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6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특히 턴제 RPG는 아예 현실과 비슷한 부분이 없는 수준으로 다르다.

        

       현실에서는 목숨 걸고 싸울 때 번갈아 가며 상대를 때리지 않는다. 강력한 공격을 하겠답시고 준비하는 시간을 수십 초씩 낭비하지도 않고, 눈앞의 적에게 공격하면서 ‘미스’를 띄우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바꿔말하자면…….

        

       마법을 쓸 때 굳이 멍하니 서서 적의 공격을 죄다 맞아주지 않는다, 는 말이다.

        

       아제르나 전기에서는 적이 큰 공격을 하기 전에 그 공격을 캔슬시켜서 턴을 낭비하게 만드는 종류의 공격들이 있다. 스킬 능력에 ‘행동 취소’라는 단어가 있다면 일정 확률로 적에게 예정된 큰 공격을 취소시킨다.

        

       예고 없이 즉발로 날아오는 궁극 스킬이 아닌 이상 모든 마법은 실행과 동시에 마법의 이름이 뜨고, 해당 몬스터나 캐릭터의 민첩성에 의해 그 마법이 사용되는 턴수가 결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행동 취소 스킬을 맞으면 마법이 취소되고, 마법이 실행되어야 할 턴에 그 캐릭터는 마법을 실행하는 대신에 다시 초기화된 행동력으로 새로운 커맨드를 기다리게 된다.

        

       행동 취소 확률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빠른 마법이나 즉발 스킬 중 그 실행 예정인 마법의 반대속성인 공격수단을 고르는 것이다. 물론 ‘행동 취소’가 달린 마법이나 스킬이어야 한다.

        

       일견 논리적인 내용이긴 했다.

        

       화속성 마법을 물을 끼얹어 막아낸다고 하면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머리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대량의 물을 맞고도 하던 행동을 속행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거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이론 속에서나 그렇다는 거다.

        

       ……머리 위에서 대량의 물이 떨어지는 것이 자기한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아는데, 어떤 적이 피하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엘리멘탈 베어는 ‘곰’이다. 그리고 곰은 얼핏 보면 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몸의 대부분이 근육질로 이루어진 무시무시한 야수였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엘리멘탈 베어는 내가 알고 있는 어느 곰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당연히 몸의 근육량도 훨씬 많을 거고.

        

       “아……!”

        

       엘리멘탈 베어에게 총알 치명상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미아 크로우필드의 마법이 발동되고, 머리 위에서 물이 쏟아졌으니까.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곰의 볼 부분에 총알이 스쳤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실 미아 크로우필드에게 그 마법을 부탁한 이유는 불 속성의 엘리멘탈 베어의 공격이 숲에 불을 내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발톱이 닿는 곳에 불꽃이 일고, 작게 불이 붙은 곳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은 공격이 끝나고 나서 해도 되는 것이었다.

        

       엘리멘탈 베어의 위치는 내가 마지막에 봤던 곳과 다른 곳에 있었다.

        

       반동에 올라갔던 총을 내리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곰이 자리를 움직여 자세를 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총을 내렸을 때는 이미 축축하게 젖은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채, 양 앞발을 땅에 박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었다.

        

       ……여전히 입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마법은 취소되지 않았다.

        

       곰은 미아 크로우필드를 보고 있었다.

        

       “다시!”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

        

       “헉!”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방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던 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클레어가 나를 찾아와 깨우기 전, 먼저 일어나 총기 손질을 하기 직전.

        

       “…….”

        

       아.

        

       너무 급하게 돌려서, 지나치게 뒤로 와버린 모양이다.

        

       ……사실 제대로 생각해보면 훈련할 때나 대련했을 때처럼 짧게 돌려서 확실하게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 곰이 마법을 실행하기 직전이었지만, 나도 그 곰을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던 것도 컸다.

        

       ‘아제르나 제국’이라는 이름.

        

       그리고 내가 게임 안에서 보았던 수많은 캐릭터의 이름.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안을 나도 모르게 게임 속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다르다. 명백하게 다르다.

        

       게임 안에서는 곰이 휘두르는 팔 따위 맞아도 HP가 조금 떨어지고 말 뿐이다. 마법을 쓰거나 포션을 마시는 것으로 HP는 다시 차오른다.

        

       사실 HP가 떨어져도 크게 상관없다.

        

       어째서인지 컷신에서는 총을 맞고 암살당한다거나, 폭탄에 죽는다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전투 안에서는 아무리 총을 맞고 폭탄을 맞아 HP가 바닥이 되더라도 파티 전멸로 인해 게임오버가 되지 않는 이상 ‘쓰러졌다’라고만 표현되니까.

        

       전투 끝나고 다시 마법이나 포션, 혹은 체크포인트마다 있는 회복 장치로 체력을 회복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숲에는 체력 회복 장치 같은 속 편한 장치가 없다. 자동 저장 포인트도 없다.

        

       아마 곰의 앞발에 맞으면 HP 회복 따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뼈와 살이 분리되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있을 거다.

        

       ……입에서 나가는 일직선의 화속성 레이저를 맞으면, 아무리 회복마법을 써서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손의 손가락이 눌어붙던지, 얼굴이 녹아내린다든지…… 아무튼 끔찍한 상처를 평생 가지고 가게 될지도 모른다.

        

       “원작에서는…….”

        

       원작에서는, 이라는 말은, 오로지 스토리와 마을의 모양에서만 먹히는 이야기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가정하에 레오와 그 일행이 가짜 참호를 돌파했을 것 같지도 않다. 미아 크로우필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미리 장전된 엽총을 들지 않고 참호로 뛰어들어 적보다 먼저 상대를 탈락시킬 수 있었을까?

        

       “나 때문인가?”

        

       원작에는 없던 내가 갑자기 일행에 끼어들었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건가?

        

       미간을 모으고 고민에 잠겨봤지만, 제대로 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런 전투에서 내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큰 차이가 날까? 총을 든 적과 칼을 든 적과 싸울 때는 한 번 공격 당하는 것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니 스토리대로 가려면…… 긁히는 것 이상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으며 꾸준히 싸워나가야 했다.

        

       스토리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주인공 일행이 정말로 ‘단 한 번도’ 다치지 않고 결말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애초에,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여신이나, 아니면 다른 종교의 신이나, 하다못해 시스템 같은 것이 있어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

        

       모르겠다. 아직 누구도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런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 자기 생각 밖에는 없었다.

        

       게임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되어서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선택한 거니까.

        

       “후…….”

        

       그래도, 뭐. 적어도 정신이 번쩍 들만한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잠은 확 달아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클레어가 문을 벌컥 열 시간이었으니까.

        

       *

        

       “근처에 대장간이 있습니까?”

        

       설명을 대충 마치고 좀 쉬려는 안내원한테 불쑥 그렇게 물어보자, 안내원은 나를 곧장 노려보았다.

        

       “이 시간에? 자는 사람 깨워서 무기라도 만들어달라고 하려고?”

        

       “그렇습니다.”

        

       “아앙?”

        

       다시 한번 대놓고 양아치 같은 소리를 낸 안내원이었지만, 내가 눈을 피하지 않고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자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실비아?”

        

       그런 나의 태도에 근처에 서 있던 클레어도 조금 놀란 듯 나를 불렀다.

        

       “돈이라면 있습니다. 이 시간에 무기를 급조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겠죠. 장인을 깨워주신다면 팁도 드리겠습니다.”

        

       “…….”

        

       내가 어딘가 확신에 찬 것 같은 태도로 그렇게 말하자, 안내원은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제니퍼한테 들었을 테니까.

        

       어제 우리가 여기를 소개받을 때의 안내원은 다른 사람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 사람이 계속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교대되었다고 해도 인수인계는 받았겠지.

        

       “……좋아. 팁은 필요 없어.”

        

       솔직히 대체 뭘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내원은 테이블에 있는 전화기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대장간 부탁합니다.”

        

       우리에게 보였던 모습과는 상당히 상반된 목소리로 안내원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마치 나를 판단해보겠다는 듯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훑어보았다.

        

       게임에서야 장비를 단련할 때 거의 장난감 부품을 끼웠다 뺐다 하는 수준으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애초에 마법 지팡이에는 마르마로스를 끼우는 부분이 있었으니 심각하게 오래 걸리지는 않더라도, 제대로 끼워 넣고 상태를 조정하려면 최소 수십 분에서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이 시간에 바로 의뢰하러 떠나지는 않았다. 시간은 조금 남아있었으니 그동안 무기를 맡겨두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무슨 확신이라도 드는 거야?”

        

       앨리스가 그렇게 물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본 앨리스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어, 밤늦게 미안하다. 의뢰소의 프리다다만—”

        

       한동안 수화기를 붙잡고 있던 안내원이 입을 열었다.

        

       *

        

       “…….”

        

       엘리멘탈 베어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는 와중에, 미아 크로우필드는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여전히 헉헉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생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 끝에서는 푸른 빛의 보석이 반짝였다.

        

       내가 지하수로에서 얻었던 마르마로스였다.

        

       ……솔직히 조금 무섭긴 했다. 저걸로 부린 마법이 나를 향하면 나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주인공 일행이 다치는 것은 싫었다.

        

       이 의뢰를 애초부터 받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싫었다.

        

       그렇다면, 뭐.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다른 활로를 모색해봐야겠지.

        

       “……잠깐 쉬도록 하죠.”

        

       헉헉거리는 소리를 대놓고는 내지 않는 미아 크로우필드 때문에 일행은 지친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뒤쪽을 돌아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미아 크로우필드가 있었으니까.

        

       “힘들면 얘기를 하지 그랬어.”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잠깐 자리에 앉아 쉬기로 했다.

        

       나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미아 크로우필드에게 물병을 건넸다.

        

       그녀는 말없이 물병을 받아서 들고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그러는 와중에도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무척 귀한 마르마로스를 그냥 주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나라도 엄청나게 의심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나는 굳이 미래를 봤다고 설명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이 방법이 먹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미아 크로우필드가 다시 건넨 따뜻한 수통을 받아들면서 생각할 뿐이었다.

        

       *

        

       특정 속성의 마르마로스를 잔뜩 장착할수록, 마법의 ‘실행 시간’이 줄어든다.

        

       현실로 바꿔말하자면, 굳이 길게 정신 집중을 하지 않아도 마르마로스 자체의 마력으로 보조가 된다는 소리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더 많아지고, 그 마법을 쓸 수 있는 시간도 훨씬 빨라진다.

        

       ……현실이 게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게임의 설정 자체는 현실을 의식해 만드는 법이니까.

        

       “스피투스 글라페스!”

        

       얼음의 정령이여.

        

       미아의 외침은 그렇게 들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엘리멘탈 베어의 입 안에 커다란 얼음송곳이 쑤셔박혔다.

        

       빛나던 엘리멘탈 베어의 입안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입 안에 큼직하게 박힌 단단한 얼음에 쩌적 금이 가고, 그 금의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들듯 흘렀다.

        

       하지만 곰은 죽지 않았다.

        

       탕!

        

       뭐, 그 직후에 금방 머리가 꿰뚫렸지만.

        

       이미 한 번 총알이 박혔던 오른쪽 눈을 향해 다시 한 발 쏘자, 그대로 그쪽 머리가 무너지듯 머리 가죽이 안으로 움푹 파였다.

        

       목에 얼음이 박히고, 가죽은 검에 베여서 너덜너덜해지고, 머리 한쪽이 내려앉은,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끔찍한 모습으로 곰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위로 부풀어 올라 있긴 했지만, 자세 자체는 곰 가죽을 그대로 벗겨 만들어낸 카펫 같은 자세였다.

        

       “……음.”

        

       그런 엘리멘탈 베어를 보고,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제값 받기는 그른 것 같네.”

        

       그 농담에 웃은 사람은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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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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