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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6

       *

         

         한동안 부조와 석주들을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무언가를 메모하던 엘피헤라는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읽을 수 있는 건 다 확인했어요! 이거 승전기념비가 맞네요!”

         “누가, 그리고 무엇과의 전쟁을 기념했다는 거지?”

         “그게… 음. 그 부분은 좀 애매하게 적혀있긴 해요.”

         

         

         이반의 눈초리에 엘피헤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애초에 교회 사람들은 옛날이건 요즘이건 시종일관 무슨 선문답 하듯이 은유로 덕지덕지 발라놔서 원래 성경강독을 전공하지 않고선 의미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애초에 사제를 데려왔으면 좋았잖아.

         

         엘피헤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해석한 부분만이라도 설명해봐라.”

         “언어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건 옛 교회의 흔적이에요. 신화 시대까지는 아니고 고대… 그러니까 동 델렌 제국이 있던 시절의 유적이긴 한데. 한 2천년 정도는 된 것 같아요.”

         “그 시절이야 전쟁이 흔했다 쳐도, 교회에서 승전기념비를 세울 이유가 뭐가 있지?”

         “그땐 오히려 많죠. 교회에서 기록말살형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던 시대인걸요. 아마도 이 유적지도 그 흔적인 것 같은데, 대충 보자면. 그 시절 성전군은 ‘행복’과 싸웠다고 적혀 있어요.”

         “…행복?”

         

         

         그건 사제들이 전쟁 대상으로 삼기엔 다소 이상한 개념이 아닌가.

         

         이반이 눈살을 찌푸리자 엘피헤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5번 석주에서 말하길, ‘가로되 가장 어두운 악은 믿는 자의 귓가에 복되다 속삭이는 자라. 세상의 지복은 오직 주의 품에 비롯되며, 천주의 평강 밖엔 복음이 없도다.’ 으음… 그리고 뭐 뻔한 성경 구절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긴 한데.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그래요. 여긴, 사이비종교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이비.”

         “이단. 네, 그런 거요. 교세가 제법 컸나봐요? 이 석주 양식 자체는 교회의 것이 아니거든요.”

         

         

         이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니까, 이곳은 어떤 사이비 종교의 교단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교단을 상대로 승전한 이후, 교회에서 직접 이 유적지를 승전기념비 삼아 부조를 새로 깎아 넣고, 그대로 토사 밑에 매장했다는 의미인데….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왜 굳이?”

         “네?”

         

         “승전을 한 뒤에 이단 분파를 섬멸했다면 굳이 토사 밑에 매몰시킬 이유가 있나? 건물 전체를 매장하는 것보다는 파괴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쉽고, 굳이 매몰시키는 것에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 한들, 이런 복잡한 주문과 부조를 만들어낼 이유가 없잖나.”

         

         “으음… 그 시절 교회 의례는 진짜 마법사의 영역이 아니거든요. 그건 고문헌 해독이나 성경사기록 쪽에 관련된 사제를 찾아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어쨌건 그게 전부에요. 그리고 꼭 직접 매립했다는 확신은 없잖아요?”

         

         “음?”

         “아뇨, 뭐. 건물이란 게 2천년이나 지나면 세월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지반 밑으로 쓸려 내려갔거나. 그랬을 수도 있죠.”

         “그럴 리가.”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을 들어 석주가 지지하고 있는 거대한 천장을 가리켰다.

         

         

         “세월에 따라 매몰된 사례라면 이 유적지는 사토 속에서 폐허로 발굴되어야 정상이다. 여긴 너무 멀쩡해. 그리고 그런 경우, 이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주문 자체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의 굴착 유물이 우연히 이 근방을 파괴하자, 곧장 유적지에 설치된 보호 주문이 발동했었던 것을 보자면 명확하다.

         

         이 유적지는 명백히 의도를 갖고 봉인된 것이다.

         

         봉인. 봉인이라.

         

         이반은 이 껄끄러운 단어를 곱씹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보호 주문을 다시 사용할 수 있나.”

         “아, 아니 또 왜요?! 뭘 또 부수시려고!”

         “그런 게 아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야. 어렵다면 뒤에서 기다려라.”

         “네? 위험이요? 여긴 그냥 옛날 유적지에 불과….”

         “할 리가.”

         

         

         이반은 도끼와 권총을 꺼내 무장하며 말했다.

         

         

         “그 시절 교회가 감히 파괴하지 못하고, 지반 속에 봉인해야만 했던 무언가가 이 안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다대하다.”

         

         

         그건 아카데미의 상식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렵다.

         

         하지만 정황상 유추해 볼 때, 이건 ‘판타지’의 상식이나 다름없다. 주로 다크판타지 계열의.

         

         이 앞으로, 마법 해석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야 하다만. 적어도 그것이 용사 파티의 자제를 미증유의 위험에 노출시키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이 유적지에 도달할 때 까지야 예상의 범주 내에 있었고, 그의 ‘상식’이 맞았다면. 여긴 평범한 보물 창고 정도에 불과했어야 했다. 당연히 한 사람 정도 지키는 것은 일도 아니란 말이다.

         

         이젠 상황이 다르다. 고대의 교회가 성전군을 조직하면서까지 봉인한 고대의 악마 같은 것이 잠들어 있다면, 이 꼬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혹시 부유 주문을 사용할 수 있나?”

         “이 인간이 날 진짜 뭘로 보고! 그건 기본 마법이잖아요.”

         “그럼 잘 됐군. 위험하다 싶으면 이 유적지 밖으로 빠져나가서 부유 주문으로 수로까지 날아가. 중간에 길을 잃거든 그 자리에 가만히 기다리고.”

         

         

         프리첸카야 지하수로엔 지금 엘리자베타의 요원들이 깔려 있을 테니. 그가 임무를 받고 떠나고 시일이 경과하면 반드시 구조대가 파견될 것이다.

         

         그 편에 보내는 것이 낫다. 이반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잠깐, 그쪽은요?”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네? 아, 아니.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빠졌다가 지원을 기다리는 편이…!”

         “여긴 성 얀스크 대학 바로 밑이다.”

         

         

         이반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드워프의 유물로 균열이 일어난 상태에서, 지난 세월 동안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고대의 유적이 갑작스레 나타난 상황이지. 시일이 흘렀을 때에도 안전하리란 보장이 있나?”

         

         

         더 이상 설명을 늘어놓을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건 이반의 ‘상식’이다. 한번 발견된 봉인은 반드시 근시일 내에 해제된다.

         

         이건 판타지-양자역학이나 다름없다. 관측 순간 상태가 정해진다고 봐도 좋으니. 인카운터가 걸린 상황인 셈이다.

         

         그걸 하나하나 설명해줄 방법이 없으므로, 이반은 유적지의 깊은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겻다.

         

         

         “하지만, 하지만 그쪽 혼자서요?”

         “익숙해.”

         

         

         주로 소규모 타격대로 행동했지만, 기본적으로 절멸부대는 잠입과 척후에 특화된 특작부대다. 당연히 일정 권역 내에 단독 임무를 수행한 적도 충분히 많았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도 ‘익숙’하다.

         

         척후란 무엇인가.

         

         척후란, 아군이 미답지(未踏地)를 향할 때 해당 경로의 위협 요인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는 요원들을 의미한다.

         

         그러니 척후부대를, 그것도 용사 파티의 척후부대를 역임했다는 의미는 단 하나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환할 수 있을 것.

         

         어떤 상황을 마주할 때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

         

         기본적으로 이반은 미지의 적을 상대하는 것을 가정한 임무만을 맡아왔다. 마왕성의 코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러니, 모든 의미에서 익숙한 상황이다. 달갑진 않지만, 해야 한다면 해야 할 뿐이다.

         

         

         “이익!!”

         

         

         도도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엘피헤라는 이반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하등 종족을 보살피는 것은 엘프의 의무고, 평민을 보호하는 건 귀족의 의무거든요!”

         “내가 아는 엘프의 의무와는 조금 다른데.”

         “그쪽이 엘프를 나보다 잘 알아요?!”

         “그렇진 않지.”

         “그럼 오늘부턴 이렇게 알아두고 있어요. 진짜 인간들 중엔 종족차별주의자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 미개한 사회 문화 때문인가?”

         

         

         그 말이 종족차별주의 아닌가?

         

         이반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겁에 질린 채로 또각또각 따라오는 엘피헤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베올그린의 절반만 닮아도 충분하다고 여겼건만.

         

         성격은 베올그린보다 소폭 낫군.

         

         

         “세월이 실감 되는군. 잘 자랐어.”

         “네…? 저 알아요?”

         “아무렴. 그걸 잊을까.”

         

         

         이반은 그 시절 엘피헤라를 떠올리며 큭큭 웃었다.

         

         엘피헤라의 얼굴에 불안감이 켜켜이 쌓였다.

         

         

         “언제…? 언제 봤어요 우리?”

         “12년 전. 베올그린이 우리 군영에 왔을 때 처음 봤지. 내게 ‘엘프 주인’을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나. 여물 말고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면서.”

         “어… 어어…!!”

         “기억하나?”

         “인간!! 과 달리 우리는 기억력이… 좋거든요.”

         

         

         엘피헤라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그쪽은… 어. 기억이랑 좀 많이 다르게… 다르게… 엄청 다르게 변했…네요?”

         “세월이 세월이니.”

         “…그렇죠. 인간은 빠르게 늙죠. 그랬죠….”

         

         

         그녀는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 우물거리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

         

         

         석주들을 지나, 유적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엘피헤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씩 이반의 얼굴을 힐끔거릴 뿐, 그녀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올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마침내 이 거대한 신전의 끝까지 도달했을 때. 이반은 발걸음을 멈췄다.

         

         누가 봐도 수상한, 거대한 문이 그들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느껴지는 것이 있나?”

         “아뇨. 마력은 오히려… 입구보다 더 희미해요.”

         “음.”

         

         

         이반은 조심스럽게 도끼를 들어 문을 툭, 밀었다.

         

         어떤 봉인이나, 어떤 종류의 저항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문은 예상과 달리 경첩에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미끄럽게 열렸다.

         

         

        -후욱.

         

         

         뜨듯한 바람이 얼굴에 쏟아졌다.

         

         이반은 한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숨을 멈췄다. 공기 중에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독인가?

         

         황급히 엘피헤라에게 경고하려던 이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무슨.”

         

         

         문 너머엔 조그마한, 손바닥보다 작은 무언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 어디선가에서 내리쬐는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 속 보물처럼 가득 쌓여 있는….

         

         

         “빗…?’

         

         

         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살폈다.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개, 황금, 진은, 각종 귀금속과 보석으로 꾸며진 각기 다른 종류의 빗들이… 대중 없이 쌓여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니, 주의 깊게 관찰하니 평범한 빗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일반적인 빗들보다 한뼘은 더 작은. 아주 한정적인 용도로만 쓰일 법한 종류의….

         

         

         ‘수염… 빗…?’

         

         

         이반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이런 곳에 수염빗이 왜 나타난단 말인가. 명백히 수상한 상황에, 이반은 도끼를 들어 올리며 엘피헤라를 찾았다.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엘피헤라는, 넋을 놓은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금에… 주문서에… 세상에, 저건 로레인…?! 저 귀한 게 대체 왜 여기…? 저거… 저거면 수명을 10년은 늘릴 수….”

         

         

         그 외에도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엘프어를 섞어가며 떠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 시점에서,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이란 게 이런 뜻이었군.’

         

         

         부조에 남아 있던 승전기념비에서 말하기를, ‘가장 어두운 악은 믿는 자의 귀에 복되다 속삭이는 자라.’

         

         그리고, 이반이 이 공간에 들어설 때 잠시 보았던 과거의 편린. 선왕과의 추억.

         

         실신한 엘피헤라를 깨울 때 했던 말. ‘진짜 좋은 꿈이었는데.’

         

         그건 후회나 미련을 보여주기 위한 미혹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가장 바라던 순간을 재현시켜주는 환상에 불과했다.

         

         북풍과 태양이라.

         

         대저 가장 저항하기 어려운 적수는 스스로의 행복이라.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는 다행이라 할 만했다.

         

         그는 이 미개한 전근대 세상에서 수염빗을 제외하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지구에만 존재했다.

         

         얼굴조차 희미한 가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 언제든 원할 때 먹을 수 있는 고향의 음식, TV와 스마트폰. 그 무엇이 되었든.

         

         그래서 저런 꼴이군.

         

         이반은 눈앞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오색 찬란한 수염빗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장, 엘피헤라의 뺨을 때렸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퇴근하고 한편 더 써서 올려볼게요!

    사유) 월요일은 힘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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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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