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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5

       *

         

         

         “이반. 근위사병이 서서 졸다니. 세상 참 좋아졌군.”

         “흡…!”

         

         

         이반은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흐렸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온다. 화창한 낮, 익숙한 막사 내부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훈련받은 요원이 처음 보는 장소에 떨어졌다면 마땅히 해야 할 자세로.

         

         우선은 지형 확인 부터다.

         

         

         “뭐…?”

         

         

         이반은 막사를 빠르게 훑자마자 순간 할말을 잃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붉은 휘장에 걸린 포효하는 곰의 인장.

         

         넓은 막사, 거대한 원목 테이블과 그 위에 펼쳐진 전술 지도.

         

         사무용 데스크와 그 뒤에 앉은, 거대한 실루엣.

         

         단단한 어깨, 굵은 팔뚝, 형형하게 빛나는 새파란 두 눈까지.

         

         

         “아….”

         “이반? 어디 아픈가?”

         “아아….”

         

         

         달그락 거리는 식기를 내려놓고,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큰 그림자가 막사의 조명을 가리며 늘어진다. 이반은 힘 풀린 다리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을, 봽습니다.”

         “…그래. 뵈었지. 지금 뭘 하는 것이냐?”

         “저는….”

         

         

         이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걱정 가득한 따듯한 시선, 거대한 손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다시 물러선다.

         

         ‘위대한 자’, ‘뇌제’, ‘크라실로프의 곰’, ‘정복자’, ‘대왕’…. 적과 아군 모두에게, 무수한 이름으로 불리던 사내가 지금.

         

         지금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시절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얼굴로.

         

         이건 꿈이구나.

         

         이반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이것이 그 시절의 꿈이라면, 실수해선 안 된다. 꿈과 그의 기억에 괴리가 생기는 순간 깨어날 수도 있으니까.

         

         생각하자. 이 상황은 언젠가 그가 겪었던 과거의 기억일 것이다.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인상 깊은 기억.

         

         깨어날 수 없다. 아직은 아니다.

         

         그때, 이반의 눈에 데스크 위의 식기가 보였다. 아, 그 때구나.

         

         대왕의 근위병으로 근무하고 얼마되지 않았던 시점. 기억이 난다. 그는 그날 처음 왕의 만찬이라는 것을 보았었다.

         

         그때 했던 질문이 분명….

         

         

         “대왕께오서는, 조금 더 나은 식사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음? 하하! 이것 말이냐? 그렇게 엉망이더냐?”

         “징집병이나 먹는 식단이 아닙니까.”

         “그렇지.”

         

         

         대왕은 피식 웃으며 감자를 포크로 눌러 으깼다. 그는 감자를 퍽퍽한 비스킷에 바르고 물에 적셔 한참 우물거린 뒤에 입을 열었다.

         

         

         “이건 짐의 위선이니라.”

         “위선…이라 하옵시면…?”

         “뭇 백성들은 짐이 이런 것을 먹는다 한다면 기꺼이 찬양하겠지. 오, 검소한 왕이시여! 하하, 틀렸다.”

         

         

         대왕은 물을 벌컥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 나라 귀족들과 왕족들, 그 고귀한 이들이 귀한 밥을 먹고 귀한 똥을 싸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인지 아나? 귀족 열 놈이 처먹는 밥이 장병 한 개 사단의 식대와 비슷했던 시절이 있다.”

         “….”

         “그 놈들이 덜 처먹으면 장병들의 생환율이 얼마나 높아지겠나. 갑옷을 조금 더 든든하게 입히고, 탄약을 한 움큼이라도 더 챙겨줄 수 있겠지. 자, 이반. 그럼 귀족 놈들에게 덜 처먹으라고 말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나?”

         

         

         대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텅 빈 그릇을 톡톡 쳤다.

         

         

         “짐이 먼저 덜 처먹는 것이다. 감히 이 나라의 임금보다 귀한 것을 처먹을 간 큰 놈이 있다면, 뭐. 내 친히 그 대담함을 인정해 선봉대에 보내줄 수 있겠군. 자, 어떠냐. 짐의 위선이?”

         “그것이 어째서 위선인지 소신은….”

         “그야 짐 또한 이딴 것을 처먹고 싶지 않으니까.”

         

         

         대왕은 으하하 웃고는 이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 위선이 아니겠나. 짐이 진정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돈 한푼 아껴보려 귀족이란 녀석들을 을러대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인데. 이게 어찌 위선이 아니겠느냐. 음? 자, 이반. 이제 임금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시무시한 탐욕도 보여주마.”

         

         

         대왕은 장난스럽게 웃고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 아래 서랍을 열었다.

         

         반쯤 마른 포도 한 송이와 기름이 굳은 훈제 햄 한 덩이, 그리고 우유 한 병이 나타났다.

         

         

         “참으로 두렵지 않느냐. 이것이 임금의 탐욕과 사치가 만들어낸 끔찍한 결과물이니라.”

         “그… 음.”

         “왜? 감히 짐의 말에 반대라도 하려느냐? 짐은 돈을 아낀답시고 귀족들에게 퍽퍽한 음식을 강요하고는, 뒤에선 이렇게 진수성찬을 먹고 있었느니라!”

         “그렇…군요.”

         “허허, 네가 어려서 모르는 모양이구나. 우유가 상하지 않고 이 전선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행정적 부담을 가져야 하겠느냐. 아, 참. 네 나이가 어떻게 된다 했지?”

         “열여덟입니다. 폐하.”

         

         

         대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반의 어깨와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사내놈이 그리 비실비실해서야.”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왕에게 투덜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미개한 전근대 세상의 평균 신장과 체격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다만 눈 앞의 사내가 너무 거대했을 뿐이다.

         

         왕은 껄껄 웃으며 손짓했다.

         

         

         “와서 들라.”

         “…예?”

         “짐의 위선에 한 줄을 더 추가해야겠으니 와서 들라 했다. 짐의 신변을 호종한다는 시위 무관이 이토록 빈약해서야 짐의 체면이 서겠느냐. 먹고 더 커라. ‘작은’ 이반.”

         

         

         대왕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릇을 밀었다.

         

         이반은 참을성 많은 사람이었지만, 기름진 고기와 신선한 우유의 유혹에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소작농의 아들로 자랄 때 조차도 우유란 감히 입에 가져갈 수도 없는 사치품이었으니까.

         

         신선함을 유지할 방법도 없고, 순식간에 상해버리니. 공납을 올리고 남은 우유는 모조리 치즈나 버터로 가공해야 했다. 이 미개한 세상엔 방부 처리조차도 쉽지 않은 탓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반은 이미 허겁지겁 햄덩이와 우유를 모두 먹어 치우고 있었다.

         

         대왕은 한참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짐의 죄가 깊도다.”

         “예? 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되었다. 송구는 무슨. 짐의 죄가 깊다는 데에 네가 송구할 일이 무엇 있더냐?”

         

         

         대왕은 빈 그릇을 손수 치우며 말했다.

         

         

         “네 나이의 사내가 고작 이런 싸구려 고깃덩이 하나에 눈이 돌아가는 세상은… 바르지 않다. 짐이 대관식에 오를 때만 해도, 이 나라는 그렇지 않았어. 주에 하루는 빵과 고기를 굽는 냄새가 온 프리첸카야 거리에 흘러 넘쳤지.”

         

         

         대왕은 이윽고 고개를 흔들었다.

         

         

         “짐의 나이에 반도 되지 못한 꼬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되었다. 괘념치 말거라. 이반, 오늘부터 너는 짐의 식사에서 말벗을 하라.”

         “예, 폐하.”

         “적어도 꼬맹이 하나 정도는 배불릴 수 있으니 이 임금의 권위가 이토록 드높도다. 짐의 위선에 놀아나는 불쌍한 백성 하나쯤은 더해져도 문제없겠지.”

         

         

         대왕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이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이반은 깊게 절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 막사를 벗어났다.

         

         빙의 16년. 군역 6년차의 어느 날이었다.

         

         막사 밖 군영엔 절망에 빠진 병사들이 패색 완연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모습 뿐이었다.

         

         크라실로프는 몰락하고 있었다.

         

         아니, 인류는 멸망하고 있었다.

         

         용사는 이 시점 이후, 2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따라서, 이반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용사가 조금만 더 빠르게 우리를 찾았다면, 대왕께서도 살아계셨을 텐데.

         

         그 분께서도 살아서, 프리첸카야에 다시 올라오는 고기 굽는 화덕의 연기를 바라보며 웃으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랬다면, 어쩌면. 이반은 이 세상을 조금 더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조금이라도 존경했던, 존중했던, 또는 동경했던 모든 것들은 18년간의 전쟁 속에서 모두 스러졌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이게 전부냐.”

         

         

         이반은 군영 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회나 미련 따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게 전부냐.”

         

         

         꿈 따위에 미혹될 만큼 여렸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이반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드워프의 굴착 유물을 단숨에 소실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고대의 유적지가, 고작해야 이런 환몽 따위로 그를 농락하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 정도의 유혹으로 그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면, 너무 멍청한 생각이 아닌가.

         

         이반은 품을 뒤적였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필수 무장들이 그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생각 즉시 행동에 옮긴다. 단검을 뽑아 팔뚝에 찍고, 그 위에 힐링 포션을 흘렸다.

         

         치익, 하는 고통과 함께.

         

         

        -쩌저적!!

         

         

         꿈이 깨져 나갔다.

         

         

        *

         

         

         이반은 감각을 되살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광경은, 낭떠러지 앞에 너울지는 마력 너머로 뛰어들던 때였으므로.

         

         지금 그는 마침내 고대 유적지에 도착했다고 여겼다.

         

         

         “이건.”

         

         

         흐려졌던 시야가 빠르게 시력을 되찾고, 사라졌던 감각들이 하나 둘 그의 몸에 돌아왔다.

         

         이반은 가볍게 어깨를 풀고 주위를 둘러봤다. 깨끗하게 닦인 복도와 거대한 석주, 대리석을 다듬은 부조, 거대한 천장….

         

         이해하기 어려운 석상들이 늘어선 거대한 홀이다.

         

         

         “신전…?”

         

         

         이반은 조심스럽게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가자, 바닥에 가지런하게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엘피헤라가 보였다.

         

         

         “일어나라.”

         

         

         이반은 엘피헤라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엘피헤라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으븝?!!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쉿.”

         

         

         뭐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조용히.

         

         이반의 손짓에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던 엘피헤라가, 문득 투덜거렸다.

         

         

         “씨이… 진짜 끝내주는 꿈이었는데….”

         “그랬겠지.”

         “하여간 인간들이란. 멍청하고 우둔한데 무례하기까지 해. 자는 사람을 이렇게 깨우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

         “아직 덜 깼나.”

         

         

         이반은 투덜거리는 엘피헤라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꿈에서 덜 깼다면 기꺼이 다시 깨워줄 용의가 있었다.

         

         엘피헤라는 화들짝 놀라며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대 언어 해석을 시작해야겠다.”

         “어디요?”

         “여기 전부.”

         

         

         이반은 천장과 석주를 가득 채운 부조들을 향해 턱짓했다.

         

         엘피헤라는 멍하니 고개를 들다가, 천천히 입을 벌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이거 전부…요?”

         “그러려고 온 것 아닌가.”

         “제가 머리 쓰는 타입이라 노동에 좀 약한데.”

         “읽을 수는 있고?”

         “날 뭘로 보고…! 당연히 할 수 있죠. 어디 봐봐요. 음… 으음… 음?”

         

         

         엘피헤라는 당장 가까운 석주에 다가가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1500년 전 유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이런 해석이라면 마법사가 아니라 사제를 불렀어야 했을 것 같은데.”

         

         

         엘피헤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사제?”

         “네, 이거 고대 델렌어… 그니까, 성경에 쓰이는 그 말이요. 연식이 된 언어긴 해도 사제들이라면 기초과정에서 배우는 말이니까.”

         “너는 불가능하고?”

         “그럴 리가요. 당연히 저도 할 줄 알죠. 진짜 날 뭘로 보는 거지. 인간 주제에.”

         “….”

         

         

         엘피헤라는 부조를 훑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이거… 승전기념비네요…?”

         “승전기념비.”

         “네, 빛의 신에 대한 찬양이 가득한데. 승전기념… 대체 뭐랑 싸웠길래 이런 대단한 유적을 만들어가면서….”

         “음.”

         

         

         아카데미 ‘상식’에 혹시 ‘고대 악마가 봉인된 상고 시대의 유적지’ 같은 게 있던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반은 무장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와 토요일 하루종일 잤더니 잠이 안와서 글을 또 써버렷지머에오

    이제 졸리니까 자러갈거에오

    누구도공장노동자의주말취침을막을순업스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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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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