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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66

        

       사뿐사뿐.

       선녀가 날개옷을 두르고 조심스레 눈밭에 발을 디디는 것처럼.

       소녀의 발자국은 가벼이 움직여 조심스레 바닥에 닿는다.

       잿더미가 가득한 발자국에 발끝이 살포시, 그리고 자그마한 발 전체가 꾹 바닥에 닿아 그 자국을 남기느니.

       하지만 그 자욱이 닿기가 알 수 없는 힘이 발을 보호하며 그 흔적을 없애 본래 새겨져야 할 자국을 남기지 아니한다. 새까만 재는 신발에 들러붙지도 않고, 밀려나지도 않으며, 헤집어지지도 아니하고 그저 그 자리에 우직하게 존재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침묵을 지킨다.

         

       그렇게 소녀는 움직인다.

       허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잿더미의 위에서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선녀처럼.

         

       그리고 그 옆에 거니는 낙타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을 쓴 낙타가 그녀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듯 움직인다.

       천천히.

       네 발로 잿더미 위를 거닐며.

         

       그렇게 소녀를 지키는 것처럼, 마치 소녀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인다.

         

       [ 이곳은 본래 네가 지금 올 수 없는 곳이란다. 지금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힘으로는 안전하게 들어오는 것이 힘들고, 네가 가지고 있는 무력으로는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소녀의 보호자.

       계약자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존재.

         

       악마, 그레모리가 계약자에게 속삭인다.

       아름다운 소녀, 아직은 미성숙한 꽃봉오리에 속삭인다.

         

       이곳은 ‘원래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 계약자야, 네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게임이라고 친다면, 이곳은 적정 레벨이 높아서 네가 들어오면 너무나 위험한 던전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 ]

         

       그레모리는 혹여나 이세린이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비유하기까지 했다.

         

       게임으로 말이다.

         

       그레모리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지금의 이세린은 레벨 20~30 정도의 초보자.

       그리고 이 공간은 레벨로 따지자면 40에서 50정도 되는 곳이라고.

       게임 대부분이 그렇듯 적정 레벨이 높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스킬을 가지고 있거나 아이템이 좋으면 가서 사냥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응. 잘 알아. 내가 낮은 레벨이라는 말이지….’

         

       친절한 설명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법.

         

       이세린은 그레모리의 ‘친절한 설명’에서 그 본질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이곳이 멀쩡할 때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세린은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성장이 덜 된 것은 사실이었으니 화낼 일도 아니고, 딱히 성장욕이나 승부욕이 심한 것도 아니다. 그녀의 혈연 메이트인 이아린이나 집착하는 것이지, 그녀는 딱히 세계 최강의 존재가 되겠다는 욕망 따위는 없었다. 그냥 호기심 좀 충족하고, 안전을 위한 힘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위험할까 봐 숨겼다는 것은…. 조금은 화가 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성격상 듣고 나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끙끙댔을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오히려 실망은커녕 기뻐해야 할 것이다.

         

       오빠 덕분에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에 들어가서 비밀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오빠에게 감사를.’

         

       이세린은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박진성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속으로 고맙다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레모리가 인도하는 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로 움직여, 피라미드였던 무언가로 향했다.

         

       [ 계약자야. 아래를 잘 살펴보거라. 아래에 눌어붙은 무언가가 보일 것인데, 그것은 이 장치가 멀쩡할 때 ‘관’이었던 것들이다. ]

         

       ‘관…? 죽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집…?’

         

       [ 아니. 그 관(coffin)이 아니라 관(Pipe)이란다. 에너지를 옮기는…. 일종의 혈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지. ]

         

       ‘에너지…?’

         

       [ 그래. 이 장치는 학생들이 사용하고 허공으로 휘발되는 잉여 에너지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장치란다. 말하자면 일종의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지. ]

         

       ‘…불법 같은데….’

         

       [ 물론이란다.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불법으로 지정된 행위지. 동의 없이 에너지를 수집하는 행위, 심지어 그 대상이 미성년자라면….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자면 전 세계적으로 손가락질받고도 남을 일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

         

       그레모리의 설명을 들은 이세린은 왜 그레모리가 이 시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불법으로 행해지는 에너지 수집, 심지어 어떤 나라를 가든 욕을 먹고도 남을 미성년자와 얽힌 범죄라….

       이런 것을 발견해냈다면 이 장치를 설치한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밖으로 퍼져나간다면 어마어마한 손해와 비난이 그들에게 덮칠 것이니,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이세린을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 계악자야. 네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은 것도 아니란다. 이 장치를 설치한 작자들이 밖으로 이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리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할 수준은 아니거든. ]

         

       ‘왜…?’

         

       [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한데. 지금의 계약자에게 위험하지 않은 수준까지만 말하자면, 그래. 이 장치를 만든 이들이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서 약간 시끄러운 수준으로 여론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 미성년자의 에너지를 동의도 받지 않고 수집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미성년자 능력자를 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범죄라는 것, 그리고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하나하나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란다. ]

         

       ‘아…. 배경.’

         

       [ 그렇다. 하나같이 권력자와 혈연관계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후원을 받고 있지. 설령 지금 연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권력자에게 직접 투신해서 지켜달라고 하면 지켜줄 게 뻔하고…. 그러니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란다. ]

         

       그렇기에 그레모리는 게임으로 비유를 들 때, 이곳을 레벨 40~50 정도의 공간이라고 한 것이다.

         

       권력자가 얽혀있기에 위험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세린에게 그 위험성은 현저히 낮아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세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레모리는 이곳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인데….

         

       [ 그리고 이는 네 오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아니, 오히려 네 오빠는 훨씬 위험도가 낮다고 볼 수 있겠지. 단순히 배경을 가진 수준을 넘어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주체이니까 말이다. ]

         

       변수가 생겼다.

       아주 긍정적인 변수가 말이다.

         

       그 변수의 이름은 박진성.

       이세린에게 레벨 40~50 정도의 적정 레벨의 던전을, 적정 레벨 0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이 공간을 싹 다 불태웠음에도 아무런 보복도 당하지 않을 사람.

         

       아니, 보복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장치와 얽혀있는 이들이 걱정할 것이다.

         

       박진성이 이 수상한 공간에 대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말이다.

         

       아마 비밀로 하기 위해 박진성과 접촉하고 회유하려고 하겠지.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면…. 뭐, 그래도 별일은 없을 것이다.

         

       정치나 권력을 사용해서 괴롭히기에는 진성의 능력과 인맥 때문에 힘들 것이고.

         

       사적 제재는…미치지 않고서야 행하지 않을 것이다.

       주술사에게 사적 제재로 원한 관계를 쌓는 것은 미친 짓이었으니까 말이다.

       주술사와 원한 관계라…. 언제 어디서 살(煞)과 저주를 맞아서 끔찍한 일을 겪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그러니 계약자야. 걱정은 버리고, 바닥에 있는 관을 자세히 살펴서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잘 확인하거라. ]

         

       ‘응.’

         

       이세린은 그레모리의 말대로 바닥의 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기는 한데…. 실제로는 아니야. 그건 눈속임. 진짜는 바닥. 바닥에 관들이 숨겨져 있어.’

         

       [ 정답이란다. 계약자의 눈썰미가 좋아져서 참 기쁘구나. ]

         

       이윽고 이세린은 관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찾아내었고, 그레모리는 그런 이세린의 모습을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헤벌쭉 웃고는 어느 한 지점을 툭툭 발로 건드리며 말했다.

         

       [ 계약자야. 이곳에 권능을 사용하거라. ]

         

       ‘응.’

         

       권능.

       초월자와 계약한 계약자가 사용할 수 있는 힘.

       계약한 초월자마다 다른 그들만의 특색이 있는 힘.

         

       그 권능이 이세린의 몸을 빌려 발현되기 시작하였다.

         

       눈에 붉은빛의 광택이 맴돌았다가 사라지고, 그녀의 긴 머리끝이 마치 새빨간 물감에 머리카락 끝을 담갔다가 빼내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하였고, 능력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에너지가 아닌 좀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가 극미량 그 끝에 머문다.

       그리고 그렇게 머물렀던 에너지는 그녀의 몸속에 녹아들기라도 하는 듯 그대로 사라지고, 그녀의 머릿속에 어떠한 정보를 알려준다.

       마치 머릿속에서 자그마한 악마가 중요한 비밀을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정보에 따라, 이세린은 몸속에서 에너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취월심공(取月心功).

       예전 그레모리와 함께 찾아내었던 무공.

       일반적인 무공과는 달라 괴공(怪功)이라 불러도 무방할 심법.

         

       『 원후취월(猿猴取月), 정중로월(井中撈月), 착월선후(捉月獮猴). 』

         

       일반적인 무공과는 달리 에너지를 내공으로 가공해 쌓아두지 않는다.

       샘에 비친 달이 그러하듯, 물에 비친 달을 건져내는 것처럼.

       밤이 되어 달이 떠서 비치고 낮이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이 심공에서 비롯된 내공 역시 잡을 수 없는 환상과 같나니.

       이 심법을 익힌 자는 단전이 없으며, 그곳에 쌓아둔 내공 역시 없다.

         

       다만 그렇기에 다른 능력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신공(神功)이요, 또한 괴공(怪功)이니.

         

       “합!”

         

       여러 능력을 익힌 이세린이 주먹에 권기(拳氣)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심법 덕분이며.

         

       콰앙!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곳을 주먹으로 깨부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그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계단…! 비밀공간이야!’

         

       [ 좋아. 계단을 발견했구나. 계약자야, 이제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내려가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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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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