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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7

     

    “제가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저주는 사람의 육체가 아닌 혼에 작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휴고의 설명에 흥미를 느꼈다.

     

    “지금까지 그건 몰랐는데. 혼에 감염되는 질병 느낌인가.”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이 내부를 찍는 사진의 원리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저주가 찍혀 나오는 건 확실합니다.”

     

    “검게 찍힌 부분이 저주지?”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혼은 육체와 같은 모양이지요. 저주는 적용된 신체 부위의 일부 혹은 전체를 두르는 형태를 합니다.”

     

    휴고가 내가 제시한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사룡은 두개골 외곽부가, 언데드는 시체 전신의 외곽부가 시꺼먼 덩어리로 감싸져 있다.

     

    “지금 제 손도 찍어보실 수 있습니까?”

     

    “가능해.”

     

    나는 휴고의 손도 촬영해 수정구로 띄웠다.

     

    휴고의 팔은 멀쩡하지만 손 외곽부만 검은 테두리가 진 모양새다.

     

    “신체의 일부만 저주의 영향을 받으면 이런 모양새가 됩니다.”

     

    “과연.”

     

    “다른 사진들과 복부에 저주가 들어있는 첫 번째 사진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저주가 내부에 들어있어.”

     

    “역시 선생님은 예리하시군요. 바로 그게 아주 이상하고 다른 점입니다.”

     

    휴고는 아셀라의 복부, 시커먼 부분을 가리키며 내게 설명했다.

     

    “이 저주가 내장에 영향을 미치는 종류라면 배의 외곽을 따라 표시되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내부가 까맣다. 이건 즉.”

     

    “안에 몸 주인과 다른 영혼이 하나 더 들어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바로 그겁니다.”

     

    “일리가 있어.”

     

    휴고가 역설하며 결론을 냈다.

     

    “혼이 저주의 근원이라고 생각됩니다. 악령이나 다름없겠지요. 이 악령을 꺼내서 제거하는 게 가장 빠른 해주법입니다.”

     

    그게 대마녀의 혼인가.

     

    혼이 가진 마법의 재능을 아셀라가 쓸 수 있는 대신, 발생하는 저주로 인한 복통도 함께 가지게 됐다는 소리다.

     

    “현 상태에서 악령만 제거하는 방법은 없어?”

     

    “불가능합니다. 물리적으로 꺼내야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군요. 산 사람의 뱃속을 파헤칠 수도 없고 말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다.

     

    “또, 이 악령이 강하고 자아도 있다면 꺼낸 순간 날뛸지도 모릅니다.”

     

    “날뛰면 자네가 제압할 수 있어? 행여나 이놈이 마법을 쓴다든지 하면.”

     

    휴고는 얼핏 내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진짜 배를 째서 저주째로 제거하겠다는 수술 계획 말이다.

     

    그가 굳은 심지를 가지고 즉답했다.

     

    “반드시 제압하겠습니다.”

     

    “좋아. 이게 어떤 종류의 악령인지, 얼마나 강한지는 계속 파악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저도 연구하면서 실력을 더 갈고닦아야겠군요.”

     

    “좋은 자세야. 클로에, 뒤는 부탁해.”

     

    “어읍, 네엣!”

     

    둘에게 사무실을 맡기고 내의원을 나선다.

     

    그러고 보면 아셀라를 본 지 꽤 지났다.

     

    또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 가끔은 직접 진찰해야지.

     

     

     

    휴고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셀라를 수술할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는 느낌이다.

     

    마냥 미뤄둘 나중 일도 아니다.

     

    ‘수술은 몇 년 안에는 반드시 해야 해.’

     

    여기엔 리미트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언젠가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모처럼 제국이 끝나는 날 아니더냐. 고트베르크, 여기 와서 짐의 술 상대나 하거라.

     

    ―짐이 어떻게 황제가 되었느냐고? 하하, 그야 필연 아니었겠니. 짐처럼 우수하고 훌륭한 성군이 또 어디 있느냐.

     

    ―그래도 마음을 독하게 먹은 계기라면… 응, 있었구나.

     

    ―하나 고백하자면, 아무리 짐이지만 어릴 때도 마법을 마냥 잘 쓰진 않았단다. 놀랐니? 후후,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폭주할 때가 있었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었단다. 그날따라 마력회로가 심하게 요동쳤지. 배도 많이…

     

    ―폭주한 짐의 마력회로가 멋대로 마법을 쏘아댔지. 그걸 막을 사람은 마침 마녀인 짐의 어미뿐이었어.

     

    ―짐은 존속살해를 저지르고 말았어. 카밀라 폰 뷔르템펠트 3황비를 죽여버렸단다. 선인이었냐고? 아니, 악인이었어. 누가 봐도 더할 나위 없는 악인.

     

    ―오히려 짐의 행동을 전대 황제가 칭찬했어. 그는 그때부터 짐을 맘에 들어했지.

     

    ―그래도 짐의… 모친이었어.

     

    ―하나뿐인 모친 말이다.

     

    ―어쩐지 그때부터 목소리가 더 잘 들리지 뭐니. 하하하, 이제 전부 이루었구나! 불타라, 더 불타란 말이야!

     

     

    무너지는 황궁을 향해 포도주를 뿌려대는 아셀라의 뒷모습은 꽤 인상적이어서 똑똑히 기억한다.

     

    불길을 배경 삼아 치맛자락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그녀는, 축제 분위기에 고양되어서 캉캉춤을 추는 걸로만 보였다.

     

    ‘엔딩리스트는.’

     

     

    [No. 101 : 마력폭주 4% → 7%]

    [변동됨]

     

     

    최근엔 별다른 이슈가 없었는데도 스멀스멀 확률이 올라갔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조금씩 올라가겠지.

     

    아셀라가 이야기한 사건의 날, 폭주한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약간은 있다는 뜻이다.

     

    ‘아셀라가 미친 것도 그날이겠지.’

     

    적에게 폭언을 하고 모질게 대하는 데 거리낌 없는 아셀라지만 유독 카밀라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그녀다.

     

    혈육이라는 이유가 마음을 잡아끈다.

     

    그날 이후로 독해진 아셀라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최단루트로 황제가 되고,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갈 날만 기다렸다는 소리다.

     

    세상을 멸망시켰어야 할 이유는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아직 시간 여유는 있다.

     

    아셀라의 뱃속 시한폭탄은 터지기 전에 내가 제거한다.

     

     

     

    ***

     

     

     

    “저녁 문진 드리겠습니다, 황녀님.”

     

    일과를 마친 아셀라를 만났다.

     

    아셀라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뗐다가, 다시 조용해져서는 나를 노려본다.

     

    탁, 탁. 발소리가 어쩐지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묵묵히 간단한 검사를 진행했다.

    낮 활동 동안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지, 편안히 잠들 수 있을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주군이 잠자리를 설치면 그건 대개 주치의의 책임이 된다.

     

    “마력회로는 정상입니다. 푹 쉬세요.”

     

    “나흘 만에 할 말이 그게 다야?”

     

    “어….”

     

    최근에는 별다른 이슈도 없고 월광궁도 잘 돌아가는데 왜 그러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짚이는 곳이…

     

    설마 사룡 사체를 꿀꺽한 걸 들켰나.

     

    “추가로 원하시는 검사라도 있으신가요?”

     

    아셀라는 한참 나를 노려보더니 콧바람을 내뿜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됐어. 나가.”

     

    “예.”

     

    예민하다, 예민해.

     

    나중에 시녀장 누님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날 밤, 나는 내 방에서 여태까지 아셀라의 검사 결과를 정리하느라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여태 수첩에 적은 자료를 비교해 경과를 확인한다.

     

    ―쿵!

     

    그러던 도중, 어쩐지 방 밖이 부산스러워졌다. 문이 여닫히고 호위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보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선생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보리스가 예의도 없이 내 수면시간을 방해할 기사는 아니다.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 즉시 책상에서 일어섰다.

     

    “황녀님이 쓰러지셨습니다.”

     

    나는 즉시 가운을 걸치고 움직였다.

     

    문지방을 넘어 옆방을 향해 뛴다. 옆방이라 해도 아셀라의 방은 넓어서 이십 미터는 족히 뛰어야 했다.

     

    “선생님!”

     

    아셀라의 방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그들의 발치 밑에 아셀라가 쓰러져 있다. 배를 움켜쥔 상태로.

     

    나는 아셀라에게 달려가 미끄러지듯 쪼그려 앉으며 그녀의 용태를 확인했다.

     

    “황녀님.”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의식은 있다. 대답하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한 상태.

     

    호흡이 가쁘고 온몸이 땀범벅이다.

    이미 잠옷이 차가운 걸로 보아 시간이 좀 경과했다.

     

    혼자서 아픔을 참다못해 방을 기어 나왔나.

     

    즉시 무통약을 꺼내 아셀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마른 입술이 퍼석퍼석하다.

     

    “황녀님, 물을 마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아셀라.

     

    나는 부리처럼 생긴 컵에 물을 따라 누워있는 그녀가 마실 수 있도록 조금씩 흘려넣어 주었다.

     

    꿀꺽, 아셀라가 약을 삼켰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호흡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시녀장 누님이 달려와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셀라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혀달라고 부탁한 후,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3분, 5분.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안일했어.”

     

    마력폭주 엔딩 확률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아셀라의 마력회로가 불안정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신경 썼으면 미리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후에 방에서 나온 시녀장이 내게 전했다.

     

    “황녀님이 찾으셔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셀라를 확인했다.

     

    호흡은 진정됐지만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기에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닦아줬다.

     

    “…공자.”

     

    “네, 황녀님. 여기 있어요.”

     

    천천히 뜬 아셀라의 눈에서 황금색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나를 원망하기도 힘든지, 그저 힘없이 모든 근육을 이완한 반 시체가 되어버렸다.

     

    “많이 아프세요?”

     

    “아니, 지금은 아무 느낌 없어.”

     

    “제 잘못입니다. 황녀님의 마력회로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했습니다.”

     

    “…맞아. 반성해.”

     

    아셀라는 무통약의 효과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지 옹알이를 하듯 중얼거렸다.

     

    “벌 받아.”

     

    “어… 한 번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아셀라의 입에서 직접 벌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소름이 쫙 끼치는데.

     

    “…인형.”

     

    “황녀님의 인형 말이죠. 가져다 드릴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아셀라가 내 가운을 잡아당겼다.

     

    나는 균형을 잃고 아셀라의 침대 위로 넘어졌다. 어깨가 그녀의 작은 몸과 겹친다.

     

    푹신한 솜이 머리를 받치는 감각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슥, 아셀라의 얇은 손가락이 하얀 가운을 스친다.

    더듬더듬 틈새를 찾더니 이내 내 겨드랑이를 파먹으며 팔 전체가 침범해왔다.

     

    “황녀님.”

     

    “…조용히 해.”

     

    가슴팍이 뜨겁다. 아셀라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명치께에 습기가 올라오며 따뜻해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내게 찹쌀떡처럼 달라붙은 아셀라는 내가 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이불 안 덮으면 감기 걸리는데.’

     

    나는 침대 아래쪽으로 밀려난 이불을 조심조심 당겨 아셀라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이불을 함께 덮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에이, 모르겠다.’

     

    밤이 늦었다.

    나도 피곤했기에 일단 눈을 감고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

     

     

     

    다음 날, 볼과 귀가 당겨지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황금빛 눈동자. 마나는 잘 정돈되어 동공을 힘차게 흐른다.

     

    왜 손이 거기 가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한쪽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대며 놀고 계신다.

     

    맨질맨질.

     

    차가워.

     

    “황…”

     

    “조용.”

     

    아셀라는 내 볼을 한참 조물락거리다가 코를 눌러 돼지 모양을 만들고는 키득대며 그제야 손을 뗐다.

     

    “직업정신이 바닥을 치고 있네. 어제 일도 제대로 못 한데다 주군보다 늦게 일어나?”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네게 무슨 벌을 줘야 할까?”

     

    “이미 주셨잖아요.”

     

    “응?”

     

    “덕분에 하룻밤 제대로 숙면도 못 취하고 불편한 자세로 있었습니다. 담 왔어요. 충분한 벌 아닙니까.”

     

    “지금 내 침대에서 잔 게 벌이라고?”

     

    아셀라는 잔뜩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렸다.

     

    “아뇨, 황녀님 침대야 편하죠. 자세나 상황이 문제였고….”

     

    “내가 문제라는 뜻이니?”

     

    “그런 뜻은 아니고요. 솔직히 어제 일은 황녀님 잘못도 조금 있어요.”

     

    “뭐어?”

     

    아셀라가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제가 아프면 바로 얘기해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까지 밤에 갑자기 경련이 오면 그냥 참으셨죠? 바로바로 알려주셨으면 이런 일까진 없었을지도 몰랐겠지요.”

     

    아셀라가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떻습니까. 책임소재가 반반이니 제 벌은 이 정도에서 끝내는 걸로.”

     

    “공자 잘못은 그게 다가 아니거든?”

     

    “그럼 또 뭐요.”

     

    “그게… 아니, 하여튼.”

     

    아셀라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뾰루퉁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러기도 잠시, 금방 강하게 쏘아붙이는 아셀라.

     

    “몰라. 앞으로도 얘기 안 할 거야.”

     

    “엥. 하셔야 한다니까요. 위급 상황에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안 해.”

     

    “아니.”

     

    골치 아프네.

     

    앞으로도 이러다가 갑자기 마력이 안 터진다는 보장도 없고.

     

    아셀라는 정말이지 고집이 세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나는 아셀라에게 제안했다.

     

    “그럼 앞으로는 제가 매일 밤 동침하죠.”

     

    “어, 뭐?”

     

    내 제안에 아셀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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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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