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5

       

       

       

       

       

       

       따끈한 스프를 바닥까지 싹싹 비워낸 아리엘이 든든해진 배를 슥슥 문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흐아아….”

       

       벌러덩!

       

       늦은 밤이었고, 고된 행군에 지쳐버린 몸뚱이에 잠옷으로 갈아입을 새도 없이 침대에 누워버리는 아리엘.

       《너를 주인공으로 소설책 한번 써보고 싶어!》

       랑그렌 공작령에서 그리 호기롭게 선언한지 벌써 5개월을 넘어서고 있었고, ‘힘들거다’라는 엘든의 우려를 받은지도 벌써 5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우려대로 힘든 나날이었다.

       생전 해보지 않은 행군은 유약했던 영애의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부쳤으니까.

       그럼에도 엘든을 따라 식도락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즐거움.

       

       마음 맞는 친구와 여행을 다니는 즐거움.

       각지의 맛있는 몬스터 요리를 먹는 즐거움.

       책으로만 보고 상상해야 했던 몬스터 사냥을 두 눈으로 감상하는 즐거움.

       그것을 보며 직접 묘사해보는 즐거움.

       

       그리고.

       

       엘든이란 독서벗의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

       

       그러한 즐거움들이 힘든 여정길을 거뜬히 버틸 수 있게 해주고 있었고, 그러한 즐거움들이 좋아 엘든과 함께 북부령을 누비고 있었다.

       특히 엘든이 사냥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모습이 너무도 멋져 동경하는 눈빛으로 우러러보곤 했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써내던 작가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동경과 선망.

       엘든을 바라볼 때면 그러한 감정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멋지게 써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아리엘이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우선 도시에 도착하면 가문에 부칠 안부편지부터 쓴 후,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엘든이 주인공인 소설.

       

       [망나니에서 몬스터 사냥꾼으로]의 시나리오였다.

       사실적인 집필을 위해 그간 엘든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 시나리오로, 망나니 공자란 악명에서 벗어나 멋진 몬스터 사냥꾼이 되어가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악인에서 선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엘든의 성장과 변화를 초점으로 둔 것이다.

       그를 악인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원통했던 마음이 녹아든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도 어느새 종장에 접어들고 있었다.

       

       엘든의 일대기를 그려낸 시나리오지만, 당연하게도 평생을 집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중반부부터는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한, 있을 법한 미래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아리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해피엔딩에는 사심이 수두룩히 들어간 것이었다.

       

       쿡쿡.

       

       종장의 도입부를 읽던 아리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꽂길을 걷고 있는 엘든의 모습 때문이었고 그 꽃길을 함께 걷고 있는 한 등장인물 때문이었다.

       

       ‘흠. 역시 결혼식은 야외가 좋겠지?’

       

       결혼식은 고리타분한 교회보다는 야외가 좋단 말이지.

       

       ‘드레스는 치마 끝자락이 어어어엄청 길면 좋겠어.’

       

       등장인물의 키가 조금 작으니까 긴 게 어울릴 거란 말이지.

       

       ‘아이는… 아무래도 셋 정도가 좋으려나?’

       

       남자 아이 둘에 여자 아이 하나면 딱 좋을 거 같기는 해.

       

       ‘자, 잠깐… 아이를 낳으려면… 그, 그렇고 그런 걸 해야 하잖아아……?’

       

       꺄.

       몰라, 몰라.

       나 그런 거 모르는데.

       

       순식간에 빨개진 양쪽 볼에 손을 댄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아리엘.

       [그렇고 그런 짓]

       그것을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유사경험조차 없는 작가는 야설이라도 읽어봐야 하나…라는 발칙한 고민에 휩싸여야 했고, 작가란 과도한 몰입을 엄금해야 한다는 다짐을 상기시키며 제 뺨을 찰싹 때리는 아리엘이었다.

       

       ‘저, 정신차려. 이건 그저 등장인물의 이야기일 뿐이잖아?’

       

       그래.

       허구의 인물일 뿐이야.

       그리 일갈한 아리엘이 밤이 늦도록 종장의 해피엔딩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산간마을 슬로드에서 하룻밤을 묵은 우린,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산줄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슬로드엔 볼 일이 없었다.

       인근에 초식 몬스터뿐이었고, 주점의 주인장에게 물어본 결과 전부 사냥해 먹어본 적이 있는 몬스터들 뿐이었다.

       몬스터 요리도 판다고는 하지만, 체류까지 해가며 먹을 메뉴는 보이지 않았었다.

       여담으로.

       

       ‘주인장 솜씨가 아리엘보다 못 했어….’

       

       마을에 단 하나뿐이라던데, 슬로드 주민들의 입맛 기대치가 크게 높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궈 여독을 풀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경유지였다.

       슬로드가 없었다면 또 다시 노숙을 해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산줄기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다 점심 때를 맞이했고 이름 모를 분지에 모닥불을 피웠다.

       

       화르륵!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떼우면 되는 법.

       화염 마법을 다루는 이가 없는 빈자리는 나, 전격 마법을 다루는 이로 대체한다.

       마른 나뭇가지에 몇 번 스파크를 튀어주자 금세 근사한 모닥불이 완성됐고, 산을 내려오며 사냥한 토끼 몇마리로 요리를 시작하는 아리엘이었다.

       

       모처럼 바람 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눈구름도 없고, 먼산이 보일 정도로 주변 일대도 맑디 맑은 날씨에 절로 휘파람이 나왔고, 그리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레이첼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제자님?”

       “왜?”

       “궁금해서 그런데, 식도락 여행이 끝나면 무얼하실 겁니까?”

       “끝나면?”

       “예.”

       

       흠.

       그러고 보니 식도락 여행이 끝난 후의 계획에 대해선 일절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엘페리온 왕국이 넓다 한들, 길어도 3년 정도면 전국 순례가 끝날 것이다.

       가장 넓은 땅인 북부령조차 1년이면 종주를 끝낼 듯 했으니까.

       식도락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20대 후반 정도가 되려나.

       엘페리온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트리미아스 대륙 종주를 시작해도 되겠지만, 솔직히 남은 여생 전부를 여행으로 보낼 자신은 없었다.

       

       힘들긴 힘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직 정확한 계획은 없지만, 아마도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을까?”

       “정착? 말씀이십니까?”

       “평생을 이렇게 노숙과 야영을 반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행히 라펠리온 백작가는 영지가 없는 가문이었다.

       트미리온 공작령에 대저택을 둔 백작가로 원작 엘든의 아버지는 트미리온 공작의 직속보좌관이었던 것이다.

       거느릴 백성도 가꿔야 할 영지도 없기에, 저택을 매각한 돈으로 레이첼에게 밀린 봉급을 지급한 후, 어디 목 좋은 곳에 땅을 사 농사나 지으며 몇 년간은 그리 푹 쉬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군요.”

       “그때쯤이면 전속호위기사로써의 계약도 만료되겠군. 그러는 스승님께선 향후 계획이 있으신가? 밀린 봉급을 받으면 꽤 큰 목돈이 될 텐데.”

       

       편히 던진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레이첼이 이내 먼산을 보며 답했다.

       

       “저 역시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외의 계획이로군? 너 정도의 실력자면 다른 귀족가의 전속호위기사로 새 계약을 맺을 수 있을 텐데?”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고, 레이첼이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답해왔다.

       

       “그간 여인으로써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싸웠었습니다. 이젠, 그 여인의 삶을 한번 살아보고자 합니다.”

       “오호. 여인의 삶이라, 정착지가 어딜진 모르겠지만, 옆집 이웃이 될 수 있다면 좋겠군.”

       

       왜인지 모르게 아련히 들려오는 대답에, 무뚝뚝이 스승님이 살아갈 ‘여인으로써의 삶’이 궁금해 그리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레이첼이 말없이 먼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 노릇노릇 구워진 토끼 통구이 대령이요-!”

       

       잠시 후.

       

       아리엘이 만들어준 요리로 한 끼를 떼울 수 있었다.

       

       

       **

       

       

       “저깁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지금은 버려진 땅이지만, 한때는 베드란 남작이 통치했던 영지였지요.”

       

       늦은 저녁까지 쉼없이 걸은 우린, 계획대로 윈터펠 대공령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전(前) 베드란 남작령에 도착했다.

       렌들러 영감의 설명이 없었다면 황폐화된 땅의 이유를 몰랐을 터다.

       우리 짐꾼 영감님.

       비록 길은 몰라도 왕국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여행길에 든든한 정보원이 되어주고 있었다.

       

       저벅저벅.

       

       무너진 성벽의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몬스터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고요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하룻밤을 묵을 만한 거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눈구름이 꽤나 두텁게 몰려들고 있었다.

       튼튼한 지붕이나 처마가 없는 곳에서 잠들었다간 생매장 당하리라.

       

       “흠. 죄다 무너졌군.”

       “근 20년간 방치되어있다 보니 세월을 버티지 못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던 우리의 앞에, 한 저택이 나타났다.

       부서진 창문, 무너진 기둥과 담벼락, 꺾인 깃발, 박살난 외벽 등등.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저택이었지만, 붕괴되며 생긴 공간에서 하룻밤 정도는 묵을 수 있을 듯했다.

       

       “렌들러. 아리엘과 함께 야영 준비를 해줘. 레이첼과 난 저택 내부에 위험요인이 있는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예.”

       

       짐을 바닥에 내린 후, 검을 빼들었다.

       폐허엔 몬스터 뿐 아니라, 약탈을 노리는 도적이나 기타 음험한 자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돌아가며 보초를 서겠지만, 위험요인은 사전에 확인하고 제거하는 것이 야영의 제 1 수칙인 법.

       

       그렇기에.

       

       “난 왼쪽을 맡을 테니, 스승께선 오른쪽을 맡아줘.”

       “네.”

       

       레이첼과 흩어진 난, 왼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저택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고.

       

       무너진 계단을 오르고 올라 기울어진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

       

       ……아녀자가 흐느끼는 소리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털이 곤두서는, 참으로 처연한, 그리고 위태로워 보이는 흐느낌이었다.

       

       ‘마, 망령 같은 건 이 세계관에 없는데…?’

       

       폐허의 저택에서 대체 누가 울고 있는 걸까.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검을 겨눈 채, 조심스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흐느끼는 소리가 왜인지 들어본 적이 있는 듯 한 건.

       

       그 흐느끼는 소리가 왜인지 익숙한 듯 한 것은.

       

       긴장감이 빚어낸 착각이리라 여기며.

       

       

       

       

       

       

       

    다음화 보기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