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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62

   오랜만에 들린 성지는 고요했다.

   

   

   교황이 벌인 사태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다.

   

   

   그 미친놈은 자신의 사람들만을 데리고 교회를 빠져나가기도 했고,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내전은 진정한 성녀에 의해 무마되었으니까.

   

   

   헌데도 성지가 활기참 대신 고요를 택한 건 나 때문이었다.

   

   

   얼마 전 페이비는 성지의 사람들에게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페이비가 제멋대로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내가 사도들에게 사실을 밝히겠다고 말한 날. 다른 이들이 다 떠나고 날 찾아온 페이비는 조심스럽게, 절실하게 물었다.

   

   

   성지에 있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줘도 되겠느냐고.

   

   

   당시의 난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말했다.

   

   

   여태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건 교황을 비롯해 날 적대할 이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이 모두 다 사라진 이상 굳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제와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예나 지금이나 난 남들 앞에 서기엔 하자가 많은 인간이니까.

   

   

   처음에는 놀람의 시선으로 보다가도 조금 있으면 눈빛이 짜게 식겠지.

   

   

   기껏해야 날 향한 질투심이 줄어드는 정도가 끝 아닐까. 하고 난 생각했다.

   

   

   그리고 성지에 방문하기로 한 당일.

   

   

   난 내 머리가 얼마나 꽃밭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주신의 사도를 뵙습니다!”

   

   

   순간이동진이 있는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내 앞에 도열했다.

   

   

   절도가 넘치는 모습에 내가 침을 삼키는 동안 주변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분이.”

   “정말 고귀하시군.”

   “예술교단의 사도마저 반했다지 않나.”

   “대륙의 희망이시여.”

   

   

   경외와 경탄과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목소리에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동안 한 기사가 내게 다가와 투구를 벗었다.

   

   

   이전에 내가 구했던 할아버지의 인형이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도님.”

   

   

   너무나도 정중한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깽판을 치는 대신 얌전히 인형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많이 놀라신 것 같네요.”

   

   

   마차 안에서 대기하던 페이비는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 사태의 원흉이 너란 거야?

   

   

   히죽 웃으며 의자에 앉은 나는 다리를 꼬고서 말없이 바닥을 가리켰다.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살피던 페이비는 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마자 마차 바닥에 정좌했다.

   

   

   “이상하네? 내가 언제 이런 걸 부탁했던가?”

   “아뇨. 그렇지만 부탁하지 않으셔도 저흰 사도께 경의를 바쳐야…”

   

   

   발가락 끝으로 신성주머니를 툭툭 건드렸더니 페이비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허접성녀가 이런 변태로 타락하다니. 난 참 슬퍼.”

   “…죄송합니다. 영애님. 다만 이번 일이 제가 독단으로 벌인 일이 아니란 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이젠 다른 변태들을 팔아먹기까지 하네. 윽. 이딴 게 진짜 성녀야?”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제지하지 못한 제 잘못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당신께 경의를 표하고자 한 신자들의 행동은 오롯이 그들의 의지였습니다!”

   

   

   하이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 방해물 정도로 보던 애들이 자처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그것 참 말이 된다.

   

   

   그리고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지위가 바뀌자마자 태도를 바꾸는 쓰레기들의 찬양은 전혀 고맙지 않거든?

   

   

   발로 툭툭 건드리며 페이비를 울상으로 만든 나는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서 그 위에 앉았다.

   

   

   “저딴 허접들 필요 없어.”

   

   

   쟤네들이 백날 날 찬양해봐야 이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저딴 엑스트라들한테 평가가 좋아져 봐야 어디다 쓰냐.

   

   

   좋아해줄거면 진작에 좋아해주던가.

   

   

   그랬다면 아카데미 생활이 좀 더 편했을 텐데.

   

   

   효율충 마인드로 이야기를 했더니 날 바라보는 인형의 시선이 미묘해졌고 날 끌어 안은 페이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얘네 반응이 왜 이래?

   

   

   축축해진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성지에 도착했다.

   

   

   검문조차 받지 않고 안에 발을 들인 나는 길 바깥 쪽에 도열한 채 차례차례 고개 숙이는 이들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리도 귀찮게 굴 줄 알았다면 다른 장소를 고를 걸 그랬어.

   

   

   여기가 내 계획에 가장 효과적일 뿐이지 다른 장소라 해서 안 되는 건 아니었는데 말야.

   

   

   혀를 차면서 고개 숙이는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다.

   

   

   대놓고 날 욕하다가 고개 한 번 숙이는 걸로 제 죄를 사하고자 하는 파렴치한 무리를 본다.

   

   

   그러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난 욕지거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네. 저런 병신들이 한 가득일 줄 알았다면 변태사도를 미리 대기시켜 뒀을텐데.

   

   

   그 놈의 음흉한 시선을 받는게 껄끄러워서 먼저 보낸 게 아쉬워질 줄이야.

   

   

   느릿하게 마차 바깥으로 나온 나는 다급히 무릎을 꿇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주변을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욕지거리를 내뱉어주고 싶다만 그럼 페이비가 여러모로 곤란해질테니 장단에 맞춰주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난 입을 열지만 않으면 변태까마귀조차 홀릴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두 손을 끌어모으고 보란 듯 주신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저들의 한심함마저도 끌어안아주겠노라 외친다.

   

   

   그러자 내가 지닌 권능을 따라서 신성이 움직이며 세상에 빛을 더했다.

   

   

   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사죄를 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진다.

   

   

   난 그 모든 소리를 귀에 담았지만 긍정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도를 올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다시금 마차에 올라타자 수정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늘어트리는 페이비가 보였다.

   

   

   “변태성녀. 그 징그러운 웃음은 뭐야?”

   “보세요! 영애님의 고귀하고도 자비로운 이 모습을! 제가 바란 게 이런 영상이었어요!”

   

   

   수정구 속에 기록된 내 모습은 꽤 그럴 듯 했다.

   

   

   주변에 도열한 채 감정을 훤히 드러내는 사람들과 침착하게 기도를 올리며 신성을 퍼트리는 내 모습이 대비가 되어서 내 대단함이 부각됐다.

   

   

   애초에 외모가 외모다 보니 대충 찍어도 그림이 나오긴 하네.

   

   

   그치만 이걸로는 부족해. 그럴 듯 하지만 강렬하지 않아.

   

   

   역시 자연스러운 걸로는 한계가 있나.

   

   

   연출이 좀 들어가줘야 보는 사람들마다 뽕이 차서 찬양할 법한 게 나오지.

   

   

   지난 번 변태사도에게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각지의 사람들을 설득할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다투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이 쪽도 감성으로 밀어붙여야 해.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걸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고, 이 세상이 정말로 위험해졌다는 걸 인지하게 만들만한 영상을 찍어서 각지에 퍼트리는 거야!

   

   

   아마추어가 제멋대로 찍는 영상이니 어설프겠지만 상관 없어! 어차피 내 영상을 볼 이들은 무지렁이들일테니까!

   

   

   사도들을 설득하는 것과 사도 아래에 있는 자들을 설득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각 교회의 사도들은 신이 눈독 들일 만한 가치를 지닌 이들이며 한 종교를 대표하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지식인이라 불러 마땅한 사도들은 어지간한 선전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고 설령 유혹에 넘어갔다한들 신격이 그들에게 경고를 전하기에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다.

   

   

   허나 신도들은 다르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 세상의 주민이다.

   

   

   현대사회의 문물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판타지 세계의 인간이라면 어설픈 영상만 보여줘도 감복하며 고개를 숙이겠지.

   

   

   그리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미지는 사람들을 손쉽게 바보로 만드니까.

   

   

   성지 건물 내부에 들어온 나는 입구부터 늘어선 내 그림들을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페이비. 날 찬양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이래서야 주신과 사도의 관계가 뒤집힌 것처럼 보이잖아.

   

   

   실제로도 내가 허접주신을 그리 공경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너만큼은 이럼 안 되지.

   

   

   “모든 이들이 영애님의 업적을 눈에 새길 때까지는 이대로 내버려 둘 겁니다.”

   

   

   업적인가.

   

   

   그러고 보면 그림들이 하나 같이 내가 싸워왔던 것들을 그린 거네.

   

   

   악신의 사도. 불의 악신. 어둠의 악신. 공허의 악신. 이외에도 내가 겪어 온 여러 싸움들을 그린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내가 여기 서 있는 게 기적적인 일이라는 걸 느꼈다.

   

   

   “대륙에 사는 이들은 영애님께 감사함을 느껴야 해요.”

   

   

   페이비의 단호한 말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성지의 본당에 발을 들였다.

   

   

   미리 와서 요정여왕과 함께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변태사도는 날 보자마자 환호와 함께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알른 영애! 당신의 모습을 기록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영애께서 말씀하셨던 여러 연출도 준비가 끝났답니다. 어서 빨리 실물을 보고 싶네요.”

   

   

   자아. 그럼 대륙의 사람들을 속여넘기기 위한 영상을 찍어볼까.

   

   

   *

   

   

   루엘은 정신세계에 갑작스레 처들어 온 두 친우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악신의 사도에게 아그라의 조각을 넘겨주고 도망쳤단 거냐?”

   “도망쳤단 말은 좀 그렇군. 전략적인 후퇴라고 해주게.”

   

   

   가라드가 장난스레 답하자 루엘이 대놓고 한숨을 내뱉었다.

   

   

   “일부러인가?”

   “주신께서 이를 바라셨네.”

   

   

   용사가 느릿하게 대답하자 루엘이 그들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가 말하길 주신께선 변수를 없애려 한다고 하셨다. 자신의 사도가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고.”

   “주신께서 언질을 해주셨나?”

   “아니. 루시가 홀로 추측한 내용이다.”

   “영민하군.”

   “그러니까. 저런 애가 우리 리더였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용사 때문에 일어난 여러 고생을 가라드가 언급하자 용사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이 곳에서 신세를 좀 지겠네.”

   “그건 상관 없다만 루시한테는 뭐라고 할 거냐.”

   “우리 존재는 비밀로 할 걸세. 본래 있어선 안 될 이들이니까.”

   “실패자인 우리들에게 저 아이가 의지하는 것도 곤란하고.”

   

   

   용사 일행의 방식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니 루시는 용사가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루시는 이 둘의 존재를 모르는 편이 나았다.

   

   

   “일단 알겠다. 최대한 숨겨보도록 하지.”

   “고맙네. 루엘.”

   “근데 있잖아. 저 꼬맹이는 왜 갑자기 힘껏 화장을 하고 있는 거냐?”

   

   

   가라드의 의문을 들은 루엘은 프레테와 에린에게 몸을 맡긴 루시를 살폈다.

   

   

   본래도 아름다운 그녀에게 여신과 요정여왕의 축복이 깃드니 예쁘다 못해 신비롭고 경외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렇게 꾸민 루시가 입을 다문 채 자신의 권능을 펼친다면 누군가 여신께서 강림하셨다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겠지.

   

   

   “보면 알 걸세.”

   

   

   루엘은 모든 걸 알았지만 일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경악할 친우들의 반응이 기대되는 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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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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