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5

     

    월광궁의 아침, 아셀라는 평소와 같은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비교적 평탄한 시간이 흘러갔다.

     

    평탄하다 해도 승계권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여전했지만.

     

    게오르크가 추방당한 토진궁이 몰락해서 숨통이 트인 덕이 가장 컸다.

     

    카밀라는 황제에게 사실상 유폐 명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어, 토진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다.

     

    귀족들과 직통 라인을 구축하기 시작한 건도 있고, 목휘궁과 동맹이기도 한 월광궁은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편안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저저저, 저언하아. 혈압 측정하겠슙닛.”

     

    자신을 볼 때마다 벌벌 떠는 클로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너야?”

     

    “네, 네헤엣! 죄송, 죄송합니다! 저따위가 와버려서!”

     

    아침저녁 정기검진을 클로에가 오는 일이 점점 잦아지더니 벌써 일주일째다.

     

    아셀라는 그 사실에 묘하게 짜증이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공자는 요즘 뭐 하는데.”

     

    “어읍, 나, 난민촌에, 자원봉사를.”

     

    “사서 고생이네.”

     

    주치의가 직접 외부 활동을 할 정도면 이슈가 될 터다. 아셀라의 이름과 월광궁의 위상이 높아질 일이니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날 우선해야 하지 않아? 주치의잖아.’

     

    라스와 마지막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눴던 게 언제더라.

     

    …사교 파티였던 것 같은데.

     

    다음 날 그의 방에서 생겼던 해프닝은 무의식에서 지워버리려는 아셀라였다.

     

    그 이후로 어쩐지 대화를 나누기 껄끄럽다고 할까.

     

    라스가 이상한 오해를 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고.

     

    물론 그의 방에 맘대로 들어가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자는 척을 하면 안 됐을까.’

     

    맘대로 사람 얼굴을 여기저기 만져대고 말이야.

     

    이름도 불렀다. 야, 아셀라, 라고.

     

    감히 이름을 불러?

     

    그것도 막 일어나서 목이 다 잠겨가지고는, 평소의 가벼운 말투는 어디로 가고.

     

    …혼약자였지.

     

    라스는 결혼하면 나를 계속 그렇게 부를 생각일까?

     

     

    ‘뭐래, 이런 생각은 일러!’

     

    정치적인 약혼자잖아. 실제로 고트베르크 후작가와 사업을 할 계기가 생겼고. 처음부터 그런 목적이었고.

     

    아셀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더 열 받는 건 라스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혼약자의 자각을 가지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이 남자는 똑바로 말을 안 하면 도무지 맘에 드는 행동을 안 한다.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닫았다.

     

    ‘바보, 멍청이.’

     

    무도회장에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말하더니 며칠째 얼굴도 안 비추는 게 말이나 되는가.

     

    …뭐, 몇 번 바치긴 했지.

     

    클로에가 잡은 손목.

     

    무심코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클로에의 팔을 건드린다.

     

    한때 과로에 절어 퍼석퍼석해진 그녀의 피부를 슬쩍 훑어본다.

     

    “히엑! 화, 황녀님?!”

     

    “…달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셀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날도 조금… 인형으로는 진정이 안 돼서 좀 더 커다란 게 필요했을 뿐이었고.

     

    라스는 진찰하러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해.

     

    “갸아악, 갸아악.”

     

    자기도 모르게 손을 꼬집어서 클로에가 아우성쳤지만 아셀라는 듣지도 못했다.

     

     

     

    오전 문진이 끝나고 클로에가 열심히 표의 숫자와 대조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혈압은 평소보다 높으신데… 선생님의 기준표대로면 활동하셔도 괜찮아요.”

     

    “공자는 오늘 뭐 해?”

     

    “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내의원에서.”

     

    “중요한 일. 물론 그렇겠지.”

     

    “지, 진짜 중요해요. 환자가 한 명 있거든요. 저도 있다가 수술에 참가해야 해요.”

     

    “수술?”

     

    생소한 표현에 아셀라가 관심을 보였다.

     

     

     

    ***

     

     

     

    “사룡 사체의 대금을 받아왔습니다.”

     

    타냐가 테이블에 돈자루를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나는 게 아주 묵직하다.

     

    “며칠 안 걸렸네? 수고했어.”

     

    “귀한 재료라 그런지 인기가 많더군요. 말씀하신 대로 심장석은 따로 보관했습니다.”

     

    사룡의 심장석은 귀중한 아이템이다. 나중에 아셀라를 수술할 때 필요할 수 있으니 팔지 않고 챙기기로 했다.

     

    “오케이. 금화는 비자금으로 쌓아두자.”

     

    “비자금입니까?”

     

    “그래. 설마 아셀라에게 쫄레쫄레 가서 보고할 건 아니지?”

     

    “호위기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군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호위 중에 보고 들은 일은 세상에 없었던 일과 같죠.”

     

    “마음에 들어.”

     

    주군의 사생활을 행여나 밖에서 입에 담는 건 호위기사의 금기 중의 금기다.

    그런 일이 있었다간 즉시 퇴직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귀족들이 기사가 있는 자리에서 편하게 사담을 나눌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벌써부터 비자금이라니,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벌써는 무슨. 항상 필요해 항상.”

     

    아셀라의 눈에 안 띄게 움직여야 할 때도 분명 있을 테니까.

     

    짝, 내가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돈 얘기는 됐고, 수술 준비됐나 체크하자. 얘기한 재료들 다 모였어?”

     

    “리스트에 빠진 건 없습니다.”

     

    타냐가 서류를 들고 사무실의 비품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미스릴로 특수 제작한 단검, 메스라고 하셨죠. 사이즈 별로 열두 개. 수술용으로 제작된 침대. 녹색 가운. 술 다섯 통으로 만드신 소독용 알코올. 그리고…”

     

    체크가 끝날 때 즈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휴고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대충만 들어도 상당한 비용이 든 것 같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십니까?”

     

    “뭘, 덕분에 사룡 사체로 뽕 제대로 뽑았어. 한참 거스름돈 남으니까 걱정 마.”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은 편합니다만.”

     

    휴고가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 다녀왔습니댜하아.”

     

    아셀라의 진찰을 맡긴 클로에도 사무실로 돌아왔다.

     

    클로에도 그간 수술 보조 훈련을 꾸준히 시켰다.

     

    가능한 수준에서 준비는 모두 됐다.

     

    “전원 모였네. 브리핑 들어가자.”

     

    클로에가 사무실에 커튼을 치고 수정구로 엑스레이 사진을 띄웠다.

     

    “환자는 4세 여아. 편도 주위 농양이야. 페니실린 제제를 일주일 행했고 절개 배농이 필요하다고 판단. 농양을 제거함과 동시에 내부의 이물질 제거를 위한 국소 절개를 실시하겠어.”

     

    클로에는 내 설명을 들으며 몇 번이나 확인했던 차트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체크했다.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야. 자신 있으니 걱정 말고. 수술은 내가 단독으로 진행, 클로에가 보조해.”

     

    “네엣.”

     

    “안쪽의 수술실은 며칠이나 작업해서 멸균 상태로 만들었어.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수술 중에는 절대 외부에서 출입해선 안 돼. 타냐, 불의의 사태를 대비해.”

     

    “맡겨주시죠.”

     

    “그럼 저는 뭘 하면 됩니까?”

     

    휴고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수술에 해주할 건 없으니 에리를 위해 기도라도 해줘. 혹시 위에서 누가 들을지도 모르잖아.”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충 얘기해줬는데, 휴고는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맡겨둬.”

     

     

    수술 준비는 금방 끝났다.

     

    나와 클로에가 먼저 수술실과 사무실 사이의 멸균실로 들어가 가운을 입고 대기한다.

     

    옆 방에서 기다리던 에리를 휴고가 데려왔다. 휴고는 에리가 겁먹지 않게 잘 달래주었다.

     

    클로에가 옷을 갈아 입혀주고 수술실로.

     

    본래는 국소마취면 충분한 작은 수술이지만 유아는 중간에 날뛰면 큰일이 나기에 보통 전신마취를 한다.

     

    무통약보다 상위 효능을 가진 마취제를 준비한다.

     

    ‘투입량이 정확해야 해.’

     

    전신마취는 나도 처음이기에 살짝 긴장된다. 약제와 연결된 호흡기를 에리의 입에 대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에리, 지금부터 자고 일어나면 아픈 게 다 나아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의사 선생님만 믿어.”

     

    “네에.”

     

    마스크를 쓰고 전신을 녹색으로 두른 내 모습이 무섭겠지만 착하게도 얌전히 말을 듣는 아이였다.

     

    “선생님이랑 같이 숫자를 세 보자.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셔어….”

     

    에리가 잠들 듯 마취 상태에 빠져들었다.

     

    상태를 확인한다.

     

     

    [상태 : 마취됨 (92%)]

    [부상 : 만성편도염]

    [부상 : 편도 주위 농양]

    [부상 : 이물질 염증]

    [위치 : 목]

     

     

    마취는 잘 됐다. 숫자가 100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

     

    클로에가 세팅을 시작한다. 에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머리를 수술대에 고정한다. 입을 다물지 않고 기도로 이물질이 넘어가는 사고가 없도록 장치한다.

     

    나는 머리에 썼던 안경을 아래로 내렸다. 렌즈를 두 개 끼워 배율을 올린다.

     

    달칵, 클로에가 빛을 비춘다.

     

    “후우.”

     

    심호흡한다.

     

    어렵지 않은 수술이다.

     

    내 전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클로에가 내 손에 주사기를 쥐어줬다.

     

    …떨림은 전혀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절로 침착해진다.

     

    우선은 사전 작업.

     

    주사기로 환부를 세심하게 찌른다.

     

    농양의 크기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주사기를 따라 고름이 뽑혀 나오고 농양이 점점 쪼그라든다.

     

    몇 번 반복해 양이 충분하다 판단하고 주사기를 클로에에게 넘긴다.

     

    그녀는 정확하게 순서를 이해하고 메스를 내게 넘겨주었다.

     

    미스릴로 만든 특제 메스다.

     

    가볍고, 날카로우며, 절대 녹슬지 않는다.

     

    왼손에는 핀셋을 잡는다.

     

    신기하게도 손끝의 감각이 기구와 일체화한 느낌이다.

     

    손가락이 메스가 된 기분이랄까.

     

    절단해야 할 부위에 시선을 집중한다. 신중하게 날 끝을 가져간다.

     

     

    [수술(기본) C가 발동합니다]

     

     

    “수술을 시작한다.”

     

     

    ―스윽

     

    차가운 날 끝이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었다.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