “좋아. 도리는 아는 도둑 고양이로군.”

         

       청의 팔뚝에 소름이 쫙 타고 올라왔다.

       도둑 고양이?

       지금 제 입으로 도둑 고양이라고 했나?

       맨정신으로 사람이 올릴 수 있는 말이야?

         

       진짜 단단히 돌아버린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청이 다시 마음을 정했다.

       엮이지 말아야지.

         

       청이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사내가 물었다.

         

       “근데. 불었나?”

         

       분명 한번 소리를 내면, 다음부터는 불어서 잠금해제가 되는 마술 피리라고 들었다.

         

       이거 속인다고 속아 주려나?

       괜히 거짓말했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청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사내가 씩 웃었다.

         

       “불었네?”

         

       “……불었으면요?”

         

       “어쩔 수 있나. 본좌의 물건을 멋대로 가져간 것도 모자라 그 주인이 되었으면, 그쪽 역시 내 물건으로 치는 수밖에는.”

         

       어쩜 대사 하나하나가 저리 주옥같지?

         

       청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크게 내쉬며 속을 진정시켰다.

         

       “초면에 죄송한데, 혹시 경지가 어떻게 되시는지……”

         

       “본좌 말인가? 곧 자연경에 닿을 존재지.”

         

       자연경은 말년의 검제가 닿았다고 추정되는 전설상의 경지였다.

       서문수린의 말로는 세상 누구도 닿아본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지어낸 순 거짓말이라고.

         

       그럼에도 곧 자연경에 닿을 존재라니.

       그 바로 아래인가?

         

       “어. 기천경에 계세요?”

         

       “아니. 기천경에도 곧 닿겠지.”

         

       “그럼 생사경에 계시다는……?”

         

       “아니. 생사경에도 곧 닿을 것이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청이 욕설 참기 오백 배를 겨우 견뎌냈다.

       나쁜 말 하지 말자.

       개기면 안 되니까.

         

       “그럼 현경이라는 말이에요?”

         

       “본좌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현경에 이를 수 있겠지.”

         

       그러니까 현경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어째 점점 내려가는데?

         

       청이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초절정까지는 어찌 비벼볼 만하다.

         

       분위기 잔뜩 잡아놓고 별놈 아니기만 해 봐.

       여래신장 오백 배 박을 줄 알아라.

         

       청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화경……?”

         

       그러자 사내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청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아깝다!

       조금만 더 가지, 거기서 멈추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화경이 왜 또 나왔지..? 수정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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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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