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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5

       “별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프란체를 노려?”

         

       휙. 나는 검을 휘둘러 끈적한 피를 쳐냈다.

         

       확실히 방금 얘들은 마스터와 대장급 위치답게 부대장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했다.

       

       마스터와 제1 대장은 게임에서 봤던 것처럼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진 바렌베르크는 비교가 불가능한 괴물이었으니까.

         

       “후우.”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말단 대장의 허리 위에 앉았다. 소문을 퍼트리기 위해 살려둔 놈이다.

         

       “이봐.”

       “예, 예?”

       “내가 왜 널 살려준 거 같나?”

       “그,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쯧쯧,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오늘 일, 암흑가에 소문을 쫙 퍼트려. 데카르트 공녀와 관계된 모든 것을 건드리면 너네들처럼 괴멸을 맞이할 거라고.”

         

       이것으로 다시는 우릴 건들지 못할 거다. 제국의 두 번째로 잘 나가는 암흑 길드를 쓸어버렸는데 누가 겁도 없이 덤벼들까.

         

       “예, 예! 꼭 그리 하겠습니다!”

         

       미세한 떨림. 의자로 삼은 말단 대장의 등줄기에 두려움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럼 잘 부탁하고. 나는 이만 가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그때. 나는 뒤돌아 물었다.

         

       “야, 입을 옷이랑 수건 같은 거 있냐?”

         

         

       * * *

         

         

       예정대로 젠부코로스를 괴멸시키고, 나는 곧장 데카르트 공작령으로 복귀했다. 공작저의 대문 앞으로 도착하자 기사들이 힐끔 쳐다본다. 이 거적때기 같은 옷 때문인가.

         

       “문을 열어주시죠. 공녀님의 명을 수행하고 오는 길입니다.”

         

       기사들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철컥! 공작저의 아치형 대문이 열렸다.

         

       “흠. 이거 무슨 걸레짝을 걸쳐둔 거 같네.”

         

       이런 옷으로 갈 순 없기에 숙소로 들려 옷을 갈아입고, 프란체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방 앞으로 도착하니 헬레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공녀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뭐? 주무시고 계신다고?”

       “네. 요즘 일이 너무 많아 피곤하시다고…….”

         

       하긴, 요즘 일이 많긴 했다. 틈틈이 마법을 배우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을 진행하고, 황실 파티에 참여하고, 매장 운영까지.

         

       거기에 내 건강에 대한 걱정까지 있으니 스트레스가 치솟았을 거다.

         

       ‘여기선 좀 자게 둘까.’

         

       가끔 프란체도 쉬는 시간은 있어야지. 나는 방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저기,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세요.”

         

       헬레나가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똘망한 눈빛. 그러고 보니 얘랑도 좀 친해졌지.

         

       “그냥. 별일은 아니고.”

         

       하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부코로스의 길드원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하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나를 보고 겁에 질리면서까지 걱정한다. 얘도 참 순진하단 말이지.

         

       “있잖아. 너는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성격이 바뀐다는 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단순한 게 아니야. 무언가가 나를 침식하고, 좀먹는 느낌이지. 나 자신이 내가 아니게 된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점점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고방식은 그대로지만, 느끼는 점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걸 이번에 확실하게 느꼈다. 이전에도 사람을 죽여본 경험은 많았지만, 솔직히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진과 동기화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

         

       하지만 내가 진에게 점점 먹히고 있다는 진실을 알고 난 뒤로는 내가 어색해졌다. 두려웠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손이 떨리고 계세요.”

         

       헬레나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한 온기. 고개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위로해주는 거냐?”

       “어, 그런 거 같네요?”

         

       왜 의문형이야? 얘는 조금 엉뚱할 뿐이지, 심성이 순수하고 착하다.

         

       “아무튼. 너는 어떨 거 같아?”

         

       헬레나가 고개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음.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말을 잘 모르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변화하는 거니까요. 사실 적응의 단계가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이게 적응하고 있는 거라면 좋았을 텐데.

         

       항상 걱정했다. 동기화가 심해질수록, 인격을 물려받을수록, 기억이 계승될수록 김공략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면 되죠?”

       “뭐?”

         

       헬레나가 웃었다. 순수한 미소.

         

       “제가 부모님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와닿았던 게 있어요. 걱정이 클수록 별거 아니라고.”

         

       나는 눈을 끔뻑이며 헬레나의 말을 경청했다.

         

       “누구나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해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이건 달라지지 않죠.”

         

       부드러운 목소리. 헬레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두려움과 걱정을 털어내고 다른 걸 보는 건 어떨까요? 사람은 절박하고 조급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자 꽁꽁 뭉쳐있던 실뭉치가 조금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진의 기억이 들어오고, 인격이 점점 잡아먹혀 진이 되어가고 있다곤 하지만, 김공략인 나의 사고방식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주먹이 꽉 쥐여졌다. 잘못하면 손톱이 파고 들어 피가 흘러나올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헬레나의 말을 듣고,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억울함으로 인해 투지가 생겼다. 나를 불러들인 건 이 세계인데, 왜 내가 사라져야 하나? 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의 존재를 지켜낼 것이다.

       

       동시에, 프란체와의 약속도 지켜낼 것이다.

         

       “고마워.”

         

       기운이 생겨 옅은 웃음이 나왔다. 내 기분을 알아차린 헬레나가 기특하기도 했고.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에요.”

         

       헬레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냐?”

       “아, 죄송해요. 제가 남동생이 있어서.”

         

       남동생이랑 이거랑 무슨 관계인데? 이런 내 심정이 눈빛으로 나타났는지, 헬레나는 말을 이었다.

         

       “제 남동생이 쓸데없는 걱정이 많고 겁을 많이 먹거든요. 그래서 항상 머리를 쓰다듬어줘요. 그럼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랬던 건가. 확실히 위로받는 기분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앞으로도 종종 부탁해야겠어.”

         

       농담 섞인 내 말에 헬레나는 싱긋 웃으며 내 머리를 더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덜컥!

         

       별안간 프란체의 방문이 세게 열렸다.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니?”

         

       싸늘한 눈빛. 이런 프란체는 처음 보기에 나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죠.”

       “정말?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대화만 좀 나눈 것뿐이에요.”

         

       나의 변명에도 프란체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내장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일단 들어오렴.”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란체를 따라 들어갔다. 우리는 자연스레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니?”

       “문제없이 처리했어요.”

       “그래? 다행이네.”

       “매장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프란체는 피식 웃었다. 미소를 보니 아까는 잠에서 깬지 얼마 안돼서 그런 듯하다. 자고 일어나면 좀 예민하긴 하지.

         

       “이쪽도 문제없이 끝났어. 자기들은 정찰병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쓸어 버렸던 걔들이 본 부대였던 건가. 그 숫자로 공작령에 들어오려 하다니, 이건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닐 텐데.

         

       ‘돈을 그렇게 많이 줬나?’

         

       프리다의 마담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사업의 핵심을 되돌려 받기 위한 건데 전 재산을 걸었을지도 모르지. 받은 돈의 일부분을 떼어내서 귀족에게 바치면 일도 잠잠해질 거다.

         

       “아무튼. 오늘은 쉬도록 해. 시간이 좀 늦었잖니?”

         

       프란체는 내 손을 잡더니 금화 몇 개를 쥐여주었다.

         

       “용돈이야. 오늘은 힘들었을 테니 나가서 좀 맛있는 것도 먹고,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오렴.”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나를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헬레나도 포함해서.’

         

       나는 칼 같은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놀다 올게요!”

       “그래. 아, 그리고 헬레나를 불러주렴.”

       “예.”

         

       즐거운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헬레나에게 말했다.

         

       “공녀님이 부르시는데?”

       “공녀님이요? 바로 들어가 볼게요.”

         

       헬레나는 허둥지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문이 닫히고, 나는 저택을 나섰다.

         

       ‘우울할 때는 맛있는 거 먹고 바깥바람 쐬는 게 최고지.’

         

       헬레나에게 뜻밖의 위로도 받고, 프란체가 보상으로 용돈도 줬다. 실컷 놀다가 오자. 오랜만에 술도 마셔보고, 고기도 실컷 먹고.

         

       나는 웃으며 공작저를 나왔다.

         

         

       * * *

         

         

       톡. 톡. 프란체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유지한 채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모습을 본 헬레나는 왠지 모르게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프란체의 표정이 싸늘했던 것도 있지만, 묘하게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 공녀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헬레나는 애써 침착하며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녀의 두려움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헬레나.”

       “네, 넷!”

         

       드르륵. 의자가 뒤로 물러나며 프란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과 사이가 좋아 보여?”

       “진 님이요?”

       “그래.”

       “아, 그거는……”

         

       쾅! 프란체가 갑자기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헬레나는 화들짝 놀라 전신이 움찔거렸다.

         

       “후. 분명 진에게도 말해뒀는데. 친해지지 말라고.”

         

       헬레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마치 토끼가 맹수 앞에 묶여있는 것처럼, 공포가 온몸을 사로잡았다.

         

       “헬레나.”

       “네, 네!”

         

       프란체가 허리를 숙여 고개 숙인 헬레나를 올려다봤다. 차가운 눈빛. 헬레나는 목덜미가 서려왔다.

         

       눈에 초점이 없다. 표정에는 미동이 없다. 프란체에게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서늘함뿐이었다.

         

       “진에게 더이상 접근하지 말렴.”

       “네, 네? 하지만…….”

         

       쾅! 프란체는 이번에도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그녀의 뒤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지금 말대꾸하는 거니?”

       “아, 아니요…….”

         

       헬레나는 이런 프란체가 낯설었다.

         

       처음 프란체의 전속 시종으로 배정받았을 때, 그녀는 항상 권태로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밝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헬레나에게도 잘해줬고, 유해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변하다니. 헬레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헬레나.”

       “네, 넷?!”

       “내가 하는 말 명심하렴.”

         

       고개를 들이미는 프란체. 조금만 더 다가오면 이마가 맞닿을만한 거리.

         

       “주제넘게 굴지 말고.”

         

       대체 뭐가 주제넘게 군다는 것인가? 헬레나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진과 이야기한 거 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둘의 관계는 단순히 주인과 노예 아닌가…?’

         

       온갖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네, 네! 그럼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진과 대화는 일절 금지야. 신경도 쓰지 마. 접근도 하지 마.”

         

       헬레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제야 프란체는 미소를 되찾았다.

         

       “내 말 알아 들었지?”

       “다, 당연하죠! 공녀님의 명령인데요!”

       “그래, 그럼 됐단다. 이만 나가보렴.”

         

       헬레나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그리고 쿵쾅거리던 가슴을 부여잡고 벽에 등을 기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허억, 허억…….”

         

       최근 공녀님께서 마법을 배우셨다고 들었다. 마력에 의한 효과인가? 감각이 남들보다 비교적 둔한 헬레나도 살기를 느꼈다.

         

       여전히 덜덜 떨려오는 손을 부여잡으며, 헬레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공녀님이 이상해지셨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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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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