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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66

       

        

        

        

        

        

        

        

        

        

       “<…그런가. 베이커 그 놈이 결국…>”

        

       “…?”

        

       “<세상 참 모르겠군. 그 녀석이 죽어가면서 네게 준 호의가 이렇게 되돌아왔나. 망할 자식 같으니…고맙다, 꼬맹이. 네 덕분에 그래도 그 자식이 헛걸음한 건 아니게 되었어.>”

        

       “…그,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겠지.>”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메이모니즈 메디컬 센터.

        

        차갑게 냉각된 공기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역겨운 혈향. 아마 지금쯤이면 휘하 부하들이 시체들을 밖으로 내던지고 있으리라 – 그리 생각한 대위는 손에 쥐어진 베이커 병장의 인식표를 보았다.

        

        성과 이름, 사회보장번호와 혈액형, 종교 등이 적혀있는 짤막한 금속 쪼가리. 거기에 지도, 그리고 유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꼬맹이가 가지고 있던 메모까지.

        

        한 사람의 죽음과 맞바꿔 남겨진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촐했다. 그는 목구멍에서 치솟아오르는 끔찍한 씁쓸함을 억지로 삼키며 덧붙였다.

        

        유진이 아니라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분대장이자, 이곳에서 유일한 홍일점인 미첼 하사에게.

        

        

        

       “<…미첼 하사. 이 꾀죄죄한 친구를 예쁘게 빨아오도록. 나는 민간인들과 접촉해야겠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야겠군. 그나저나 이 꼬맹이, 북한 출신은 아니겠지?>”

        

       “사우스! 사우스 코리아예요, 이씨…!”

        

       “<알겠다, 알겠어.>”

        

        

        

        그는 손을 내저었고, 미첼 하사라고 불린 머리카락이 붉은 여성 하사는 유진을 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벙벙한 표정을 지은 유진이 총기를 지휘통제실에 적당히 내려놓은 채 복도로 사라졌다.

        

        방금 말한 것을 얼추 알아들을 정도라면 아예 막귀는 아닐 것이었고, 그는 직접 일어나는 대신 근처에 있는 인원을 아무나 시켜 민간인 쪽에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도록 시켰다.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는 그보다 지휘권이 높은 사람이 몇 명 없었고, 이 병원 내에 있는 미군 중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변을 눈 부릅뜨고 감시하는 CCTV 감시병을 제외한다면 지휘통제실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고요해졌고, 그 사이 얼굴을 씻고 나온 3소대장 엘리슨 중위와 2소대장 프로스트 소위가 내부로 들어왔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이들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무슨 고민 하고 있는지 맞춰보시겠습니까, 대위님?>”

        

       “<저 꼬맹이 데려다 써먹을 방법 고민하고 있겠지, 이 자식아. 헛된 꿈꾸지 마라. 꼬라지 보니 18살도 안 된 것 같구만.>”

        

       “<자기 입으로 21살이라고 했잖습니까, 빌어먹을.>”

        

       “<너는 저 얼굴이 21살로 보이냐?>”

        

       “<하, 제발. 아시안들은 더럽게 안 늙는 게 특성이란 말입니다. 제 말 좀 믿어보십쇼. 옛날에 제가 일본 여행을 세 번이나 갔다왔단 말입니다.>”

        

        

        

        지랄.

        

        한숨을 내쉰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고, 두 명은 그를 따라 건물의 뒤편으로 갔다. 얼마 남지 않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대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인력이 모자란가?>”

        

       “<인력이야 원래 없었습니다. 요점은, 우리가 지금 저 꼬맹이 손까지 빌려야만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하단 겁니다. 베이커랑 벤츨리 중사가 메이플턴 어딘가에서 살해당한 거 아시잖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조금 더 빨리 이 지랄같은 곳에서 탈출했어야만 했는데. 브루클린은 이미 답이 없는 동네야. 이렇게 파편화된 전력으로는 맨해튼도 간신히 지킬 수 있겠지.>”

        

       “<배는 언제 온답니까? 맨해튼으로 우리 실어나른답시고 조디악 같은 좆만한 보트나 보내주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모르지.>”

        

        

        

        순식간에 다 타버린 꽁초를 주변에 적당히 내던진 그가 덧붙였다.

        

        

        

       “<까놓고 말해서 수송헬기 한 대 정도 보내놓고는 끝날 수도 있어. 지금 우리가 데리고 있는 민간인만 70명 정도니, 그렇게 되면…그야말로 망했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

        

       “<브루클린이랑 맨해튼이랑 이어지는 캐레이 터널로 가면…아니다. 거기 환기 건물이 통째로 붕괴됐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진짜입니까?>”

        

       “<거기서 수몰된 사람이 몇 명인지 듣고 싶나?>”

        

        

        

        정적이 휘몰아쳤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그것도 매우. 센트럴 파크에서 보내져오는 동향조차 가면 갈수록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맨해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1도 알 수 없었다.

        

        가는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이동수단만 있다면. 하지만 다들 그리 잘 먹지 못하고, 몸도 약해졌다. 그나마 어떻게든 근방의 주유소를 털어 발전기를 돌릴 연료까지는 일부 충당했지만….

        

        게다가 차량은 자동적으로 논외였다. 길이 버려진 차들로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브루클린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움직이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대이동 준비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대량의 일손이었고, 지금 이들은 한 사람도 아쉬운 시점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지금도 노인을 제외한 이들이 각종 임무에 동원되고 있는 판이었고, 거기에 사람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프로스트 소위가 말했다.

        

        

        

       “<듣자 하니 총도 곧잘 쏘는 것 같고. 지금 사람을 가릴 처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까놓고 말해서 사태 초반에 제멋대로 활동하다 죽은 머저리들보단 훨씬 낫습니다…의사소통 문제만 빼면 말입니다.>”

        

       “<그렇겠지. 일단 그 꼬맹이랑은 차분히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적당히 시켜야겠지. 추후 방침은 그 후에 정해야겠어.>”

        

       “<2소대에 결원이 두 명 생겼습니다. 만약 보낼 거면 이쪽으로 좀 보내주십쇼.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지경입니다.>”

        

       “<알겠다, 알겠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지휘통제실로 돌아갔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예상에 없던 교전으로 인해 아침식사가 완전히 생략되어버렸고, 곧 있으면 점심이었다. 고작해야 2개 소대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민간인들에게 점심치 전투식량을 배분해야 하고, 시설 곳곳에 널려있는 적 시체도 치워야만 했으며, 오늘 교전을 치룬 이들은 그 사이 건클리닝까지 끝마쳐야만 했다. 기능고장의 끝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였고, 이건 이거였다.

        

        지휘통제실로 돌아온 그는 이전에 비해 한층 깔끔해진, 그리고 한층 두툼해진 유진을 맞이하게 되었다.

        

        

        …두툼?

        

        

        

       “<…미첼. 내가 저 꼬맹이를 빨아오라고 했지, 눈사람으로 만들라고 한 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추위를 심하게 타더군요. 헛구역질까지 하길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뱀은 온도의 변화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하잖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알겠네. 그리고 옆에 있는 분은…매튜 씨로군요. 한국어 좀 할 줄 아십니까?>”

        

       “<과거에 몇 번 출장 갔던 적이 있지. 그닥 자신은 없네만…지금까지 받아먹은 게 있으니 최대한 노력해보지.>”

        

        

        

        드르륵. 의자 빼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 폴리카보네이트 벽이 세워진 테이블 하나를 둔 채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느샌가 다른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좌우지간 확실히 아까보다는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다.

        

        등 뒤에서 느릿하게 꿈틀거리는 꼬리가 조금 신경쓰였지만, 현 시점에서는 드문 모습일지언정 완전히 비현실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형형색색의 번개가 치고 사람 머리에서 동물귀가 자라나는 판에.

        

        좌우지간, 아직까지는 그녀가 오메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에 대한 여부를 알 수 없었기에, 대위는 슬그머니 마스크 위치를 조정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왔지?>”

        

       “….”

        

       “<미국은 언제 왔나?>”

        

       “…여행을 왔었는데, 갇혔어요. 공항에 가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행 중 미국에 갇혔다고 합니다. JFK 국제공항에 가려고 했으나 불발되었다는군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답변 대신 지도에 손가락을 올렸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그녀는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위험구역에서 머물거나 지나온 적은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실하진 않았다.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아야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 후로도 그는 여러가지를 물었다. 질문 자체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지, 매튜라는 이름의 남성은 큰 문제 없이 유진의 말을 영어로 번역했다.

        

        

        베이커 병장의 최후는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난 탈옥수들이 말 그대로 주변을 휘젓고 다니며 부리는 온갖 패악질에 휘말려버린 것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 이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자그마한 쇳조각의 감각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눈을 끔뻑거리던 유진에게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지 4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바이러스.

        

        뉴욕을, 그리고 미국의 다리를 분질러버린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얼추 서로의 상식 수준이 맞춰질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네 목적은 알겠다. 그 부분에선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군.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줄 수는 없다. 현재 이곳은 일손이 극도로 부족하다. 의식주의 제공은 가능하지만 대가로 노동력을 요구하지. 이해했나?>”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줄 수 있지만, 일을 해야 한다.”

        

       “….”

        

        

        

        그녀는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마치 더 이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마지막으로 찾아온 작은 강아지 같기도 했다. 한순간이나마 파쿼슨 대위의 눈 앞에 그런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남들에게 품는 연민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 유진이 무엇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극이 보편화된 망가진 사회에서는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어설픈 위로 대신 폴리카보네이트 벽을 열고는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107헌병중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꼬맹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간신히 붙잡을 수 있는 구명줄 하나를 잡게 되었다.

        

        그녀의 천직 중 하나가 막노동이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 몇 시간 전이었다.

        

        

        

        

        

        

        

        

        

        

        

        

        

        

        

        

        

        

        

        

       “에으, 영어 너무 어려워어….”

        

        

        

        머리 아파….

        

        미국이라는 낯선 동네에 떨어진 지 4일차, 나만을 위한 방과 밥, 옷을 얻는 대가로 누가 시키지 않으면 손도 안 대던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현재 내 상태였다.

        

        그치만 반대로, 태어난 이후로 이렇게 영어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또 없었다. 어떻게든 욱여넣고 연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랑 말하는 것 자체가 안 되는 걸.

        

        옛날에 학교에서 문제집 풀 때도 이따시만큼 두꺼운 영어사전 펴놓고 공부한 적은 없었는데…때묻은 옥스포드 영한사전이 테이블 위에 위풍당당하게 펼쳐져있었지만,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어떻게 공부하는 거더라….

        

        

        

       ‘…옛날처럼 대뜸 아무 단어나 외우면 안 되겠지?’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가장 자주 하게 될 것인지, 혹은 저들이 나에게 무엇을 물어볼 것인지…그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내가 뭘 공부해야만 하는지는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일단 이 꼬리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저찌 넘어간 것 같지만, 여기에서 제일 계급 높아보이는 사람이 나한테 아무런 질문을 안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아무 것도 안 물어보지는 않겠지.

        

        아이 돈 노우 같은 1차원적인 대답 말고,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보면…눈을 떠보니 이렇게 되어있었다-라는 문장을 영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만에 머리를 쓰니까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배고파아.”

        

        

        

        뭔가 좀 먹긴 했지만, 아직 한참은 모자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런 몸이 되면서 밥을 더 많이 먹게 됐다. 배도 자주 고팠고. 어쩌면 이 몸은 칼로리 소모량이 다른 게 아닐까.

        

        처음에는 제대로 안 익은 통조림 같은 걸 까먹어서 그런지 배탈도 자주 났지만, 트럭에서 가져온 전투식량 같은 걸 데워서 먹었을 때는 아무런 아픔도 없었고.

        

        그리고 다행히도, 여기에서는 어떤 전투식량들은 다들 안 먹고 버렸기에, 나도 모르게 몰래 몇 개 정도 집어왔다. 처음에는 상한 줄 알았는데 상한 것도 아니더라. 배고파서 그런지 뭘 먹어도 먹을 만했다.

        

        이걸 왜 버리나 몰라.

        

        

        그렇게 Ready-to-Eat이라고 적혀있는 물건을 두세 개 정도 까먹고 나니 만족할 정도로 배가 불렀고, 나는 남은 잔해를 쓰레기통에 적당히 버린 채 다시금 영어공부에 몰두했다.

        

        …근데 조금 졸려.

        

        그래도 졸리다는 건 조금 다행인 소식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잠도 잘 못 잤었으니까. 피곤한데 잠도 못 자고, 악몽 꾸고, 일어나면 질질 짜고…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 무턱대고 저질렀지만, 그래서 이렇게 방도 얻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 투성이였지만, 그쪽을 떠올리게 되면 금방 다시 우울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한두 시간 동안 방에서 생쇼를 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영어 문장도 만들어보고,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단어도 외우고. 문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전자사전이나 그런 게 있으면 달라 해볼까.

        

        이거라면 나도 그래도 한두 마디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철컥!

        

        

        

       “엣, 우왓, 헤, 헬로! 아임 파인, 땡큐!”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야. 꼬맹이, 너 방 안에서 MRE 까먹었냐?>”

        

       “에, 잇(Eat)? 예스! 아이 잇(I eat)!”

        

       “<…어휴.>”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지. 자신을 미첼이라고 소개하신 분이 헛웃음 비스무리한 걸 흘렸다. 창피해 죽겠네, 그냥.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걸며 물었다.

        

        

        

       “<맛있었냐?>”

        

       “예, 예스! 딜리셔스!”

        

       “<군인이 천적인 녀석이구만. 따라와라. 이리로.>”

        

       “아, 네에. 알겠어요.”

        

        

        

        그래도 Come 정도는 알아듣는다구….

        

        그녀의 기대치도 딱 그 정도였는지, 미첼은 내가 따라 나오기를 기다린 후 – 내가 그냥 나오려고 하자 항상 영어사전을 지참하란 뉘앙스로 날 쳐다보았다 – 나와 함께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메이모니즈 메디컬 센터라는 곳은 정말 무지하게 넓었다. 거의 축구장 10개 가량을 붙여놓은 거대한 크기였다. 그 덕분에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보관해놓을 수도 있었다.

        

        이런…바이러스 아포칼립스라고 하나, 이걸. 이런 반쯤 멸망한 세계에서 7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주변의 집이나 창고, 건물을 뒤지면 먹을 수 있는 건 나온다 들었고.

        

        

         어디론가로 이동하며, 미첼이란 분은 중간중간 멈춰선 뒤 영한사전을 들고는 영어 단어와 한국 뜻풀이를 교대로 적어내렸다. 한국어야 원래 원이랑 직선의 집합이라 쓰는 건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내게 메모지를 건네주었을 때, 적힌 내용을 대략적으로 압축하면 이런 뜻이 됐다.

        

        

        

       -이 시설은 대량의 물자를 보관하고 있지만, 이를 분배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매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너도 곧 그 물자를 옮기고 분배하는 일을 도울 예정이다.

        

        

        

       “…아, 예스! 예스! 아이 언더스탠! 저 이런 알바 해본 적 있어요!”

        

       “<…숙제다. 방금 한 말 영어로 번역해서 말해.>”

        

       “에, 엣.”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쿠팡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가 영어 맞나? 콩글리시 아냐?

        

        내가 파트 타임 잡이라는 단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그 즈음의 나와 미첼은 의료원 뒤쪽의 물류창고에 도착했다.

        

        그녀는 빠른 말로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나를 소개했고, 나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회백색 군복을 입은 분들은 내게 손짓하더니 수레 같은 걸 가져왔고, 거기에 무언가 물품을 가득 담았다.

        

        다행히 그 즈음부턴 바디랭귀지만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나는 눈치로나마 ‘앞의 사람을 따라가라’는 뜻을 간신히 해석했다.

        

        앞의 군인이 외발 수레를 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약간 튜토리얼 하는 느낌이네.’

        

        

        

        그래서 그런지 무지하게 쉬웠다. 

        

        처음에는 내 체력을 알아보려고 수레에 그닥 많은 짐을 싣지 않은 것 같았던 미군 아저씨들도 점점 수레 위에 고봉밥을 얹어주었지만, 나는 그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페이스를 높였다.

        

        그리하여 일을 다 끝낸 순간, 다들 그래도 ‘적당히 할 건 하네’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쉽다면 아쉽게도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고, 새로운 트럭이 들어왔다. 거기에는…탄통이 잔뜩 실려있었다. 이걸 내가 만져도 되나 했지만, 저들은 약간 서로 눈치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열지 마라, 꼬맹이(Don’t open it, Kid).>”

        

       “예스, 예쓰! 아이 언더스탠드!”

        

        

        

        다들 그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들 탄통을 바쁘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것을 다들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기 시작했다. 수레에 실으면 안 되나 해서 물어보니 트럭 위의 미군이 ‘익스플로전!’이라고 소리쳤다.

        

        어…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넘어져서 덜컹 하면 폭발할 수도 있잖아. 그런 건 무서워.

        

        그래서 다들 두 개씩 들고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두 개씩 겹쳐 찢어지는 걸 방지한 듯한 더플백 안에 세네 개씩 넣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바닥에 쌓인 수백 개의 탄통. 나도 들고 가면 되나 싶어 양손에 하나씩 두 개를 들었고-

        

        

        

       “…엥, 이건 안에 텅 빈 건가?”

        

        

        

        왜 이렇게 가볍지?

        

        잠시 눈치를 본 나는 그 두 개를 내려놓았다. 뒤에서 ‘Is it too heavy for you?’ 같은 말이 나왔지만 무시하고 더플백에 겹쳐 쌓기 시작했다. 그 수만 해도 여섯. 탄통 옆에 20kg라 쓰여있었으니 120kg인가?

        

        뒤에서 말리려는 듯했지만, 어느새 나는 가방을 멘 듯한 모양새를 취했고 –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들었다. 오히려 이렇게 쉽게 들려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양쪽 손에 하나씩, 그리하여 등에 6개, 양손에 2개를 든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사람들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앞서 가선 사람들이 기겁했지만,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이씨, 이런 몸을 여기 말고 한국에서 얻었으면 상하차로 떼부자 되는 건데….”

        

        

        

        아무래도 내 천직을 찾은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나는 처음으로 내가 유용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저 꼬맹이 뭐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자고. 앞으로 일손 좀 덜겠어.>”

        

        

        

        한편, 물류창고.

        

        어벙벙한 얼굴을 하던 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훌륭한 막노동꾼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상하차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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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Returned, but I Cannot Lay down My Gun

I Have Returned, but I Cannot Lay down My Gun

귀환했지만, 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Just the fact that I came back couldn’t be the end of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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